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as a Terminally-ill Dragon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실전 평가 (1)
초월학관 기체(機體) 보관소 인근 대형 연무장.
이번 합동 기체 평가의 첫 번째 시험인 기동 시험 결승 지점.
그곳에 하급 기술반 학생들이 긴장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평야와 맞닿은 지평선에서 그들이 기다리던 형체가 나타났다.
“와, 왔다!”
“누구야? 누가 1등이야?”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멀리서 오고 있던 초월기들이 시야에 잡혀 들었다.
그곳에는 2대의 초월기가 엎치락뒤치락하며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를 다른 2대의 초월기가 바짝 따라붙은 상태였다.
쿵- 쿵-.
무서운 기세로 달려온 초월기의 선두 2대.
그중 먼저 결승점을 통과한 기체에는 30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간발의 차로 2등을 차지한 기체는 63번.
이후 56번과 89번이 몇 초 차이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들의 기록을 성적표에 적어 내는 조교들이 혀를 내둘렀다.
“…신기록이네.”
“기록을 15분이나 단축하다니…….”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4명이나 말이다.
그렇게 조교들이 혀를 내두를 때.
30번기의 후면 탑승구가 열리며 긴 은발을 지닌 여인이 튀어나왔다.
수 미터의 탑승구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카니가 양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1등이다!”
동시에 63번기에서 내린 칸이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쳇!”
“넌 나한테 안 돼. 앞으로 10년간 누나라고 불러라!”
“0.1초 차이였거든!”
“0.1초든 0.01초든! 진 건 진 거잖아?”
“큭!”
이번 평가로 오빠, 누나의 자리를 놓고 자기들끼리 내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투덕거리는 사이 3등으로 들어온 56번기에서 타니아가, 4등으로 들어온 89번기에서 켄드릭이 내려섰다.
주변의 기술반 학생들은 그 4인방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듣기는 했는데… 진짜 엄청나네.’
은발 쌍둥이와 붉은 머리 남매에 관해서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초월학관 역사상 최강의 신입생.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넷.
‘저런 놈들을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초월 학관의 기체는 모두 동일한 제원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조율했느냐, 얼마나 정비를 잘했느냐에 따라서 기체의 성능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때문에 기체 평가의 순위는 초월기를 다루는 조종반 학생들의 역량에 따라서 크게 뒤집히고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쌍둥이와 불꽃 남매의 역량을 뛰어넘을 조종반 학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저들 넷과 같은 조원이라면 높은 평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넷과 같은 조원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 1등을 한 카니의 조원인 뷘의 얼굴은 너무 환해 빛이 날 지경이었다.
“카, 카니!”
뷘이 수통과 수건을 들고 카니에게 부리나케 달려갔다.
“고, 고생했어. 카니, 1등이라니! 역시 대단해!”
로이스를 대할 때 보였던 쌀쌀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카니를 향한 뷘의 눈빛에는 오로지 수줍음만이 가득했다.
“어.”
카니가 시큰둥하게 수통과 수건을 받아 들었음에도 뷘은 감격한 눈빛을 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디론가 쪼르르 달려가는 카니.
그녀가 향하는 곳에 누가 있는지를 본 뷘의 인상이 무섭게 굳어졌다.
“로이, 로이! 나 1등 했어!”
어서 칭찬해 달라는 듯한 눈빛.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다른 남학생의 심장이 철렁일 정도의 눈빛 공격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로이스는 시큰둥하게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어.”
그런 무신경한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카니가 로이스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그 손을 제 머리에 얹고 고개를 앞뒤로 왔다 갔다거렸다.
카니의 엉뚱한 행동에 로이스가 뚱하게 물었다.
“…너, 뭐 하냐?”
“내 쓰담쓰담은 내가 알아서 챙길게!”
로이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 쪼르르 달려온 타니아가 로이스의 반대 손을 낚아채 자신의 머리에 얹고 카니가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 했다.
