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0
10화
에스페란사는 랭커가 된 이후 늘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필드에 등장할 때마다 불이 나던 채팅창……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다. 쏟아지는 시선이 익숙한 것은 저 외모로 태어난 시더 클라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을 테고.
그러니까, 설정상 그렇겠지? 저런 얼굴에 저런 성격인 남자가 시선을 두려워할 것 같진 않았다. 캐릭터의 그런 의외성을…… 갭 뭐라고 하면서 좋아하는 걸 보긴 했는데. 채팅창은 제대로 읽지 않아서.
“원래 옷을 입고 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아, 그 옷.”
그는 지팡이를 탁 짚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당부했다.
“제발 내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그런’ 옷 입을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 옷 하나하나에 붙은 능력치를 알게 되면 절대 저런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지극히 보수적인 귀족답다가도, 마도 공학과 연관된 부분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유연성을 발휘하니까. 거의 벗다시피 한 핼러윈 이벤트 코스튬, 바니걸이나 바니보이 복장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꼴도 기꺼이 수용할 것 같았다.
“흐음.”
“무슨 생각 해요?”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뒤로 뺐다.
“별거 아니에요.”
별 게 될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중요한 걸 하러 가야 하니까.
“그렇다면야.”
내밀어진 팔이 제법 두껍고 단단했다. 하기야, 집안에 사격장을 만들어 둘 정도였지. 코트 소맷자락을 분홍빛 실크 장갑이 감싸 쥐었다. 시더의 팔에 얹은 에스페란사의 손이 본래보다 작아 보였다. 럭스 부인은 나란히 마차에 오르는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밀런을 채근했다.
“밀런, 백작님께 들은 말씀은 없니?”
“백작님이 어디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하시는 분인가요.”
“하지만 저 두 분이 저렇게 그림같이 잘 어울리시는데!”
그러나 밀런은 에스페란사가 처음 방문했던 날, 그 기괴하던 차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럭스 부인은 다 잊어버린 것인지, 나름대로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밀런에게 에스페란사는 여전히, ‘백작과 결혼할 수 있는 신분의 숙녀’는 아니었다. 비록 그런 신분에 준해 대하고는 있지만.
* * *
에이번데일 백작가의 말 없는 증기 마차가 상점가를 향해 달렸다. 에스페란사는 턱을 괴고 순식간에 저 멀리로 사라지는 13년 전의 나인 호더를 감상했다.
“어?”
중간에 벌떡 일어나려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혀 못된 백작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왜 그렇게 놀라요?”
“13년 후에는 없는 건물이에요. 저기에 원래 저렇게 큰 건물이 있었구나.”
“그럼 그땐 뭐가 있는데요?”
“13년 후에는…….”
에스페란사는 말을 줄였고, 시더는 알아들었다.
고작 13년일 뿐인데도 에스페란사가 알던 나인 호더와는 많이 달랐다. 상점가의 점포도, 건물의 모양도, 심지어 길의 모양도. 새로 깔린 길에 비해 지금의 길은 좁고 울퉁불퉁했다.
“저긴 헌터 협회가 있던 자리인데.”
“저기가? 저긴 시청 소유 건물이에요. 나인 호더도 어지간히 재정이 부족했나 보군요. 저걸 팔다니.”
그런 재앙을 몇 번 겪고 나면 제아무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라도 별수 없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에스페란사가 알던 것과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건물들이 보였다. 나인 호더는 달라진 듯 비슷했고, 그 점에서 에스페란사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에스페란사가 아는 게임 속 세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는 아니라는 확인을 받은 듯했다.
눈에 익은 건물을 세면서, 에스페란사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동료 플레이어들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사이러스, 세라피나, 제미니, 발타사르……. 게시판에서 싸우다 고소장이 오간 후 게임을 접은 몇 명, 캐릭터 얼굴은 아는데 닉네임이 기억 안 나는 몇 명.
상점가에 다다르자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느려지자 나인 호더의 정경이 조금 더 잘 보였다. 이곳은 중산층이 많이 다니는 상점가였다.
어퍼 레인의 귀족들이 주로 방문하는 상점가는 마이튼 홀이라고 불리는 실내 몰 형태였다. 험한 재료도 곧잘 파는 마법 용품점이 가게를 낼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나인 호더의 부를 집약해 놓은 마이튼 홀에 비하면 중산층 상점가인 이곳은 초라했지만, 야외에 있어서 13년 전의 도시를 구경하기에는 더 나았다.
13년 후와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굴뚝이 달린 증기 마차가 돌아다녔고, 지팡이 짚은 신사와 양산 든 숙녀 뒤에 하인들뿐 아니라 자동인형, 즉 오토마톤도 따라다녔다. 미소년, 미소녀 형태가 기본이었지만 옷 입은 동물 형태도 있었다. 용접 자국을 가리려 얼굴에 분을 칠해 놓았고, 모자처럼 생긴 굴뚝에서 증기를 뿜어댔다.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우리 집엔 저런 게 없냐고 묻고 싶은 얼굴인데.”
“설마 못 만들지는 않을 거고요.”
“웃기는 소리.”
코웃음으로 대꾸한 시더 클라이번은 어느 신사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시동을 가리켰다.
“저런 거? 난 열다섯 살 때 만들었어요.”
“아, 네에. 대단하시구나.”
심드렁한 대꾸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는 다소 무기력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저거 하나에 얼마나 할 것 같아요?”
“저야 모르죠.”
그래도 예의상 찍어 보았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비싸겠지.
“이 증기 마차 한 대 값?”
“턱도 없지. 이 거리의 건물 하나 값은 해요.”
중산층 거리인 만큼 땅값만도 상당할 지역이다. 길은 깨끗하고, 숙녀들도 하녀 하나만 대동하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거리의 건물 하나? 강남 아파트 한 채 같은 소리다.
