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as the Second Son of a Mage Family RAW novel - Chapter (619)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619화(619/619)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619)
그러니까 나는 이해되지 않기 위해 이렇게 태어나 그렇게 자랐다. 왜 이해되지 말아야 했을까? 이해해야만 존중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해되지 않기 위해 이렇게 태어났다는 말은 부족하다―나는 존중받지 않기 위해 이런 사람으로 태어나 그렇게 자랐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이렇게 흐르는 것이다. 네가 일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존중받지 않느냐, 사실이다. 그것은 다른 축에 향했어야 할 존중을 떼어 내게로 인위적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어릴 적 내 인지에 지대한 혼란을 주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켜는 순간 내게서 존중은 사라진다. 인터넷에서 떠드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쾌하지만 그런 만큼 때로 그들의 말에는 최소한 있었어야 할 무게도 없다. 그가 휴대폰을 거치지 않고 면전에 있었다면 내게 그런 농담을 건네지 못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활달한 사람들은 실제로 만났을 때 가상 공간에서 떨치던 맹위도 자신도 사라진 채로 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 들어온다. 그 얼굴에 반항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맹위와 자신은 사실 이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다. 없는 자들이 얼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 있게 말한다. 그들은 변호사 앞에서 실은 농담으로 욕설했다고 말한다. SNS 계정에서 한 말이 고소될 줄 몰랐다고 한다. 이 정도의 가벼운 욕설로는 처벌받을 줄 몰랐다고 한다. 진실로 나를 비방하려는 목적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인터넷상의 친구들과 놀다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에게 사람인 적 없었고 그저 공기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허공에 주먹질한다고 해서 네가 누군가를 죽이는구나 하고 비난받지 않는다. 그들이 해명할수록 나는 더욱 할 말을 잃는다. 작품에 대한 비판이었을 뿐인데 이렇게 고소하실 줄은 몰랐어요. 연기가 원작 느낌을 조금 못 살린다고 말한 게 잘못된 말은 아니잖아요. 나는 그가 쓴 글이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기억할 것이 뻔해 전부 읽지 않았다. 못했다. 대신 변호사는 안다. 변호사가 사람의 앞에 있는 종이를 가리킨다. 그렇게 쓰지 않으셨잖아요. 지금 보여 드린 대로 쓰셔서 여기 계신 거예요. 이거 앞서 읽고 오셨지 않아요? 그 사람이 눈을 찡그린다. 비공개 계정에서 쓴 거라 더 과격해진 것 같아요. 제 지인 중에 누가 퍼뜨렸는지 모르겠는데 공개 계정이었으면 절대 이런 말 안 했을걸요…. 나는 비공개 계정에서는 범죄를 저질러도 좋다는 그의 인생 철학에 쉽게 공감할 수 없었지만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는 안다. 아마도 그 다음에, 한 사람을 내보내고 다음에 만난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대답했다. 상처 드리려고 그런 건 아니고 다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랬는데 그 사이트 댓글도 고소되는 줄 몰랐어요.
과격해지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도 된다. 나는 이 사람들의 존재를 오늘 처음 알았는데 이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나를 알았나 보다. 알았겠지. 수년을 먼저 알았겠지. 그들만의 공간에서는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들 한다. 나와 우리는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나는 헛웃음도 나지 않아 눈을 감았다가 머리를 짚는다. 변호사가 어깨를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나갔는데 그가 말했다. 막상 보니 별것 없죠? 그렇다. 그래서 보통은 직접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눈만 끔뻑이다가 대답했다. 허무하네요. 그래요, 다들 그렇게 말하세요. 나는 그 다음에, 숨이 막혀서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럴 만큼 이성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분명히 어디서든 담뱃갑을 꺼내는 순간 사진 찍힐 것이고, 나는 성인이어도 아직 어리니까, 아역배우 이미지를 아직 완전히 벗지 못해서, 다른 동료들과 다르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유명해서, 아니, 또 그러기 전에 연예인이라, 그럴 수 없었다. 이의는 없다.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굳이 인터넷에 전파시켜서 무엇 하나? 직접 인터넷에 공유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차피 찍힐 것이고 찍히지 않는다는 가능성은 없다. 지독하게 쫓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상에서 하늘을 바라봤다. 시선에 걸리는 모든 창문에 시퍼런 반사광이 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렌즈였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했다. 나는 웃을까 말까 고민했다. 웃어야 했다.
