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as a Terminally-ill Dragon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조상 덕 (4)
근 1년에 가까운 시간은 무언가에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특히나 남다른 친화력을 지닌 라비나에게 그 정도 시간이 주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전쟁 중 적진에 떨어뜨려 놓아도 적군과 어깨동무를 하며 술을 대작하고 있었으리라.
그런 라비나가 교단에서 11개월을 보냈으니, 교단 내 그녀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은 당연했다.
라비나의 인기는 가벼운 산책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어이 라비나, 내가 이번에 좋은 술 구해 왔는데 같이 한잔하자고! 우리 마누라도 너 언제 오냐고 기다리고 있더라!”
“좋죠, 언제든지 불러만 주세요!”
전사의 마을에서 유일한 푸줏간을 운영하는 털북숭이 댄.
“라비나! 내일 같이 사냥하러 가지 않을래? 얼마 전에 꽤 큼직한 쌍봉 멧돼지를 봤거든!”
“오? 그래? 조만간에 같이 가자!”
마을에서 가장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사냥꾼 자룬.
“라비나! 라비나다!”
“라비나 언니! 우리 같이 놀자!”
“안 돼! 라비나 누나는 오늘 우리랑 같이 놀기로 했다고!”
마을에서 사고뭉치로 통하는 꼬마 아이들까지.
라비나가 가는 걸음걸음마다 그녀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모인 이들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라비나를 좋아하는 것이 엿보였다.
그에 화답하듯 라비나도 늘 웃는 얼굴로 그들을 대했다.
“미안, 오늘은 나도 좀 할 일이 있어서!”
인기인답게 상당한 시간을 주민들에게 붙잡혀 있던 라비나는 겨우겨우 핑계를 대고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에효… 이놈의 인기란…….”
살짝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라비나의 얼굴에 진한 뿌듯함이 깃들었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라비나가 산책을 이어 나갔다.
발길을 돌린 그녀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한참을 밖에서 맴돌던 라비나가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최근에 만들어진 신축 건물.
그 최상층에 자리한 것이 바로 파브로의 집무실이었다.
달칵-.
노크도 없이 문을 살짝 연 라비나가 빼꼼히 안을 살폈다.
“뭐 하세요. 아저씨?”
라비나의 물음에 높은 서류 더미에 묻혀 있던 파브로가 고개를 들었다.
“보면 모르냐? 일한다, 일!”
괜스레 역정을 낸 파브로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언젠가부터 파브로는 늘 저랬다.
외부 활동보다는 실내에서 서류 더미에 묻혀 지내는 날들.
매번 ‘저주할 겁니다……’라고 중얼거리면서 두 눈이 시뻘게지도록 서류만 처리했다.
“바쁘신가 보네요…….”
“바쁘다.”
“네…….”
파브로가 말 걸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젓자 라비나는 살포시 문을 닫았다.
‘음… 이제 어디 가지?’
잠시 고민한 그녀는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산책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기에 그녀는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이었다.
높은 곳에서 마을을 본 라비나의 눈에 감탄이 서렸다.
“와… 진짜 많이 커졌네.”
처음 교단에 왔을 때만 해도 규모가 이 정도로 크지는 않았었다.
물론 예전에도 단일 종교 집단의 구성원들로 이뤄진 마을치고는 제법 크다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도 결국 ‘마을’ 단위의 규모였다.
하지만 11개월이 흐른 현재, 전신의 마을은 이제 더는 마을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규모를 갖췄다.
‘상시 거주자가 2만 명이라지?’
거기에 외부로 돌고 있는 교단의 전사들까지 합치면 거의 3만에 육박한다.
그러한 극적인 변화가 불과 11개월 만에 일어난 것.
지난 11개월간의 변화를 생생하게 관찰한 라비나로서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이 마을이 앞으로 계속 발전할 점이란 거다.
덕분에 누군가의 책상에 쌓일 서류가 더 늘어나겠지만…….
‘갈려 나갈 파브로 아저씨의 명복을 빕니다.’
파브로의 집무실 방향으로 짧게 묵념한 라비나.
고개를 든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피식거리고 말았다.
‘원래는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처음에는 나비만 회유한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리 질문을 던졌지만, 라비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이를 증명해 주었다.
‘재밌어.’
라비나가 나비와 같이 가문을 빠져나온 것은 엄청난 사룟값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따분한 가문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온갖 영수들이 즐비하고, 남들이 보기에는 신기한 트루건 가문이지만, 그곳에서 23년을 보내 온 라비나에게 있어서 가문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때문에 나비와 세상을 돌며 돈도 벌고 나름 모험도 할 생각으로…….