“제 쓰담쓰담도 제가 알아서 챙길게요!”
졸지에 양손을 빼앗긴 로이스에게 질투 가득한 시선 수십 쌍이 꽂혔다.
‘하…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로이스가 해탈한 표정으로 제 손을 내어주고 얼마 후.
쿵- 쿵-.
결승점을 통과한 또 다른 초월기.
33번 초월기를 본 순간 로이스가 중얼거렸다.
“우리 삼땡이도 왔네.”
1등인 카니가 들어오고 나서 10분.
그것도 과거의 최고 기록을 5분이나 단축한 놀라운 기록이었지만, 앞선 넷의 기록이 너무 엄청나 빛이 바랬다.
쿵- 쿵- 쿠웅-.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간이 사다리 옆에 선 33호기.
푸쉬쉭-.
후면 탑승구가 연기를 뿜으며 개방되고 한참이 흘러 시에라가 비척비척 계단을 내려왔다.
땀 때문에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
후들거리는 다리와 팔.
툭 치면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상태를 예상이라도 했는지 조교가 한쪽을 가리켰다.
“토할 거면 저쪽으로 가서 토해라.”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에라가 입을 틀어막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를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시에라의 반응이 정상적이었다.
비정상적인 것은 앞서 들어온 네 명이었다.
시에라의 기록을 적은 조교는 로이스의 주변에 모여 있는 넷을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놈들이냐.’
초월기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 장치가 따로 있지만, 이를 제어하는 것은 조종자의 속성력이었다.
때문에 조종자의 속성력에 따라 초월기의 출력값이 크게 좌지우지됐다.
또한, 초월기의 동작이 격하면 격할수록 조종사의 속성력 소비 또한 커지는 법.
이제 고작 하급반이 된 조종사들이 1시간 동안 달리고, 산을 타는 등의 격한 동작을 했다면 조금 전 시에라와 같은 반응을 보여야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시에라도 양호한 편이었다.
심하면 초월기 안에서 점심으로 먹은 것을 게워 내거나 탈진으로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 네 명은 달랐다.
전무후무한 엄청난 신기록을 달성했으면서도 힘든 기색은 물론 땀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마이스터 아구스께서 자신의 뒤를 이를 인재들이라고 극찬을 하시더니만…….’
그의 안목이 틀린 게 아니었다.
그렇게 조교가 쌍둥이와 불꽃 남매를 바라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이것 좀 줘 봐.”
로이스가 카니에게서 수통과 수건을 뺏어 들고 걸어갔다.
그가 가는 방향에는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는 시에라가 있었다.
“받아.”
자신의 앞으로 수통과 수건을 본 시에라.
평소였다면 거절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고… 맙다.”
수건으로 땀을 닦고 텁텁한 입을 헹군 그녀.
그 뒤로 몇 모금을 더 마신 뒤에야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살아났다.
시에라가 수통과 수건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이건… 내가 나중에 돌려주지.”
“괜찮아. 내 거 아니니까.”
“……?”
“쟤 거거든.”
그녀의 되물음에 로이스가 피식하며 한쪽을 턱짓했다.
그곳에는 살벌한 눈을 한 뷘이 있었다.
이에 시에라가 피식거렸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
처음 로이스와 짝이 된 이후로 4개월.
아직 그와 큰 친분이 있는 거는 아니었지만, 그의 주변 인간관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 뷘에게 수건과 수통을 돌려주고 온 시에라.
다시 로이스 앞에 선 그녀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기체 상태는 최상이었다.”
대체 로이스가 언제 작업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합동 수업이 있는 날마다 기체 상태는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 능력이 부족했다.”
이를 악물고 앞서 달려가는 4대의 초월기를 쫓았다.
중반까지는 엇비슷하게 달릴 수 있었지만, 어느새 차이는 점차 벌어졌다.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 거머쥔 5등이란 성적.