그날 메이크업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높이 올라가 창문을 열고 얼굴을 쥐어짠 다음에 세수했다. 돌아왔을 때 나는 다시 완전했다.
인터넷에서 이러쿵저러쿵 욕설 섞어 가며 자기 딴에 타당한 의견이랍시고 남을 비방하는 자들이 얼마나 된 사람이겠냐마는 확실히 직접 만난 그들은 학교에서나 일터에서나 엮이지 않을 부류였다. 그들이 예상보다 초라해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자리를 벗어나 길을 방황하고 있으니 모두가 그들처럼 보였다. 돌이켜 보면 학교에도 일터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다. 나와 가까워지지 않았을 뿐이다. 어디에나 그들이 있었다. 무시하기에는 수가 많았다. 어디에나 있는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내게 그렇게 말한다. 연기 XX같이 하네. 내가 더 잘하겠다. 얘가 이러고도 배우냐? 너는 배우도 아니야. 얘는 싸패 새끼인 게 분명해…. 이 정도는 이제 순하다. 적응했다. 적응하기는 적응하는데, 이제 나는 너희가 싫다. 사람이 싫다. 소름 끼치게 두렵다―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배우고 있을 때 동료들은 그렇게 사람이 무섭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또래 친구를 나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부터 보지 않은 적 없다. 사람 얼굴을 못 보겠어.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들 겉으로는 웃으면서 대해도 인터넷에서는 나를 욕할 것만 같아서, 인터넷이 있는 세상에서 유명인으로 살 수는 없다. 하지만 해야 하니 했다. 그렇게 버티고 사는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지? 그러기 전에 언제까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지? 경기 일으키며 새벽 5시마다 깨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정확히 5시와 5시 30분에 숨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시퍼런 창문 보는 것이 일과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의식주를 충족하고 나면 돈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의미 없이 쌓이기만 하는 숫자가 내 존엄을 지켜 주지 않는다고, 그것이 존엄을 팔아 치우고 있다고, 그럴 바에는 그만하고 싶다고― 돈 없는 사람이 넘치는 세상에서 이런 말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이야. 무얼 할 수 있단 말이야. 좋은 밥도 집도 옷도 내일 향한 희망 없는 사람에게 그렇게도 부질없다. 그런데 그것은 누군가 간절히 바라는 오늘이다. 누군가 한 끼라도 제대로 먹고 싶어 눈물 흘릴 때, 만찬을 앞에 두고 아까 모르는 사람들에게 찔린 상처에나 신경 쓰는 내가 어떤 염치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지? 인간 된 자란 것들이, 나를 포함해, 단단히 유치한 방식으로 제 배 채우는 것에나 신경 쓰느라, 서로 무저갱에 빠져 죽는 줄도 모르고―그때 떠오르는 것이 아득함이다.