‘…가출했지.’
집에는 달랑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말이다.
하지만.
‘그 괴물 때문에 모든 게 틀어졌어.’
난데없이 나타난 나비의 진짜 주인.
일격에 탑티어의 스노우 킹과 수만의 몬스터를 도륙 낸 진짜배기 괴물.
처음에는 그가 무서워 떠날까도 생각했으나 모순되게도 라비나가 교단에 오랫동안 남게 된 것도 로이스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로이스가 벌이는 모든 일이 미치도록 흥미로웠다.
‘그 스노우 킹을 제국에 풀어 놓은 것도 그 사람이라지?’
물론 그 사실을 로이스가 알려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라비나가 누구던가.
친화력의 여왕이다.
지난 몇 달간 쌍둥이, 불꽃 남매, 파브로와 핀의 곁을 맴돌면서 그녀가 주워 들은 게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그러다가 이번 제국의 사태를 주도한 게 로이스라는 것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때는 진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었다.
이후 로이스가 벌이는 일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그녀는 또 한 번 심장의 떨림을 느꼈다.
그것은 놀람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떨림이었다.
바로 설렘 말이다.
‘왠지… 그 사람 곁에 있으면 흥미로운 일이 계속해서 벌어질 거 같단 말이지.’
어차피 가출한 이상, 이제 와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건 절대 혼나는 게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게 아니야! 내 견문을 넓히기 위해 안 돌아가는 거뿐! 암, 그렇고말고!’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라비나가 다시 몸을 틀었다.
즈걱- 즈걱-.
흰 눈이 밟히는 소리를 음악 삼아 라비나가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한참을 다시 걸어간 라비나의 발걸음이 닿은 곳.
“핫!”
“흐핫!”
쾅!
그곳은 매일같이 거친 기합과 괴성이 난무하는 어느 수련장이었다.
교단의 상위 전사급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수련장.
그 안에 20명의 교단 전사들과 대련을 벌이고 있는 붉은 머리 거한이 있었다.
합!
훙-.
거칠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켄드릭을 보며 라비나가 혀를 내둘렀다.
“저 미친놈… 오늘은 20대 1이냐.”
일반적인 무사도 아니고 실전에 특화된 교단의 상위 전사를 20명이나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켄드릭.
한데, 문제는 오히려 그가 20명의 상위 전사를 몰아붙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같은 사실에 라비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재수 없는 놈,’
아직도 켄드릭과는 티격태격하는 사이지만, 그의 재능만큼은 라비나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저 나이에 2티어 최상급이라니…….”
듣기로는 켄드릭의 나이는 자신과 동갑.
그런 켄드릭이 지난달 한 단계 벽을 넘어 2티어 최상급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또 하나의 벽만 넘으면 1티어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1티어의 벽이 절대 낮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라비나가 보아 온 켄드릭의 재능이라면 어렵지 않게 그 벽을 넘을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렇게 된다면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1티어에 도달한 작은 괴물이 탄생하는 셈이었다.
‘뭐, 그 백발 괴물의 제자니까…….’
라비나가 그렇게 수긍할 때.
“오빠 교대!”
켄드릭이 빠지고 그 자리로 타니아가 들어갔다.
손을 꺾으며 걸어오는 타니아를 보며 교단의 전사들은 긴장된 눈빛을 했다.
그들은 지난 수개월 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상대하던 청년보다 저 호리호리한 아가씨가 더 무서운 존재임을.
켄드릭이란 이도 엄청난 천재였지만, 그 여동생은 그보다 더한 천재란 것을 말이다.
곧 1대 20의 대련이 시작됐고.
콰즉- 쾅-.
주먹과 무기가 부딪치며 낸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굉음이 들려왔다.
라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우… 아저씨들 오늘 아주 죽어 나겠구나.”
한동안 교단 전사들의 명복을 빌어 주던 라비나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살벌한 수련장의 상황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평화로운 공간.
그곳에 자리한 은발 쌍둥이가 어디서 가져온 주전부리를 씹고 있었다.
거기에 카니의 무릎에 웅크리고 잠이 든 나비까지.
그들을 발견하고 눈을 빛낸 라비나가 쪼르르 달려갔다.
그대로 카니의 옆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은 라비나가 헤픈 웃음을 흘렸다.
카니와 팔짱을 끼고 볼을 비비는 것은 덤이었다.
“여기 계셨어요, 언니? 헤헤.”
“라비나 왔니?”
“라비나 안녕!”
“안녕하세요, 칸 오빠!”
