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as the Second Son of a Mage Family RAW novel - Chapter (618)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618화(618/619)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618)
마리 노아유는 뤼시엔 노아유와 비슷한 인상을 가졌다. 영혼이 든 것 같지 않은 인조적인 얼굴이다. 긴 코가 그런 인상을 남길까, 아니면 미동 없이 닫힌 얇은 입술이 그래 보이게 할까. 거리를 공간 마법으로 들어낸 뒤에 붙잡힌 그는 지금 우리의 승세 앞에서도 우리가 서로의 평형추를 의심하게 만들 만큼 태연하다. 그가 우리에게 잡혀 준 것이냐, 그야말로 하느님의 뜻이라 믿고 순응한 것이냐, 아니, 다른 계획이 있는 것이냐…. 정말 우리 넷―바이에른의 마법사가 합류했다―의 힘을 감당할 수 없어 끌려온 것이 맞는가….
나는 곁에 있는 유향 향로를 둥글게 젓고 내려놓았다. 마리 노아유의 몸을 담근 몰약 희석액을 한 줌 퍼 그의 머리에 뿌렸다. 기름이 짧은 머리칼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리스도께서 오셨냐고 물었네.”
마리 노아유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한 모습에 웃어도 담담한 인상을 보니 찰나 외스터라이히에스테 공작이 떠올랐다. 깊이를 알기 어려운 눈이 아브라함과 비슷해 보인다. 마리 노아유는 머릿속에서 수많은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향기는 내가 잘 아는 것이라, 두 명이 더 떠오른다. 마리 노아유는 눈을 감고 기름이 다 흘러갈 때까지 기다리다 앞을 봤다.
“독일입니까?”
“잘 아는군. 하나 답했으니 이제 당신 차례야. 누구에게서 나에게 이런 제례를 하면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말을 들었지?”
“아니요, 당신께서 이미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리 노아유는 욕조에 찬 기름을 보며 조곤조곤 대답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하늘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입맛이 뚝 떨어져 금세 건조하게 말했다.
“나를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아닙니다.”
마리 노아유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보통 우리가 아는 신약의 예수, 나사렛 지방의 예수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는데 본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를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 사람은 나를 다시 온 예수로 믿는 것이 아니라 다음 메시아로 믿는 것이다.
기독교는 ‘다음 메시아’ 같은 것 없다. 구약까지 기독교와 공통 바탕을 가지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는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신약 시대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한 기독교는 예수께서 유일한 메시아로서 다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린다. 나는 이들이 도대체 뭘 믿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알아봤자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기독교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메시아 재림’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심판의 날을 그리는 요한계시록이다. 한 권의 계시록을 요약하자면―예수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하느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시고 믿는 자들이 구원받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 세상이 불바다 되는 날이 오고 말 탄 사람이 나오고 나팔이 나오고 메뚜기가 나오고….
그리고 나는 내가 왜 과거로 끼어들려 했는지, 무엇이 나를 과거로 보냈는지 안다. 베를린을 뒤덮은 화재 실험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겪은 사건이 하나씩 모자이크가 되어 그림을 이룬다. 그러니까, 불이라는 교집합에 무엇이 더 수반될지 선해 그것이 나를 아득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나가면 벌어질 일이 눈에 선하다. 이들은 요한계시록을 현실로 구현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리에 서 있기 힘들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있는 것처럼 눈앞의 색이 변한다. 깊은 곳에서부터 숨이 끌려나왔다. 힐데가르트 비텔스바흐가 내 눈앞에 손가락을 튕겨 나는 간단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곳에서 어떻게 해야 테르미누스 유카이리아로 쳐들어갈 수 있는지 모르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들의 광기가 대륙에 일으킬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나사렛 예수가 아닌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까.”
“제가 유대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 노아유가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우리가 묶어 둔 손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이 순리라면 그대로 있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그곳에 다짐이 필요했을까?
“물론, 이슬람교를 믿는 것도 아니겠지….”
나는 그의 같잖은 농담에 같은 얼굴로 대꾸하고 물었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다 오지 않으셨다?”
“당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시기에 아직 오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그리스도인데 예수로서의 자아를 깨닫지 못해 그리스도로서 완벽히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정도 요약도 못하지는 않지.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아도 하는 말은 일관되어 있다.
“티베트에 달라이 라마가 있습니다.”
