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as a Terminally-ill Dragon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운명 (6)
드래곤의 성지 은화성.
반짝반짝 빛나는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은발의 사내가 있었다.
성난 듯 씩씩거리며 걸어간 그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제네로커!”
은발의 사내.
쌍둥이의 아버지인 카를로스의 등장에 서류에 집중하고 있던 제네로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도저히 못 참겠다. 당장 때려치우자!”
“…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그러냐?”
“아니, 그 영감탱이가 글쎄…….”
마치 속에 쌓인 것을 쏟아내듯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는 카를로스.
목소리는 어찌나 크고, 말은 또 얼마나 빠르던지 속사포가 다름없었다.
정신을 쏙 빼놓는 수다에도 제네로커는 서류를 처리하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를로스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원로 승계가 아닌 노예 승계라느니.
원로 님이 승계를 핑계로 착취를 일삼고 있다느니.
일 못한다고 구박을 받았다느니 등등.
지난 2년간 카를로스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부단히도 시달려 온 제네로커.
그는 이제 카를로스의 수다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제네로커의 앞에서 떠들어 대던 카를로스가 수다를 멈추고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제네로커.”
“응.”
“내 말 듣고 있냐?”
“응.”
물음에 꼬박꼬박 ‘응’이라고 답을 하면서도 결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제네로커였다.
이에 카를로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네로커.”
“응.”
“안 바쁘지?”
“응.”
“그럼 내 서류도 봐 줄래?”
“꺼져.”
“…이 자식이.”
은근슬쩍 자기 일을 떠넘기려다가 칼같이 거절당한 카를로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러다가 제네로커의 책상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말야… 그 책상에 있는 서류 전부 오늘 처리한 거야?”
“응.”
“진짜?”
“어.”
“…징그러운 놈.”
카를로스가 혀를 내둘렀다.
그와 중에도 제네로커는 높게 쌓인 서류의 탑에 종이 한 장을 더 추가했다.
이를 보며 카를로스가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뭔 승계 서류가 이렇게 많아?! 내가 평생 보아온 종이 보다 요 2년간 본 종이가 더 많은 거 알아? 이 미친 짓을 최소 몇 년을 더 해야 한다는 게 말이 돼?”
카를로스의 투덜거림에 그제야 제네로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불평불만 늘어놓을 바에 가서 한 장이라도 더 하지?”
“하면 뭐 하냐고, 하면! 내일 또 그만큼 생겨날 건데!”
“그래도 우리는 키우는 아이들이 있어서 처리해야 할 서류가 10년 치로 줄었다잖아?”
“승계 업무를 10년 치로 간소화했는데도 양이 그 정도면 원래는 얼마나 많았다는 건데?”
“그런 불평을 나한테 늘어놓아 봤자, 네가 할 일은 안 줄어든다.”
“젠장! 망할!”
씩씩거리던 카를로스가 돌연 불쌍한 눈으로 제네로커의 책상에 매달렸다.
“친구야…….”
“안돼.”
“…내가 뭘 말할지 알고?”
“보나 마나 내 거 다 끝나면 네 거 도와달라는 거겠지.”
“하여간 눈치는….”
“가라. 나 할 일도 많다. 이거 다 끝내고 내일 치도 마저 해 둬야 해.”
“정말 너도 너다.”
카를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같이 원로직 승계를 하면서 제네로커가 하루하루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카를로스였다.
그가 이토록 열정적인 데에는 한 가지 이유뿐이리라.
“그렇게 로이스가 보고 싶냐?”
“그럼! 당연한 것을!”
그간 시큰둥하게 답하던 제네로커의 목소리에 생기가 돋아났다.
제네로커의 시선이 책상에 놓인 영상구에 닿았다.
그 속에서 뾰로통하게 앉아 있는 어린 아들이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제네로커는 힘이 들 때마다 그렇게 아들의 모습을 보며 힘을 냈다.
‘우리 아들 너무 귀엽다!’
그때 제네로커의 유일한 활력 충전 시간을 방해하는 카를로스의 목소리.
“나 진짜 안 도와줄 거야?”
“어.”
“진짜 진짜?”
“좀 꺼지지?”
“일 중독자 새끼.”
“응.”
“아들 팔불출 새끼!”
“그건 욕이 아니라 칭찬인데?”
“아, 좀 도와달라고!”
“자기 일은 스스로 하자는 말도 모르냐?”
“모르겠는데? 힘든 일은 서로서로 돕고 살자는 말은 알아도.”
“그건 나도 처음 듣는 말이군.”
“…나쁜 놈.”
어떻게 해도 제네로커가 안 도와줄 듯싶자 카를로스의 불만이 다시 폭주하기 시작했다.
“정말 이러다가 종이에 파묻혀 죽을 거 같다고!”
“안 죽어.”
“초고도 성법의 집결체라는 은화성에서, 그것도 성법의 종주라는 드래곤들이 원로직 승계 작업을 서류로 한다니!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냐고!”
“…….”