그냥 잊고 살면 된다. 왜 너 혼자 거기까지 생각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네가 너무 깊게 파고드니까 이렇게 죽어가는 거야…. 사실이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은 잊힌다. 피눈물이 난다. 사람이 잊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와 나는 알지 않는가? 나는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모두에게 잊혔고, 그리고, 그래서, 인터넷에서 수만 번은 죽었다. 화면 끄면 안 보인다더니 그것이 실물로 구현되어 내 삶을 억제한다. 카트로 끌어도 모자랄 만큼 수없이 고소장을 쓰는 삶을 산다. 너는 죽어 놓고 사회에서 그야말로 잊힌 바람에 죽어가는 자들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이냐?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성대가 뽑힌 자들을 네가 알지 않느냐? 나는 연예인이라, 좋은 것만 보여야 해서, 또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강자라서, 감히 저 죽어 가는 사람들 앞에서 배부르게 내 고통을 말할 수 없고, 저 약자들은, 좋아 보이지 않는 삶을 가져서, 모두가 그런 삶은 돌아보기 귀찮고 힘들어서, 아무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 나는 내 고통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기적인 사람이 되겠지만 약자의 고통을 대신 이야기할 수는 있었다. 내 목소리가 그나마 그런 힘을 가졌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세상의 고통을 말할 힘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너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있어? 동료고 선후배고 다들 모르는 수만 명에게 찔려 생긴 상처로 죽기 전에 그걸 살피느라 남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나도 그렇게 살면 되는데 나는 왜 그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내가 죽음을 피할 수 있었는가, 하면, 그럴 수는 없다. 구조가 문제였다. 그런데 만인이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만인을 옮겨야 했고 그것이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잘못된 구조 위에 올라타 진정으로 채워지지 않는 존엄을 채우기 위해, 왜 이만큼이나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기이하게 거대한 금액으로 빈 독에 물을 부으며 살고 있다. 그나마 이 금액으로 죽지 않고 산다, 우스갯소리로 피눈물 흘리면서 그렇게 말하는데 몇몇을 제외하면 전부 텅 비어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말한다. 어차피 걸어 다니는 시체로 살 거라면 나도 연예인이나 하면서 살란다. 연예인 한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연기하는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견딜 뿐이지 유명세 자체가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이 고통도 그 고통도 다르지 않다고, 중간에 들어온 후배 어른들이 말한다. 고통이 다르지는 않더라도 적성에 맞는 편이 있겠지. 사람 죽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그 다음부터는 알겠다. 나는 여기서 내려오고 싶었다.
방법이 없다. 유명한 사람은 모두 같은 심정을 느끼고 있다―내가 죽어도 이 굴레는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죽으면 죽은 대로 계속 내 이야기를 할 테다. 그러니까 입에 오르내리는 사실 자체가 이제 대단히 끔찍하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일은 올라갈 때도 내 자유가 없었는데 내려오는 방법도 없다. 죽은 나를 아무도 놓아주지 못하고, 완전히 잊힐 수도 없이, 수백 년이 지나도 인터넷에는 내가 살아 웃고 울었던 영상이 남을 것이고, 내 이름 석 자가 떠돌 것이다. 나는 이미 가루가 되었는데…. 아무도 목 조르고 있지 않는데 나는 숨이 막혀서 운전하면서 담뱃갑을 밀었다. 불붙일 즈음에 눈물이 났다가 금세 말라붙었다. 그러고 내려서 다른 연예인의 흡연 기사를 마주했다.
피로하다.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할 질문―유명인은 인터넷에 자기 이름을 검색할까?
대답이 뭐든 그건 자살하러 들어가라는 말이었다. 어서 죽어. 죽어서 내 눈앞에서 사라져, 빨리. 그렇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네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아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정말 인터넷 곳곳으로 들어갈 거라고 믿어? 틀렸다. 어떻게 그러겠어? 죽으라고? 그러나 예, 아니오, 둘 모두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검색하겠지. 포털창에 잠깐 검색해서 실눈 뜨고 빠르게 내렸다가 돌아오는 정도라면, 그 정도면…. 이마저도 사람 성격에 따라 달랐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검색하지 않는다. 살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나는, 아플 시간 없으니 정신 차리고 일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살려고 그렇게 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네 출연작에 대해서, 네 연기에 대해서 뭐라 말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친구들은 그렇게 묻는다. 이 질문은 필연이었다. 그들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예인이 된다면, 유명인이 된다면, 당연하게도 자신이 그것을 궁금해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고 그들의 질문에는 잘못된 점이 없다.