마리 노아유는 내가 더 묻지도 않았는데 말했다. 그는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처럼 욕조의 황금빛 기름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시험을 거쳐 공식적으로 아이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그는 다음 대 달라이 라마가 되어 티베트를 통치하게 됩니다. 이처럼 다시 태어난 수행자는 린포체로 불립니다. 그들의 세계에는 관세음보살인 달라이 라마뿐 아니라 수행하던 고승도 린포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린포체로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매우 엄격한 시험을 통해 그가 전생의 기억과 표징을 가졌으며 수행자로 부를 만한 사람임이 확인되어야 비로소 그는 린포체로 받들어집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움직여 우리를 내려다보는 힐데가르트 비텔스바흐와 눈을 마주했다. 힐데가르트 비텔스바흐는 그리 불만족하지도 만족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들을 가치 없게 여기는 얼굴도 아닌, 모호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다. 그는 이곳에 들어와 심각해 하기보다 관조하고 있다.
마리 노아유가 말했다.
“당신도 같습니다. 당신은 달라이 라마로서 다시 태어났으나 스스로 달라이임을 부정하고 계십니다. 관세음보살이 그 스스로 관세음보살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리 되면 수많은 라마들이 당신을 린포체로 부르려고 해도 당신이 시험에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니, 우리가 당신을 아직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이 스스로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해도 그가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을 가릴 수는 없듯이, 여호와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오셔도 그가 여호와임을 부정할 수는 없듯이,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믿어도 그리스도 되시려고 태어났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 노아유는 예를 들기 위해 나를 달라이 라마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믿기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나를 진정 달라이 라마로 여기지 않는다. 관세음보살로 여기지도 않는다. 이것은 예시다. 나는 똑같이 돌려주고자 한다. 나는 스스로 믿기에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종교적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건 전통적 유신론자라는 말과 동치될 수 없으므로, 나는 여전히 전통적인 의미에서 완벽히 무신론자이므로, 나는 내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라는 당신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또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기독교인 중에서 ‘당신이 사실 예수예요’라는 말을 들으면 환영할 사람은 사이비 종교를 만들어 한 탕 하고 싶은 사람밖에 없다. 티베트 불교와 달리 기독교는 예수가 대를 이어 환생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마리 노아유는 남이, 사도가 하는 말에 무작정 휘둘려 그리스도 1851년 재림론에 심취한 자가 아니다. 확고한 주관과 연구를 근거로 이상하게 들리는 소리를 한다. 19세기는 여기나 내가 알던 세계나 격변의 시기였고, 해가 갈수록 세상이 달라진다. 상대적으로 동양 문물을 접하기 쉬운 1898년과 달리 1851년쯤의 프랑스는 그보다 제한적이다. 이제 막 학문으로서의 동양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많은 무신론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을 길에서 들었을 때 귓등으로 듣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태 만난 자들이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거나 못하고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 말했을 때 나는 헛도는 느낌만을 받았다. 얻게 된 것이 없었으니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같은 성서를 두고 다른 기독교인들은 너처럼 해석하지 않으니, 어떤 이유에서 성서를 그렇게 해석했고 누가 당신을 그 길로 이끌었는지 말해 보아라, 물어도 그들은 그냥 성서가 그랬다고만 말할 수밖에 없다. 이미 자신의 믿음이 하나의 형이상학 체계가 되었기에 그렇다. 그러니 그들이 형이상학적인 주관을 꼭 가지겠다면 나는 사이비 종교인 말고, 사이비 신학자를 원하는 것이다. 학자의 내면 세계가 반가웠다.
그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하기 어렵지만, 나로서는 어떤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해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자식과 같이 장신인 마리 노아유의 몸이 몰약 희석액 속에서 미동도 없는 것을 경이롭게 느끼면서, 차라리 그가 고행에 특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냐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예수가 이 시대에 오리라 믿는 걸 넘어 현실로 만들려는 자가 과연 고행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겠느냐 생각하며 속삭였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묻지.”
“당신은 왜 인정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같은 말이다. 내가 방금 마친 말과 내용이 같다. 나는 알아도 물었다.
“무엇을?”
“당신의 본질은 완전히 지상적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한평생이 말합니다. 신적 존재라는 것은 예상만큼 초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소한 일화가 당신을 인간 사이에 있지 못하게 합니다. 당신이 스스로 인간이라 굳게 믿을 어릴 적부터 당신은 당신이 인간 사이에 녹을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힐데가르트 비텔스바흐가 나를 본다. 나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봤다.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어린 예수 그리스도를 놓쳐 찾아 헤매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집에 계셨습니다. 이 사소한 일화가 그분의 일생 앞쪽에 있습니다.”