시에라는 그게 분하고, 같은 조원인 로이스에게 미안했다.
그녀의 사과에 로이스는 피식거렸다.
‘확실히 나쁜 애는 아니란 말이지.’
지난 4개월.
최악이라 할 수 있었던 첫 만남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조금은 그녀와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친해졌다는 건 아니지만, 최소 그녀의 됨됨이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로이스도 마냥 시에라를 차갑게 대하지는 않았다.
이후 둘은 큰 불협화음 없이 잘 지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로이스는 시에라에 대해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꼭 뭔가에 쫓기는 거 같단 말이지.’
로이스가 파악한 그녀에게 여유가 없었다.
평상시 시에라의 말투에 어렴풋이 조급함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니까.’
어차피 자신이야 이곳에 오래 머물 것이 아니기에 시에라의 인생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 생각한 로이스는 시에라를 딱히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흘러.
“낙오된 기체를 제외하고는 전부 복귀 완료했습니다.”
“학생들도 집합 완료했습니다.”
조교의 보고에 아구스를 대신해 감독하고 있던 1급 도제가 강단 위로 올라갔다.
그는 정렬한 학생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 1차 평가를 치르느라 고생 많았다.”
마나를 담은 1급 도제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하지만 진짜 평가는 내일부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그 이야기에 기동 평가 상위 32개조에 속한 이들이 눈을 빛냈다.
내일 있을 실전 평가.
일명 전투 토너먼트를 통해 32개 조 중 다음 학기 1반이 될 25명이 결정된다.
거기에 토너먼트 장학금이라 불리는 성적 장학금과 상위 다섯 개 조만 누릴 수 있는 염원의 탑 견학까지.
32위권에 들어온 이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학관을 졸업하면 너희가 나아가야 할 곳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쟁의 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위 32위 안에 들어오지 못한 놈들은 낙오자나 다름없지. 지금이야 그저 단순히 성적이 매겨질 뿐이지만 사회에 나가서도 지금처럼 낙오한다면… 너희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도제의 말에 32위 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반면 32위 안에 들어선 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이를 본 1급 도제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왜, 너희는 아닐 거 같나? 고작 남들보다 조금 우위에 섰다고 그 밑에 놈들이 우습나? 7조!”
“네!”
“예!”
“고작 32위인 네놈들이 33위를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조금만 늦었어도 너희 역시 낙오자가 됐을 거다.”
“…….”
“고작 남들보다 조금 성적이 좋다고 자만하지 마라. 지금은 네 밑에 있는 놈들이 언젠가는 너의 자리를… 너의 목을 노리는 이들이 될 테니까.”
도제의 신랄한 비판에 조금 전까지 웃던 32위 내 조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상, 해산!”
짧은 명령을 끝으로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조종반 학생들은 그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흩어졌다.
하지만 기술반 학생들은 달랐다.
당장 오늘의 기동 평가를 거친 기체를 손봐야 했다.
특히나 상위 32위에 속한 기술반 학생은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기체를 정비해야 한다.
그래야지 당장 내일 있은 실전 토너먼트를 치를 수 있으니 말이다.
“빨리빨리!”
“그거 이쪽으로 옮겨!”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술반 학생들.
로이스는 가지 않고 자신의 곁에 남은 시에라를 보며 말했다.
“안 가냐?”
“…내가 도와줄 건 없나?”
“그 말 하기 전에 가서 거울이나 좀 보고 와.”
“거… 울?”
“너, 지금 딱 뒈지기 일보 직전인 얼굴이야.”
“…….”
“그 꼴로 도와준다고 나섰다가는 내일 실전 평가 치르기도 전에 쓰러질 걸? 그냥 가서 쉬는 게 도와주는 거다.”
“…알겠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시에라가 몸을 돌렸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그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이스.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려 기지개를 쭉 켰다.
“나도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어차피 그에게 이번 일은 소꿉장난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렁설렁할 생각은 없었다.