“이게 다 그 늙은 영감탱이들 때문이야! 자기들 때에 그런 식으로 원로직을 승계했다고 아직까지 이런 구닥다리 방식으로 원로직을 승계하는 게 말이 돼? 이건 분명 신입 원로를 길들이려는 망할 영감탱이들의 수작이 분명해! 이런 악습은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망할 영감탱이들!”
“…….”
“아무튼, 역사상 처음으로 서류 더미에 깔려 죽은 드래곤이 있다면 그게 나인 줄 알아.”
“그런 일은 없을걸?”
“아니, 분명 난 서류에 깔려 죽을 거야.”
“그럴 리 없어. 그전에 죽을 테니까.”
“…뭔 소리냐?”
카를로스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등 뒤에 그늘이 졌다.
동시에 카를로스의 귀를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카를로스!”
카를로스의 귀를 잡아챈 이는 장대한 기골을 지닌 노인이었다.
귀를 잡힌 카를로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 으악! 워, 원로님!”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놀고 있었더냐? 그리고 뭐… 망할 영감탱이들?”
“그, 그게 아니고요.”
“따라와라!”
“끄악! 아, 아니 일단 귀부터 놓고……. 제, 제네로커 살려 줘!”
“살펴 가십쇼, 원로님.”
“오냐, 고생해라.”
“제, 제네로커 네가 배신을…. 끄아아악! 원로님, 저 귀 떨어져요!”
귀가 잡혀 질질 끌려가는 카를로스의 비명이 복도에 길게 메아리쳤다.
카를로스가 사라지고 겨우 찾은 평화.
제네로커는 책상의 영상구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토라져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아들의 귀여운 모습.
이를 보며 제네로커는 다짐했다.
“아들… 아빠가 곧 갈게. 조금만 기다려!”
하루에 며칠 치 일을 해내며 시간을 단축하는 제네로커.
그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힘을 얻어 다시금 서류 작업에 몰두했다.
* * *
페이지와 파브로 덕분에 대륙 간 공간 이동 법진의 존재를 알게 된 로이스는 매일같이 지하 동굴을 들락거렸다.
그는 매일매일 드래곤 하트가 힘들다고 비명을 지를 정도로 공간 속성력을 짜내 법진에 채워 넣었다.
그리고 공간 속성을 익히고 있다는 이유로 로이스에게 끌려간 핀도 녹초가 될 때까지 속성력을 짜내야 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응하지 않던 공간 이동 법진은 3일째가 되어서야 반응을 보였다.
공간 속성 1티어급 로이스와 3티어급 핀.
둘이 그렇게 들이부었는데도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 로이스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래도 공간 이동 법진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품은 로이스는 더욱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좋아 좋아, 이다음에는….’
공간 이동 법진을 활성화시키는 일과 함께 로이스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다름 아닌 좌표 값 수정이었다.
로이스는 공간 이동 법진의 성능을 깊게 파고들었다.
자신의 경지를 넘어선 이가 만든 공간 이동 법진이었기에 로이스에게는 생각보다 좋은 공부 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공간 이동 법진에 매달린 끝에, 로이스는 원하는 성과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이동 거리를 좀 더 늘리고 싶지만… 내 능력으로는 이게 한계네. 법진의 한계도 이 정도가 끝인 듯싶고.’
로이스는 법진의 성능을 최대 한계치까지 개조했다.
그는 자신이 한 과정을 ‘오버 클럭’이라 불렀다.
원래 ‘오버 클럭’은 컴퓨터 하드웨어의 성능을 설계된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이르는 말.
로이스가 법진을 개조한 것도 바로 그런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경지가 낮아 공간 이동 법진이 어떻게 제조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몇몇 요소를 건드려 제조된 성능 이상으로 발현되게 만들었다.
‘개조 된 법진의 최대 이동 거리면… 아슬아슬하게 봄 대륙에 닿겠네.’
로이스는 단번에 집에 도착하는 것을 꿈꿨으나 법진의 이동 거리는 아슬하게 봄 대륙 근처에 닿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여름 대륙의 동쪽에 자리한 프렌체 왕국에서 봄 대륙에 닿는다는 것은 여름 대륙을 관통한 다음 바다까지 건넌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 거리를 단축할 수만 있다고 해도 거의 1년이 넘는 시간은 아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버 클럭’ 작업과 속성력 충전이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고.
처음 이동 법진의 존재를 안 이후로 열흘이 흘렀을 무렵.
츠츠츠-.
찬란하게 빛을 뿌리는 법진을 보며 로이스가 활짝 웃었다.
“…끝났다.”
벌써 봄 내음이 코를 간질이는 듯싶었다.
* * *
다음 날 오전.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공간 이동 법진 앞에 모인 몇몇 사람들.
파브로와 페이지.
국왕과 그렉.
이른 아침부터 모인 그들은 로이스와 쌍둥이를 보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특히 파브로와 페이지가 가장 아쉬워했다.
“벌써 가시는 건가요?”
“저희 결혼식이라도 보고 가시지…….”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왕국이 안정된 다음에 결혼식 할 건데… 나보고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그래도…….”