라비나는 쌍둥이에게 간이며 쓸개며 다 빼 줄 것처럼 헤프게 행동했다.
처음 교단에 왔을 때보다 더욱더 필사적으로 애교를 부리는 라비나.
그녀가 그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일전에 불꽃 남매와 쌍둥이들이 대련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날 라비나는 깨달았다.
어째서 쌍둥이가 로이스 다음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지 말이다.
물론 로이스의 소꿉친구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것을 떠나 저들이 작은 괴물들이라 칭해지는 불꽃 남매를 가지고 놀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때 라비나는 다짐했다.
‘백발 괴물을 공략할 수 없다면 2인자에게 붙겠어!’
저들이라면 혹시 모를 사태에서 자신을 위한 방패가 되어 줄 것이라고.
그러니 지극정성으로 쌍둥이를 모셔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쌍둥이에게 아양을 떨던 라비나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그분은 어디 가셨어요?”
“그분?”
그리 되묻던 카니가 배시시 웃었다.
이 천방지축 아가씨가 이토록 예의를 차리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라비나가 너무너무 무서워하는 자신들의 절친.
칸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아, 로이스? 걔 아까 어디 간다고 하던데.”
“어디요?”
“나도 잘 몰라, 무슨 각서 받으러 간다고 했어.”
“각서?”
난데없는 소리에 라비나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 * *
황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찌… 어쩌다…….’
길고 길었던 내전.
피비린내 나는 집안싸움은 반역의 수장인 바르콘 후작의 목이 잘리며 끝을 고했다.
그게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예상보다 몇 배나 길어진 내전으로 인해 제국은 여러모로 많은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문제보다 심각한 일은 내전이 끝나기 무섭게 터졌다.
“삼억 천오십팔만 사천팔백.”
숫자를 읊는 한마디 한마디에 황제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이는 황제뿐 아니라 숫자를 듣고 있는 귀족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로이스의 눈빛은 싸늘했다.
“이게 당장 갚으셔야 할 원금이란 거는 아시죠?”
“아, 알고 있네.”
“다음 달 이자만 해도 대충 삼천 백오십만 골드.”
처음 1,200만 골드였던 이자가 어느새 기존 원금의 3분의 1로 변해있었다.
“그래서 제 돈 언제 갚으실 겁니까?”
“…….”
빚을 독촉하는 로이스의 이야기에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일반적인 존재가 이 말도 안 되는 고리대금을 갚으라고 한다면 무시하면 그만이다.
아니, 오히려 제국을 상대로 농간을 부렸다고 죄를 물어 목을 날리면 깔끔하게 해결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갑자기 벙어리가 되셨나? 제 골드 언제 주실 거냐고요.”
빚을 갚으라고 종용하는 저자가 문제였다.
만약 돈을 안 갚겠다고 했을 시, 저 괴물이 미쳐 날뛴다면… 찬란했던 제국의 영광도 그날로 끝이리라.
그렇다고 빚을 상환할 수도 없었다.
길고 길었던 내전으로 인해 제국의 여유 자금도 이제 바닥을 드러냈다.
여기서 남은 돈을 탈탈 털어 로이스에게 넘겨주었다가는 제국을 운영할 예산마저 편성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현재 상황에서 황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였다.
“그… 서, 선처를 좀… 해 주길 바라오… 교주.”
바로 채권자의 자비를 바라는 것뿐.
하지만 이 채권자가 어디 그냥 채권자겠는가.
로이스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자신을 향한 황제의 애처로운 눈빛에 로이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선처라…….”
그리 중얼거린 로이스가 주변을 훑었다.
화려한 장식이 즐비한 대전.
그것이 로이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고울 리가 있겠는가.
“선처를 바라시기에는 지금 생활이 무척이나 풍요로워 보이십니다?”
“그게 무슨……?”
“제 돈을 갚을 생각은 없으시면서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에서 살 생각은 있으셨습니까?”
“…….”
“선처란 것은 최소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바라셔야죠.”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며칠 말미를 드리죠. 황궁에 있는 귀중품 싹 다 처리해서 현금으로 만들어 오세요.”
“하, 하나… 황가에는 품위란 것이!”
“품위? 지금 빚도 안 갚으면서 제 돈으로 향락을 누리시겠다? 제가 그 꼴을 지켜볼 거 같습니까?”
“…….”
“보름 드립니다. 이 황궁에서마저 쫓겨나고 싶지 않으시거든… 사치품 싹 다 정리하세요.”
“…알겠소.”
“아, 그리고…….”
로이스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주섬주섬 꺼내 황제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 찍으세요.”
“이게 뭐요?”
로이스가 내민 종이를 본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