한 사람의 유명인으로서 답해 줄 수 있었다. 대중 앞에 섰을 때 보이는 것은 시커먼 파도다. 무저갱에서 뛰쳐나온 미지가 아가리를 벌리고 포효하고 있다. 나는 내게 튀기는 물만 닦아내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 물을 맞을 때가 아니라 깨끗한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그렇게 찍은 것을 다시 아가리에 던져 넣어야 했다. 그 파도가 내게 알아서 덮쳐올지 이번에는 피해 갈지 아무도 모른다.
하다 보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알 수 없어질 때가 온다.
유명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연예인도 비방 댓글을 모으면 A4 한 무더기는 거뜬히 나온다. 쓰는 사람은 비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읽는 사람은 충분히 비방으로 여겨지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이것은 보통, 법원이 읽는 사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끝나는 듯싶지만 비방 쓰는 사람은 쉬지 않고 나온다. 비단 연예인의 이야기가 아니리라. 인터넷 있는 시대에 유명해진다는 것은 존엄을 가져다 버려야 한다는 말이 되었던가? 그것이 자기 의지로 유명해진 자든 아니든, SNS라는 통로를 타고 비자발적으로 누구든 제삼자에 의해 유명해질 수도 있는 이 취약한 공간에서, 최소한의 존중도 없이 사람을 도마에 올리는 것이 일상이 된 시대에서, 그럼 마지막에는 누가 살아남는지 나는 모르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존중받지 않기 위해 이런 사람으로 태어나 그렇게 자랐다. 존중받지 말고 철저히 분해되어야 했는데, 그러려면 나조차 나를 지지할 수 없어야 했던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절대적인 낮춰짐이 가당키나 합니까
, 머릿속에 조롱이 맴돈다. 예수는 낮추어 오셨다. 그건 성육신을 말하는 구절로, 다시 말해 신이 인간 몸을 입고 ‘낮추어’ 왔다는 말이다.
몇몇 사람들은 ‘낮은’을 논하려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말함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생득적이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편은 아니라도 가장 낮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예수가 기원후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극심하게 차별 받던 계층―여성도 병자도 경제적 최하층민도 아니라서 진정으로 낮춰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현대의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바다. 예수가 ‘낮추어’ 오셨다는 성서 구절은 성육신을 말하는 구절이고 신학적으로 성육신의 의의는 신이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는 것에 있다. 때문에 ‘낮음’에 대한 현대 사회학적 분석은 사실 신학자 사이에서 크게 논쟁할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낮추다’가 등장하는 빌립보서 2장 6-8절의 ‘그는 근본 하느님의 본체시나 하느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성육신을 말하는 구절이므로, 시도가 유익하기는 하나 성육신을 말하기 위해 쓰인 구절을 사회학적으로 초점을 옮겨 해석하는 것은 구절의 본질적 의미를 배제한 채 진행될 때에는 일종의 논점 이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알면서도 어떻게든 논점을 회피하려 했다.
마리 노아유도 인정했듯, 누가 봐도 나는 낮지 않았고 낮은 자의 칭호를 감히 도둑질할 생각이 없으므로,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나는 직업상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개개인의 다양한 해석’의 부작용―해석의 이름으로 용납되는 비난에 신물이 나 있었으므로, 목적에서 크게 떨어진 해석을 선호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도 선호할 것까지는 없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지 않는 다양한 시선의 분석까지 빌려다가 나를 신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시도를 부정하고 있었다. 내가 당착을 일으키며 세뇌하는 것을 아는 마리 노아유가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절대적인 낮춰짐이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알던 것이 해체되고 새로 구축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그 선견자가 여기에 끌고 온다. 비록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 사회학의 관점에서 본 낮음 분석을 연결 지어 꺼려한 적 없으나 그와 그의 사도가 멋대로 나를 조롱하기 위해 응용했다. 누군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분명했다….
