How to Survive as a Terminally-ill Dragon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확실한 한 방 (1)
널찍한 방 안.
긴 소파 위에 쪼르르 앉은 로이스와 쌍둥이.
그 뒤에 파브로가 서 있었다.
로이스는 맞은편에 앉은 페이지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20분 지났네?”
“…….”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40골드를 벌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반면 페이지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로이스가 살짝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영혼이 가출한 듯 보이는 그렉이 앉아 있었으니.
이를 본 로이스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저 할배는 꼭 있어야 하는 거야?”
“…지금부터 할 이야기에 이분이 꼭 필요해요.”
“뭐, 그렇다면야….”
사실상 벌써 40골드를 번 것은 그렉 덕분이기도 했다.
기절한 그를 깨우고 이 자리에 앉히기까지 20분이 흘렀으니 말이다.
때문에 로이스는 속으로 매우 아쉬워했다.
‘조금 더 세게 때리지.’
쌍둥이가 그나마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20분 만에 깨어난 것이지 녀석들이 작정하고 때렸으면 몇 날 며칠을 기절해 있었으리라.
혹은 기절 수준이 아니거나.
로이스가 시계를 훔쳐보았다.
“1분 또 지났다. 후후.”
시간이 흐른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었나?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저절로 돈이 굴러 들어왔다.
이쯤 되니 다급해지는 거는 페이지였다.
“공자님, 그…….”
페이지가 막 입을 떼려는 찰나.
“어찌…….”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가출했던 영혼이 돌아와 조금은 정신을 차린 듯한 그렉.
하지만 그럼에도 흐리멍덩한 눈빛은 여전했다.
그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한 거냐.”
“뭐가?”
“뭘 어떻게 했기에 내가…….”
자신이 어째서 기절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뉘앙스에 로이스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어떻게 하기는 무슨. 그냥 할배가 약한 거지.”
“약하다고……? 내가? 이 그렉 반트가?”
그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특히 2티어의 경지에 오른 이후로는 말이다.
프렌체 왕국 호위 무단의 단장으로 있으면서.
나아가 가을 대륙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면서도 자신과 검을 제대로 맞댄 이는 손에 꼽았다.
한데 지금, 눈앞의 작은 꼬맹이가 자신보고 약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헛소리라고 치부했겠지만.
‘…부정할 수가 없구나.’
실제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제자로 삼고자 했던 아이들에게 패배했다.
자신이 방심했든, 전력을 다하지 않았든.
진 건, 진 거였다.
“허…….”
크나큰 정신적 충격에 인생의 허망함이 느껴진 그렉은 다시금 넋을 놓고 말았다.
그사이 옆에서 초조하게 있던 페이지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1분마다 2골드라는 거금이 쑥쑥 빠져나간다.
이런 잡스러운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그 전에 알려 드려야 할 것도 있고요.”
“마음껏 해, 어차피 내 시간은 지금 네가 돈으로 사고 있으니까.”
유유자적한 로이스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쉰 페이지.
그녀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제 정식 이름은 페이지 콴 프렌체. 이 프렌체 왕국의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예요.”
페이지의 말에 로이스가 살짝 놀란 눈빛을 해 보였다.
‘유일한 왕위 계승자?’
일국의 공주가 바깥으로 나돌기에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여겼다.
프렌체 국왕이 파브로에게 하나뿐인 딸아이를 구해 줘서 고맙다고 했을 때도 ‘딸이 하나뿐이다.’라고 이해했었는데…….
‘그게 진짜 외동딸을 말하는 거였어?!’
이 나라의 유일한 혈손이 그녀뿐이란다.
애써 놀라움을 감춘 로이스는 페이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저는 20년 전 프렌체 왕국을 떠났어요. 아니, 쫓겨났다고 봐야 하죠…….”
그것을 시작으로 페이지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시작됐다.
“25년 전, 나날이 국력이 쇠퇴해가는 프렌체 왕국에 놀라운 재능을 가진 이가 나타났어요.”