“됐어. 어차피 떠날 건데, 빨리 가는 게 나아.”
로이스의 단호함에 파브로가 섭섭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지난 2년간 로이스의 밑에서 참으로 많이도 굴렀더랬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이었다.
입으로는 쌀쌀맞고 못되게 구는 거 같아 보였어도 늘 자신을 챙겨주던 로이스.
그랬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파브로가 섭섭함을 드러내자 쌍둥이가 울먹이며 다가왔다.
“큰 난쟁이… 잘 살아야 해.”
“우리 잊으면 안 돼….”
정든 이와의 이별에 쌍둥이가 칭얼거렸다.
핀도 로이스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작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파브로가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흑…….”
“웅…….”
쌍둥이도 눈물을 쏟아 낼 듯싶자, 로이스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눈물 어린 이별은 그만.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언제 볼 수 있는 겁니까?”
파브로의 물음에 로이스는 살짝 움찔거렸다.
“글쎄…….”
로이스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렸다.
솔직히 그도 파브로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기약하지 못했다.
이대로 집으로 가면 2차 수면기를 마치기 전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그게 파브로든… 아니면 파브로의 후손이든.’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은 로이스가 파브로를 보며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언젠가는 보겠지. 너 나중에 가서 우리 보고도 모른 척하면 죽는다?”
“아무럼요!”
파브로가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자신의 또 다른 족쇄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말이다.
파브로의 답변에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로이스가 시선을 돌렸다.
“국왕 할배.”
“왜 그러느냐.”
“이번에는 열심히 해 봐요. 또 나라 말아먹지 말고. 나중에 와서 나라 꼴 개판이면 제가 다 뒤집어엎을 겁니다.”
“허허, 알겠다.”
“약골 할배.”
“약골 아니래도!”
“약골 소리 듣기 싫으면 수련 열심히 하시라고.”
“킁!”
못마땅하다는 듯 콧방귀를 뀐 그렉.
그렇게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로이스가 쌍둥이의 손을 잡고 법진 위로 올라섰다.
그가 파브로와 페이지를 향해 마지막 말을 남겼다.
“간다, 잘 살아.”
짧은 인사 뒤, 법진이 찬란한 빛을 뿌렸다.
지하 동굴을 환하게 채울 정도로 엄청난 광량이었다.
빛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로이스가 미소 지었다.
‘드디어… 봄 대륙이다.’
겨울, 가을, 여름.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이 머릿속에 스치며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 공간 이동만 끝나면 말이다.
그렇게 찬란한 빛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우르릉-.
난데없이 지하 공동이 갑작스럽게 흔들렸다.
“어, 뭐, 뭐야?”
“지, 지진이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놀란 이들이 허둥거렸다.
놀라기는 로이스도 마찬가지.
그러다가 별 이상이 없이 여전히 빛을 발하는 법진을 보며 안도했다.
‘괜찮아. 이 정도로 법진에 이상이 발생하지는 않아.’
법진을 개조한 게 그였기에, 내구성 역시 뛰어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순하게 지면이 흔들리는 정도로 이미 가동된 법진에 큰 영향이 미치지는 않으리라.
물론 그것만 그랬다면 말이다.
찍-.
“응?”
갑작스러운 진동에 정신이 팔려 있던 로이스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잡혀 들었다.
찍찍-.
동굴이 흔들리는 틈을 타, 어느새 법진 근처에 다가온 검은 쥐 한 마리.
“어?”
이를 본 로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쥐가 나타난 것도 놀라웠지만, 쥐의 생김새도 특이했다.
마치 둥근 구슬에 귀만 붙여 넣은 듯한 생김새.
거기에 빠르게 점화되어 사라져 가는 꼬리.
그것을 보고 로이스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폭… 탄?’
쥐 모양을 한 폭탄이라니.
심지어 팔다리도 없어 데구루루 굴러온 폭탄 쥐가 법진 한쪽에 정확히 멈춰 섰다.
낯선 생김새를 본 로이스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찍찍-.
“웃었어……?”
쥐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간 것이다.
‘쥐가 웃는다고?’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로이스가 다급히 조처하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펑-.
기묘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간 폭탄 쥐.
그와 함께 허공에 검은 선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그러다가 이내 법진으로 스며든 검은 선.
이에 로이스는 경악했다.
‘…미친?!’
검은 선이 닿으며 법진의 일부가 변했다.
“너 이 쥐새끼……!”
놀라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빛은 절정에 달해 로이스 일행을 완전히 집어삼킨 뒤였다.
드드드-.
동굴을 뒤흔든 진동이 완전히 사그라들고.
즈즈즈- 푸쉬쉬.
동시에 법진이 내뿜는 빛도 완전히 사라지며 그 위에 있던 로이스와 쌍둥이의 모습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진에 놀랐던 파브로는 그제야 평온을 찾고 텅 빈 법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잘… 가셨겠죠?”
“…그렇겠죠?”
무언가 찝찝함이 남은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