마리 노아유는 내 허를 완벽하게 찔렀다. 내가 이용한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인간이 아니다, 그는 완전히 낮춰지지 않았다’는 주장이 곧 ‘신이라면 어느 정도 사회 전반이 동의할 수 있는 낮음을 구현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지금 마리 노아유와 그의 사도는 내가 마지막 보루처럼 쥐고 있던 이 주장을 정면으로 이용한다. 분석가들의 눈에 예수가 절대적으로 낮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나는 플레로마나 테르미누스 유카이리아 눈에도 낮지 않다. 오히려 높다. 실로 나는 낮은 자가 아니어야 했을 것이다. 내가 겉보기에 낮은 자라면 21세기의 양심 있는 시민들이 같은 사람이자 시민인 나를 호혜로 대할 가능성이 아주 미세하게 커질 것이므로, 비록 사회가 낮은 자를 보고도 보지 않으려 하는 시대에 그 가능성이 아주 크지는 않게 되더라도, ‘누군가’는 그런 희망적인 인간애를 내게 남기지 않기 위해 나를 기묘한 강자로 설정했다. 남이 내 고통을 알고 나를 그만 찔렀으면 좋겠다는 소망조차 갖지 말라는 의도로 이렇게 만들었다고 지금 고백했다.
사람을 상품으로 만드는 신자유주의는 돈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돈을 쥐었으면 다 쥔 것이다. 심지어 쥔 자도 그렇게 생각해서, 파멸로 달려가는 줄도 모르고 배가 터질 때까지 돈을 삼키다 죽는 것이다. 나는 이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누가’ 그걸 바랐다고 하지 않는가. 강자로서 나는 돈을 쥐는데 인간성도 함께 사라진다. 내가 철저히 홀로 말라 죽기를 바라서, 그렇게 내게서 얻어낸 사리를 가지려고, 나를 낮출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누구를 위해 이런 삶을 살라 하나?
악의적인 배치다. 지독하게 악의적이다.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말고 이해받을 생각조차 말고 철저히 혼자서 죽어 보고, 죽어 본 뒤에 깨달은 것을 전 인류에게 퍼뜨려라. 이 지독한 악의에 심장이 굳는다. 내 삶이 누구 손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나는 내가 어떻게 그 자리에 있는지 생각해 봐야 했다.
나는 전통적인 신을 믿지 않는다. 인생사를 관장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내 삶이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처음부터 이렇게 짜여졌다 하면 나는 희망이란 것을 가질 수 없다. 그렇게 신에게 질 수도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마치 누군가의 손에 휘둘리는 것처럼 말한다. 신이 나를 ‘말 그대로’ 시험하기 위해 나를 여기에 세웠다는 말인가?
무얼 위해.
…이해라는 말이 지긋지긋하다. 내가 이해를 바랐나? 그래, 있어 나쁠 것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나 이해를 궁극적으로 원했냐 하면, 아니다. 결코 그렇게 치환할 수 없다. 나는 본질을 원했다. 나는 이해를 원할 때 실상은 이해가 가져다주는 존중을 원했는데, 그것은 사유가 심화됨에 따라 우려할 거리로 바뀌어 간다. 이해해야 존중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서로를 진실로 존중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가 내집단 사람이라 존중하는 것이라서, 그가 어떠한 ‘차이’를 드러낸다면 곧장 내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전제하는 존중이 진정한 존중인가? 그러니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최고라 말하는 것이 나는 신물 난다. 우리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존중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해는 내게 최고의 가치가 아니다. 나를 이해하든 말든 그건 네 사정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을 최소한으로나마 존중할 줄 모르는 사회에서 네가 얼마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어디까지 버틸 자신이 있어? 네가 모르는 사이 너도 곪아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나? 네가 사회에 고통받잖아. 이 대단한 폭력의 굴레는, 너를 깔아뭉개지만, 네가 참여하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네가 그렇게 아파하며 사는데 왜 타인을 벼랑으로 모는가? 네 살인이 다시 너를 죽이고 있음을 모른다….
마리 노아유는 신이 이런 나의 생각을 세상에 알리려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고, 그렇게 들리게 말했다. 그러니까 가시밭 속에 사람을 떨구고 모든 시험을 끝내고 나온 그가 깨달은 소감을 세상에 말하라고, 그러라고 사람을 고난에 들게 했다. 마리 노아유가 ‘이건 안정적이지 않은 도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도 내게 대답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묻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한참 가만히 계셨습니다.”
