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시더의 행동 방향은 명확하다. 이왕 들킨 거 그냥 티를 내겠다는 쪽이다. 에스페란사에겐 불편하면 모른 척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면서, 자기는 티를 내겠다고.
이렇게 티를 내는데 뭘 어떻게 모른 척해?
“할 말이 뭔가요?”
에스페란사가 입을 열려던 순간, 테일러가 크게 외쳤다.
“백작님, 다 고쳤습니다!”
“중간에 주저앉진 않겠지?”
“그럼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바퀴 바꾸는 건 백작님보다 낫습니다.”
테일러가 실실 웃으며 마부석에 올라탔다.
“나머진 가면서……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시선 끝에는 발목까지 오는 치마를 차려입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아차.
애매한 미소를 머금은 시더가 입을 열려던 찰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젖혀 그를 마주 보았다. 이번에는 아까와 반대로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질책 어린 빛을 띠었다. 시더가 고개를 기울였다. 눈꺼풀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 이 차림으로라면 크나큰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지.
“뭐랬더라? 강의실에 출입을 금지당해요?”
“아.”
“‘아?’ 앞줄에 여학생 세 명 앉아 있는 거 봤거든요? 근데 그걸 당신이 몰랐을 리는 없고!”
“반은 장난이었지만.”
이것 봐. 이럴 줄 알았어! 에스페란사는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고 몸을 휙 돌렸다. 시더가 말리듯 덧붙였다.
“반은 진심이었어요. 이 학교의 여학생은 다 합쳐서 서른 명도 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다들 얼굴을 알고 있을 테고. 그런데 새로운 여학생이 강의실에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요?”
“……들키겠죠? 쫓겨날 수도 있고.”
“운이 좋아서 들키지 않더라도 눈에 띌 테죠. 시선 끄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그렇기는 했다. 애초에 진작에 말을 해 줬으면 강의실에 들어갈 생각을 안 했을 테니 문제될 것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강의야 그렇다 치고 장비 구경이 재밌었으니까…….
“두 분, 언제 타실 겁니까? 먼저 출발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마차 앞에 선 채로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에스페란사가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마자 하녀들이 정성스레 씌워 준 가발을 벗어 던지자 땀에 젖은 머리칼이 쏟아졌다. 에스페란사는 질린단 듯이 가발을 내팽개쳤다. 시더가 낮게 웃으며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나인 호더 외곽에 위치한 마도 공학 대학에서부터 어퍼 레인에 있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에스페란사는 자신이 들은 것을 말했다.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마도 공학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고.
“사실, 당장 보복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는 편이 더 대항하기 편하기도 하고. 근데 마도 공학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하니까…… 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글쎄요. 애초에 왜 던전 같은 걸 만들고, 또 굳이 만들어 놓은 던전을 파괴하는 조직을 만들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짓을 하려고 한다면 마도 공학자를 찾아다니는 것 자체는 자연스럽죠. 당신도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봤잖아요.”
시더의 손이 스쳐 간 장비들은 성능이 몇 단계나 상승했다. 심지어 몬스터 부산물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그걸 해냈지. 다른 마도 공학자들이 전부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헌터 업계에 마도 공학자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하다. 헌터는 스스로의 마력과 마도 공학자가 만든 마법 무기를 사용해 몬스터를 사냥하고 던전을 파괴할 수 있으니까.
에스페란사와 관련된 목적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마도 공학자를 만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사실 헌터 협회는 게임 오픈 때부터 이미 수많은 마도 공학자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 나 때문은 아니겠지. 몇 달 전에도 찾아갔다고 그랬고.’
“그럼 왜 당신은 안 찾아왔을까요? 마도 공학 대학을 다 뒤져도 당신만 한 마도 공학자가 없다는 건 그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하.”
시더는 의미 없이 말끝을 길게 늘였다. 놀림당하는 기분이 들어 에스페란사는 발끝으로 시더의 다리를 툭툭 쳤다.
“아, 왜요. 맞잖아요.”
“황송하네요.”
낯빛 하나 안 바뀌었으면서, 말은 잘한다.
“당신은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시더 클라이번을 두고 마도 공학 대학 교수들부터 찾아다니는 이유를 알겠어요? 몇 달 전부터 그랬다고 하는데, 그땐 당신을 피할 이유도 없었잖아요.”
“뭐…… 짐작 가는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에요.”
시더는 별로 유감도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모르는 결격 사유가 있어요? 안 그래도 아까 보니까 마도 공학자들한테 밉보인 건 아닌가 싶던데.”
“그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그렇지. 원래 이런 건 본인이 제일 늦게 아는 거지.
“그럼 뭔데요?”
“그야 난 연구비로 꼬드길 수가 없으니까 그렇죠. 지금 그들이 가진 건 돈밖에 없잖아요.”
아.