“근데 저게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옷 받아 주기, 우산 받쳐 주기, 문 열어 주기 정도예요.”
그는 가볍게 혀를 차며 창문을 닫았다.
“과시욕일 뿐이에요. 난 그럴 필요 없고요.”
이름만으로도 누구나 아는 마도 공학자인 그는 그런 과시가 필요하지 않았다. 첨단을 달리는 자가 아니라 첨단의 첨단을 개척하는 자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뿐인가요?”
시더의 눈에 빛이 스쳤다.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그는 오래도록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그것뿐이에요.”
* * *
마차가 부드럽게 멈추었다. 상점가에서도 가장 끄트머리, 빈민 구역과 멀지 않은 자리였다. 시더가 먼저 내리고, 에스페란사가 그의 팔을 붙잡고 내렸다. 이 지역에 백작쯤 되는 인물의 등장은 흔치 않은 것이라 시선이 몰렸다.
“에이번데일 아닌가요?”
“그 댁에 숙녀분이 계셨던가?”
막 근처 가게에서 나오던 젠트리 숙녀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페란사가 귀를 쫑긋 세우자, 시더는 낮게 속삭였다.
“못 들은 척해요. 아직 당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결정하지 못했으니까.”
숙녀 행세를 하려면 신분이 필요한 법이다. 에스페란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녹색 프레임에 흰 간판을 단 가게 문이 열렸다. 증기 마차에 기대선 숙녀들이 다시 속삭였다.
“저런 험한 곳에 데리고 들어가다니.”
“백작이 워낙 괴짜잖아요.”
“그래도, 숙녀가 볼 만한 광경이 아닐 텐데 걱정이네요.”
“어디, 그 집안에 드나들다 보면 예사로 보는 것일 텐데요.”
숫제 귀신 나오는 폐가 취급이었다. 물론 곧 그렇게 되겠지만.
“어쨌거나 백작도 생각이 있다면 곧 소개하러 데리고 나오겠죠. 그때가 되면 저 아가씨가 백작의 친척인지, 아니면 약혼녀가 될 인물인지 알 수 있을 테고요.”
시더 클라이번이 에스페란사를 나인 호더 사교계에 소개하고 싶지 않더라도 이렇게 된 이상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평판이란 이 사회에서 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에스페란사의 다음 외출 일정이 타의에 의해 정해지는 순간. 정작 본인은 처음 와 본 마법 용품점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빠져 있었다.
예쁘장한 마법 물품들도 있었다. 대귀족가의 관리인이 사 갈 것 같은 물건들. 실용적인 것들도 꽤 많았고. 그러나 13년 후에는 훨씬 좋은 것들이 많다. 에스페란사는 번쩍번쩍한 진열대를 천천히 지나쳤다.
그리고 줄줄이 걸린 마력 투과 옷감들을 구경하던 중, 낯익은 것을 발견했다.
“이거, 트롤 가죽 아니야?”
이게 왜 여기에 있어?
이 세계관에 몬스터가 나타난 것은 몬스터 사태 이후, 던전 내부에서만의 일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런 대로변의 가게에 트롤 가죽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트롤 가죽은 잘 무두질하면 다른 피혁과 구분하기 어렵고, 여긴 조명도 어두우니까. 하지만 두방망이질치는 심장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트롤 가죽이 맞다.
몬스터 사태 1년 전의 세계에, 몬스터 가죽이 버젓이 팔리고 있었다.
“로드 에이번데일!”
에스페란사가 가게 주인과 이야기하고 있던 시더를 붙잡았다.
“무슨 일인가요, 미스 헌터? 무서우시면 나가 계셔도 괜찮아요.”
주인 앞이라 시더는 예의를 차려, 에스페란사를 숙녀 대하듯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눈치를 주자 그는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왜 그래요?”
그가 짧게 입 모양으로만 속삭였다.
“이거 봐요.”
에스페란사가 그를 끌어당겼다.
“하하, 보기 좋으십니다. 백작님을 이렇게 끌고 다니는 아가씨가 나타나시다니,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가게 주인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에스페란사는 모자 아래의 입술이 재빠르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지금 욕한 건가?’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 트롤 가죽 앞으로 시더를 끌고 온 에스페란사가 입술만 달싹거리며 말했다.
“시더 클라이번 박사님, 이것 좀 보라고요.”
아무래도 암호라도 정해야 할 듯싶었다. 아니면 수신호라도. 지금까지는 할 말이 있으면 사람을 물리면 됐었는데, 이럴 땐 그럴 수가 없었다. 가게 주인이 어지간히 눈치 없는 인간이라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낌새를 챘을 것이다.
“이 가죽, 이거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꼭 사요. 이유는 나중에, 나가서 말해 줄게요.”
몬스터 부산물의 존재와 황금 발톱이 관련이 있을까? 말할 것도 없다. 조사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가 정해진 셈이다.
트롤 가죽을 가리키며 두어 번 더 당부한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두고 조심스레 바깥으로 나왔다.
‘눈에 띄어.’
헌터로서 눈에 띄는 것과 숙녀로 눈에 띄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경외의 시선일 뿐이지만, 후자는 제약하고 평가하는 시선이다. 이 차이를 아까는 왜 간과했을까?
마차 뒤쪽으로 숨어 들어간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서 길고 검은 라이딩 후드를 꺼냈다. 존재감을 30%만큼 줄여 주는 장비였다. 고운 실크로 만든 모자와 장갑도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드레스는 어쩔 수 없지만, 끝자락만 빼면 후드에 그럭저럭 가려졌다.
에스페란사는 녹색 프레임의 가게 뒤로 돌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림자에 녹듯이 사라진 여자의 존재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