마리 노아유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번에 내 머리는 빠르지 않았다. 아니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느라 이렇게 되었거나. 나는 그제야 굳어 나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을 돌아본다. 나는 미소 짓고 마리 노아유에게 물었다.
“내가 트루먼쇼를 찍고 있나?”
마리 노아유는 특유의 깊은 눈으로 나를 들여다본다. 그는 나를 꿰뚫고 있었다.
“아닙니다. 당신을 제외한 모두가 차라리 트루먼입니다.”
마리 노아유는 무표정을 풀고 나처럼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그가 모를 것을 이야기한다. 그가 몸을 살짝 일으켰다. 물소리가 났다.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모두를 기만하십니까? 이곳은 가짜가 아니지만, 여기서 온전히 산 자는 당신뿐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영을 비교한다면 온전히 산 것은 하느님뿐일 것입니다.”
“그런 견해 차이는 둘째 치기로 하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나?”
“제가 지금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보아서는 뜻을 알 수 없는 마리 노아유의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물었다.
“내가 트루먼쇼를 찍고 있냐 물어본 것은, 누군가 목적을 위해 나를 모조리 그의 뜻대로 조작된 세상에 집어넣고 내 삶을 통제하며 나를 지켜보고 있냐는 말일세.”
“방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몇 가지는 옳다는 말이군.”
“저의 역량으로는 알 수 없기에 하는 말입니다.”
“통제.”
“틀립니다. 당신이 우리를 통제하고 있으며 이곳 너머에서도 당신이 그들을 잡아 이끌고 있습니다.”
“나는 통제하고 있지 않아. 통제하고 있다면 내가 왜 나를 그렇게 만들겠나? 홀로 죽으라니, 그런 짓을 내가 하겠는가?”
“당신께서 스스로 주님임을 부정하시니 그렇지 않게 보이는 것이지요. 돌아가기에 오히려 수많은 육축과 사람이 희생되는 것을 모르십니다. 인정하셔야만 약속의 시대가 열립니다.”
아니야, 자꾸 핀트가 엇나가고 있어.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듯이 잡고서 눈을 감았다. 그러고 물었다.
“내 말은 이곳보다 더 높은 차원이 존재하냐는 말이네.”
“주님.”
마리 노아유가 다시 나를 주님이라고 불렀다. 직접 마주보고 이런 소리를 듣기는 처음이다. 눈을 뜨자 형형한 눈이 내게 붙박여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안에서 다른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당신이 언제나 제일 높은 곳에 계십니다. 당신은 트루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오해하고 계십니다.”
‘누가’에 대한 대답은 계속 이렇게 빙빙 돌고 있다.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든 다른 존재가 있다고 믿고, 이 사람은 그게 나라고 말한다. 아니, 실은―
“그렇게 하셨을 때 지금 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무엇을 막고자 이곳에 오셨습니까? 우리 프랑스가 두려우십니까? 아니요, 당신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당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더 높은 곳에 닿기 주저하지 않으셔야만 모든 생이 평화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했는지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예정된 일이었음이 더 역겨운 일이다. 내 뜻대로 살았다고 믿는데 여기에 와야 했던 운명인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내가 오이디푸스 왕의 덜 마른 잉크 위에 있는가? 무슨 짓을 해도 신탁에서 벗어날 수 없던 그 왕의 이야기에….
나는 지금 플레로마부터 오늘날의 마리 노아유까지 나를 둘러싼 신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다. 내게 내려진 델퓌의 신탁을 알았다.
내가 여기서 신이 되어야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그러니 스스로 달라이 라마임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마리 노아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사방이 유리로 된 방에서 울리는데 도로 멀어진다. 무슨 짓을 해도 신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 왕이 나다.
그런데 과연 그게 내 운명인가?
호승심이 들끓었다. 이상의 좌절은 없었다. 눈가를 손바닥으로 크게 쓸었다. 떨어지던 체온이 다시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