에스페란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보자, 시더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정석은 한정된 자원이고 질 좋은 마정석은 아주 비싸요. 기계 부품도 비싸고, 완성된 기계는 더 비싸고, 그런 기계를 놓을 수 있을 만큼 크고 안전한 공간은 더욱 더 비싸죠. 마도 공학자들은 늘 돈이 부족할 수밖에 없어요. 난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던전 발생 이후로 마도 공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그런 이야기는 에스페란사도 들은 적이 있었다.
던전 발생 이전인 지금은 정부를 통해 연구비를 지원받는 엘리트들과 본인 스스로 아주 부자라 연구비 지원이 필요 없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본격적인 연구가 어려운 상태라는 말이다. 정부 지원을 받는 엘리트들은 국가가 시키는 무기 연구에 매진해야 하니 자기 연구는 할 시간도 여유도 거의 없다. 던전 발생 이후 그 문제점이 해결된 것은 몬스터 부산물의 발견으로 마정석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물질들이 값싸게 유통되었기 때문일 테고.
“내가 최고의 마도 공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엔 에이번데일 백작위에 붙은 마정석 광산의 덕도 있겠죠. 마정석 유통이나 기계 재료 값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에스페란사가 생각하기에는, 시더가 백작이 아니고, 마정석 광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는 최고의 마도 공학자가 되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나 같은 사람은 회유하기 어렵다는 말이에요. 돈, 넘치도록 있고. 명예, 좀 덜어가도 될 정도로 있고. 권력,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로는 있고.”
“아, 네에.”
시더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지금 나한테 부족한 건 당신밖에 없는데 그건 그들이 줄 수 있는 게 아니고요.”
뺨이 화끈거렸다. 모른 척, 편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아직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시더는 좀처럼 적응할 시간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을 흘기자, 시더는 눈매를 가늘게 휘며 덧붙였다.
“지금이야, 그들도 내가 당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더 접근하지 않겠죠.”
“아니, 당신이 왜 내 거예요……?”
강매당한 거야, 뭐야. 에스페란사는 기가 막혀서 되물었지만, ‘당신도 알잖아요’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만 돌아왔다.
‘뭘 알아? 몰라!’
다행이라면 다행히, 그들은 머지않아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린 에스페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으로 쌩 들어가 버렸다. 구불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시더가 느릿느릿 마차에서 나와 지팡이를 짚자, 테일러가 물었다.
“아가씨께 뭐 잘못하셨습니까?”
“아니.”
예쁜 걸 예쁘다고 하고, 좋은 걸 좋다고 하는 게 잘못인가?
처음에는 곤란하고 당황스러워 에스페란사를 피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감정의 밑바닥까지 까발려진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피하는 김에 며칠 더 피하면서 에스페란사가 그를 신경 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소소한 낙이었고.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있었는데.”
뭐, 그건 천천히 해도 되겠지. 어쨌든 에스페란사가 그를 피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먼저 피하지 않았다면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피해 다녔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는 보통 그렇게 되니까. 하지만 시더가 먼저 피해 다니자, 에스페란사는 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페란사를 거의 보지 못했던 며칠 간의 시간은 여러모로 그 값을 한 셈이다.
* * *
시더를 버리다시피 하고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 온 에스페란사는 그대로 주방으로 달려가 차가운 음료를 세 잔이나 마시고, 저녁 식사 후 후식으로 내가려고 냉동고에 보관해 놓은 아이스크림을 두 개나 먹었다. 그제야 얼굴까지 화끈하게 올랐던 열이 좀 내리는 듯했다.
“아가씨……?”
주방의 캐셔 부인은 그러다 배탈 난다며 기겁을 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장미 잼을 섞은 아이스크림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고 침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부드러운 크라바트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실크 크라바트는 시더가 하던 것과 비슷했다. 광택이 있고 치밀한 직조에 얼핏 보면 단색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리 밋밋하지만은 않다. 그리고 소소하게 에스페란사가 입고 있던 정장과 잘 어울렸다. 세심하게 골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시더가 직접 고른 것이겠지.
이상한 데서 정성이다. 그리고 정말로 더 이상하게, 신경은 쓰이는데 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완전히 실내복 차림으로 돌아온 에스페란사는 열기가 식은 뺨에 손등을 댔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딴 남자가 그랬으면 기겁했을 텐데.’
도망가는 정도가 아니라, 정색하면서 짜증 나니까 그만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더는 요령이 좋았다. 에스페란사가 당황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굴면서도 싫어할 만큼 질척거리지는 않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담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효과는 확실했다.
이를테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미소로 응수한다든지. 에스페란사가 싫은 소리를 못 하게 하려는 노림수임이 분명한데, 알면서도 말문이 막혀서 그만두란 소리는 도무지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음, 아냐. 이건 아니다. 그 사람은 원래 잘 웃었지.’
눈만 마주치면 빙긋 웃어 주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감정을 들키기 전에도, 지금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꼭 의도한 건 아닌가, 싶다가도…….
“나야말로 뭘 어쩌고 싶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