고작 17살의 나이에 두각을 드러낸 천재 중의 천재.
수많은 귀족과 상인, 돈 있는 이들이 그를 포섭하기 위해 찾았지만, 이 젊은 천재는 자신의 미래를 프렌체 국왕에게 맡겼다.
“전하께서는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총애하셨어요. 프렌체 왕국을 부흥케 할 인재임을 확신하셨으니까요.”
왕의 믿음에 보답하듯 젊은 천재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왕을 보필하였고, 다시금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처음에는 젊은 천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츰차츰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 가던 젊은 천재는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재상의 위치에 올랐다.
그가 지금의 레반스였다.
“실로 파격적인 등용이었죠.”
레반스의 나이 스물.
고작 평민 출신을, 그것도 스무 살의 어린놈을 재상이란 자리에 앉히니 귀족들의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레반스의 능력을 믿는 국왕은 꿋꿋이 이를 감행했다.
“전하는 믿고 계셨어요. 그라면 반드시 어려운 프렌체를 위해 힘써 줄 거라고……. 굳건한 믿음을 보이셨죠.”
이후 레반스가 나라의 살림을 맡자 늘 가난에 허덕이던 백성의 삶이 풍족해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러니 백성들은 레반스를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성과에 전하께선 당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며 기뻐하셨어요. 그 이후 레반스를 더욱 신뢰하셨어요. 하지만… 그 믿음이 오히려 독이 됐죠. 폐하께서는 몰랐어요. 재능만큼이나 뛰어난 그의 탐욕을.”
레반스에게는 큰 목표와 야욕이 있었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전하보다 레반스를 더욱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죠. 왕궁의 관리, 귀족… 그리고 민심까지 그를 지지했죠.”
전혀 어린 나이답지 않은 정치 수완으로 천천히 왕국을 집어삼켜 가는 레반스.
이야기를 듣던 로이스가 물었다.
“그걸 그냥 지켜만 봤다고?”
“레반스, 그는 전하의 신뢰를 이용했죠. 아주 교묘하게… 자신이 벌이는 모든 게 나라를 살리는 일이라고 전하를 설득했죠. 그리고 전하는… 그 말씀을 믿었고요.”
신뢰는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치명적인 독이 되기도 한다.
신뢰라는 이름을 먹고 내부에서 서서히 퍼져 나가는 독.
나중에 독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게 늦어 버렸을 테니까.
로이스가 혀를 찼다.
“쯧, 멍청한 왕이었네.”
대놓고 자신의 아버지를 욕하는 로이스를 보면서도 페이지는 그냥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전하는… 멍청한 왕이었죠.”
국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재상은 나라의 경제, 법, 군사까지 빠르게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 갔다.
“고작 2년이었어요. 레반스가 프렌체 왕국을 온전히 손에 넣기까지 걸린 시간이.”
이후 레반스는 단숨에 친국왕파의 귀족들을 쳐 내고 자신을 등용한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전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깨달으셨지만… 이미 모든 끝나 버린 뒤였죠.”
비록 레반스의 직위는 재상이었지만, 그의 힘은 국왕을 넘어섰다.
그의 나이 스물둘.
일개 평민에서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프렌체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지만, 그런 그조차도 손에 넣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죠.”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로이스가 입을 열었다.
“정당성.”
“…맞아요.”
페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을 집어삼켰지만,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것.
그건 바로 정당성이었고, 이 세계에서 정당성이란 바로 혈통이었다.
평민 출신의 레반스가 국왕을 몰아내고 프렌체의 왕이 된다면 기존에 그에게 우호적이던 귀족들마저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평민 재상이 왕이 되었다는 선례를 바탕으로 자신들 역시 왕위를 노릴 수 있을 테니까.
“때문엔 그는 왕국을 온전히 집어삼켰으면서도 전하를… 허수아비 왕으로 내버려 두었어요.”
허수아비 왕은 재상에게는 다른 귀족들을 막을 방패였다.