플레로마가 대륙에 날린 방송도 이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참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 노아유가 계속 말하게 했다.
“당신은 인간들처럼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기준에 있어 두뇌가 불량한 병자였으며 수많은 인간과 달랐기에 그들 사이에서 지나친 미움과 사랑을 한 번에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당신은 만물의 양면이 공존하는 야누스적인 세상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되려고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할 것입니다.”
“잘 아는군.”
“자기를 낮추신 자란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힐데가르트 비텔스바흐가 그 차이를 파악하고 다시 나를 관찰한다.
“자기를 낮추신 자란 모든 낮음을 그 위치에서 볼 줄 아는 자입니다. 내가 지금 돈이 많다 할 수 없으므로 내가 너보다 더 낮춰진 자이니 내가 더 예수적이다 외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을 낮춘 적이 없습니다. 진정 자신을 낮추는 자는 자신의 고통이 남의 고통보다 크다고 외치며 내 고통에만 눈물짓는 자가 아니라 남의 고통을 내 것으로 알고 눈물지을 수 있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건널다리이자 렌즈 삼아 너머의 세상을 걸으려 하고, 통찰합니다.”
“옳은 말과 놀라운 말을 번갈아 하는군. 이제 옳은 말 끝났으니 다음은 놀라운 말이겠어.”
힐데가르트 비텔스바흐가 빙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음 마법이 마리 노아유와 우리를 가른다.
마리 노아유는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꿰뚫었다. 성서는 그리스도를 두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한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에 따르면, 나는 명백히 그 조건부터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이기는 하나 낮춘 적도 없고 복종한 적도 없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 그러나 동시에 반박될 것을 알았다.
지금 마리 노아유는 문자 그대로 해석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성서가 예수를 두고 낮춰진 자라고 명명한 본질로 파고들었다. 예수를 낮은 곳으로 오게 한 이유는 그의 시선이 모든 사람에게 닿게 하기 위해서다. 진실로 어디에 어떻게 왔는지는 상징의 차원에서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 되는 것은 그가 낮은 자를 볼 수 있는 감수성을 가졌고 모든 낮은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낮춰진 자로 명명된다.
약자는 선인과 동어가 아니다. 우리는 빈민가에 가면 술병을 들고 아이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아버지를 볼 수 있다. 그 아버지가 입은 남루한 옷과 제때 치료받지 않아 곪은 피부를 볼 수 있다. 때때로 그 아버지들은 다리를 전다. 소아마비가 흔한 시대의 빈민으로 치료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의 약자지만 다른 약자에게 강자로 군림하면서 폭력을 일삼는데 그가 훗날 폭력을 일삼지 못할 만큼 힘을 잃는다고 해도 그곳에 기독교가 말하는 진정한 ‘낮춰짐’은 없다. 그 빈민이 아무리 낮은 자라고 해도 선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정적으로 모든 약자를 선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전형적인 타자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 노아유가 내 삶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여겨진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을 높다 말하며 증오하는 자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그리스도가 되기에는 조금도 낮춰지지 않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너무나 좋은 것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결코 낮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당신을 낮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지도 않고 세상도 당신을 약자라고 생각지 않고 당신도 세상이 당신을 약자라 부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뜬금없이 흐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좋은 것으로 이루어진 당신이 약자의 이름을 빼앗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낮음’과 ‘낮춰짐’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춰짐은 생득적 낮음으로만 오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다름을 필사적으로 분별하지 않으려는 것조차 당신의 선의와 포용인 것입니다.”
나는 몰약 묻은 손가락을 천천히 쓸어 떨구며 그의 말을 들었다.
“저도 당신을 약자라 부를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순간에서 약자가 아닙니다. 부모님과 당신 사이에서 당신은 당신을 모국에서 쫓아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약자였겠으나 당신은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강자였고 물과 같이 흐르는 대중 앞에서 당신은 약자이자 강자이자 다시 약자이자 강자이기를 반복하면서 고정할 수 없는 입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왜 그래야했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왜 당신이 이렇게 태어났는지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그럼 말해 봐.