‘염원의 탑 견학이라…….’
다음 학기 반 배치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지만, 장학금과 염원의 탑 견학은 로이스로서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보상이었다.
‘한 번쯤, 보고 싶긴 한데.’
지난번처럼 뒷길을 이용해 숨어드는 게 아니라.
정식 절차를 밟아 염원의 탑에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로이스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뒤로 접근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익숙한 기운에 로이스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뭐냐?”
로이스의 뒤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뷘이었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에 실전 평가의 우승은 나와 카니가 차지할 거다. 넌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
“우리가 우승하게 되면… 난 카니한테 고백할 거다. 그렇게 알아 둬라.”
그 말을 끝으로 뷘은 휙 고개를 돌려 성큼성큼 로이스에게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이스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친놈인가? …지랄 염병하고 자빠졌네.”
***
실전 토너먼트가 열리는 날 새벽.
욱씬-.
시에라는 아릿한 가슴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힘겹게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그녀.
건너편 침대에 룸메이트가 아직 곤히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씻어야겠네.’
아직 시간이 이르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려면 일찌감치 준비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렇게 침대를 벗어나려던 그녀는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휘청거렸다.
“윽!”
가까스로 몸을 틀어 바닥이 아닌 침대에 쓰러진 시에라.
일순간 몰아친 현기증에 천장이 빙빙 돌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제… 무리했구나.’
앞서가는 4대의 초월기를 따라잡고자 무리를 한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다시금 겨우 상체를 일으킨 시에라가 침대에 걸터 앉아 현기증을 가라앉혔다.
‘…이길 수 있을까?’
통칭 조종반 신입생 괴물 4인방이라 칭해지는 이들.
자신의 목표인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소 그들 중 한 명 이상은 꺾어야 했다.
시에라는 자신과 그들의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실력으로는 절대 그들을 꺾을 수 없다는 것도.
절망감이 언급한 순간, 눈앞에 아른거리는 누군가의 얼굴.
이에 시에라가 이를 악물었다.
“…해내야 해.”
반드시 우승을 차지해야 했다.
그게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그물을 끊어 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니까.
그렇게 투지를 일깨운 그녀가 다시금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
방과 후 보고를 위해 해럴드의 연구실을 찾은 톰.
그는 연구실 내부의 풍경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전날 아침, 시험지를 해럴드에게 전달하러 왔을 때와 방 안의 풍경이 너무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방팔방 난잡하게 널려 있는 수백 개의 종이 뭉치.
빈틈 하나 없이 빼곡하게 새하얀 글자가 적혀 있는 칠판.
그리고 그런 칠판을 바라본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 해럴드까지.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에 톰은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해럴드를 불렀다.
“마이스터……?”
“…….”
“마이스터?”
톰의 부름에 해럴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톰은 절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헙?!”
뒤돌아선 해럴드의 눈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또한, 그의 눈빛 속에는 흥분, 기쁨, 분노, 경악 등이 다채롭게 섞여 있었다.
“톰.”
“아… 예?”
“그놈 어딨느냐.”
“누,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로이스라는 놈.”
“예?”
“하급 1반에 있는 머리 하얀 놈 말이다!”
톰은 지금 해럴드가 누구를 말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 다른 학생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지, 지금쯤이면 하급반 실전 평가 결승을 치르고 있어서… 아마 시합장에…….”
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럴드가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십여 년간 해럴드를 곁에서 지켜본 톰조차 난생처음 보는 격한 반응.
“대체…….”
아연실색한 톰의 뒤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왔고.
“…무슨 일이시지?”
주홍의 햇빛이 조금 전 해럴드가 뚫어지게 바라보던 칠판을 비췄다.
동시에 해럴드가 서른 시간 동안 증명해 낸 풀이식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주홍빛으로 빛나는 칠판 끝단에는 로이스가 시험지에 적어 넣었던 답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