“제가 19살이 되던 해. 레반스는 전하에게 저와의 혼인을 제안했어요.”
“뻔한 수작이네.”
“…그렇죠.”
페이지가 고소를 머금었다.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
그녀만 얻을 수 있다면 정당성은 확보된다.
그리고 이런 뻔한 수작을 국왕이 모를 리 없었다.
또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던 그가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전하는 멍청한 왕이었지만, 아버지로서는… 다정하신 분이셨거든요.”
자신의 실수로 인해 모든 걸 망쳤지만, 하나뿐인 딸아이마저 망가지는 걸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페이지를 왕궁에서 탈출시키기로 결심했다.
“당시 호위 무장이셨던, 그렉 단장님이 저를 데리고 왕궁을 빠져나오셨죠.”
무사히 왕궁을 빠져나온 그렉과 페이지는 여름 대륙을 벗어나 가을 대륙으로 향했다.
“이후 그렉 단장님은 용병 활동을 하며 군자금을 조달하셨고, 여름 대륙과 가을 대륙을 오가며 프렌체 왕국 내에서 재상에게 반발하는 이들을 규합해 레온 혁명군을 만드셨죠.”
로이스가 여전히 넋 나가 앉아 있는 그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할배가?’
하는 짓을 보면 영 아니올시다 싶지만, 그래도 레온 혁명군에서만큼은 그렉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
“레온 혁명군의 도움으로 전하는 20년을 버텨 오셨지만, 문제는 그사이… 재상이 다른 일을 계획했다는 거예요.”
“다른 일?”
“자신의 평민이란 신분이 왕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세상을 바꾸기로 한 거죠.”
“어떻게?”
“그는 공화정을 만들려고 해요.”
군주가 없이 시민의 의견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국가의 형태.
이를 들은 로이스가 의문을 품었다.
“그렇게 되면 재상에게 좋을 게 없잖아?”
피땀 흘려 가며 애써 쌓아 온 권력을 이제 와서 나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로이스의 말을 이해한 페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일반적인 공화정 체계는 아니에요. 그는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독재하는 공화정을 꿈꾸고 있죠. 이를 위해 지난 20년간 기틀을 다져 왔고 실제로 지금은… 그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어요.”
“만약 그렇게 되면 지금의 국왕은 어떻게… 설마?!”
그제야 로이스는 비공선에서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들은 프렌체 왕가의 무사들이에요!’
‘놈들이 노리는 게 바로 왕궁이라고요! 이대로 왕궁에 비공선을 떨어트릴 작정이라고요!’
새로운 체제를 설립하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과거의 체제였다.
그 구체제의 상징이 바로 국왕이었다.
그리고 국왕이 죽음으로써 가장 이득을 보는 존재.
“이번 비공선 습격… 재상이 꾸민 짓이구나.”
레온 혁명군을 가장한 자살 특공대를 이용해 국왕을 죽이면서, 모든 오명을 레온 혁명군이 가져가게 일을 꾸민 것이리라.
낯빛이 어두워진 페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니, 확실해요.”
페이지는 이번 비공선 습격이 재상의 짓이라 확신했다.
로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야, 재상이란 놈도 대단한 놈이네. 제 손으로 죽이려고 한 왕 앞에 그런 뻔뻔한 얼굴로 나타났다는 거잖아?’
한껏 국왕을 걱정하는 얼굴로 나타났던 재상.
그 모든 게 연기였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페이지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로이스는 어느 자신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 쌍둥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서 부탁이 뭔데? 뭐, 대충 무슨 부탁일지 짐작은 간다만…….”
“도와주세요.”
설마 했더니, 역시나네.
로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재상, 아니, 레반스 에인폴트로부터 이 나라를 되찾고 싶어요.”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가하지… 어라?”
페이지의 부탁을 거절하려던 로이스가 순간 멈칫했다.
그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예?”
“…레반스 놈의 성(姓)이 뭐라고?”
“에인폴트라고…….”
“……?!”
로이스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