이건 새로운 주제였다. 그가 나를 꿰뚫다 온 것 같이 생각되기에 그의 말을 듣기에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했지만, 들어 볼 만했다. 결론은 다시 ‘그리스도 되려고 이렇게 살았어’겠지만, 들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있을 터였다. 나는 곁에 앉아 그의 말을 경청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당신의 아픔은 이해받지 못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목표였습니다. 누구도 당신의 아픔을 두고 아픔이라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재판관 되어 그 아픔은 아픔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결하는 세상에 사는 것,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어 이해해야만 존중하는 사람들의 시대에서 인간답게 존중받지 못하는 것, 보이지 않는 손이 당신을 스스로 목 매달아 죽게 만들고 그러고서야 그나마의 존중을 유지받을 수 있으며 사실 죽어도 멈추지 않을 굴레 속에 있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겪었다 하면 그렇게 심한 일은 인터넷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심하지 않은 일이 당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해는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어야만 존중하는 그들은 이해되지 않는 당신을 존중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입을 벌릴 뻔했다. 인터넷? 천천히 온 힘을 다해 입을 다물어 맞췄다. 그는 내가 생각하고 말한 것을 그대로 말했는데, 나는 마리 노아유에게 저 말을 한 적이 없다. 그의 고유능력에 통찰은 없다. 그는 누군가에게 저 말을 듣고 그대로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누가 내 마음에 있던 말을, 누가 내가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를 그에게 옮겨 주었는가. 마리 노아유는 눈을 감고 전해 들어오는 것을 그대로 읊는 것처럼 말한다.
“당신은 철저히 고립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들어서도 안 됩니다. 좋은 것으로 이루어진 당신이 다른 악으로 고통받는다고 해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하는 것은 사회에 좋은 것으로 이루어진 강자의 목소리를 알리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은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누구와도 함께하지 말고 홀로 목 매달아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존엄을 부수는 대중 앞에서 그나마 존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황금만능의 세상에서 돈이 당신의 존엄 앞에 무상하다는 말을 당신이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천금이 주어져도 여전히 문제임을 황금이 최고인 세상에서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러니 금전의 높낮이를 보고 사람의 고통을 판별하며 그것이 당연한 그 세상에서 돈 없어 죽는 자들을 보고서도 당신이 존엄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돈 없어 죽는 자들이 안타깝고 당신의 존엄을 팔아치우는 것을 대중에게 허용하는 돈이 반갑기는커녕 통탄스러워 결국 당신의 죽음을 응원하는 사람까지 이해하고 마는 것입니다. 구조를 바꾸기에 혼자서는 요원해 보이고 당신이 쥔 황금을 세상에 남김 없이 나누어도 비난받는 당신은 당신이 황금을 쥐었다는 이유로 쳐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진짜 약자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이 놀기 위해 당신을 절벽에 세웠다는 것을 알아도 그대로 둡니다. 당신은 오늘 돈 없어 죽는 자들이 안타까워 놀이로 당신을 죽인 자들이 구조와 약자를 방패로 내세워, 숲을 내세워 나무를 불태우는 것까지도 이해하고 말았습니다.”
저 멀리 가림막 너머에 앉아있던 로잘리까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힐데가르트 비텔스바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멈춘 것 같은 시간에 마리 노아유 앞에 앉아 말을 듣는다. 그는 여전히 한 곳을 보면서 말한다.
“이건 안정적이지 않은 도전입니다. 당신도 아십니다. 나치 독일을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치 독일을 덮어 두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의 군중을 논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황금만능의 자본주의와 대중 살인의 미묘한 교차점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의 사고가 편향되어 있고 그것은 당신이 인터넷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알고리즘에 걸러졌기 때문임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당신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인터넷의 말을 신앙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인터넷에서 강화되는 새로운 통념을 수용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려는 것은 필히 반발을 앞에 둡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그리스도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의 존재로 인해 더 완벽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시대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필연적으로 내 두뇌에 총을 겨누는 것입니다.”
두 주체의 당신이 ‘저’와 ‘나’ 사이에 섞인다.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다. 마리 노아유는 후련해진 얼굴로 말을 마치고 등을 욕조에 편안히 기대 미끄러진다.
“사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홀로 태어나 사람들에 의해 산 정상까지 굴려 올려졌다가 홀로 굴러 떨어져 죽으라고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당신조차 당신이 얼마나 좋은 정상에 있었는지 알기 때문에 굴러 떨어질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당신 자신을 떠미는 것입니다. 자신조차 편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삶은 이래야 했습니다…. 절대적으로 낮춰짐이란 불가능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절대적인 낮춰짐이 가당키나 합니까? 그래서 당신이 스스로 당신을 죽이시는 새로운 낮춰짐을 구현하셨습니다.”
아지랑이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러라고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각져 있고 새하얀 욕실이 천천히 소용돌이친다. 나는 지금 머릿속에 떠돌고 있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것이 그의 말로부터 과도하게 나간 것은 아닌지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 가까스로 물었다.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