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서재로 돌아온 시더는 집사가 엄격한 얼굴로 가져온 은쟁반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백작님, 나흘이나 집을 비우시는 바람에 초대장이 산처럼 쌓였습니다.”
“집을 비우다니. 꼬박꼬박 들어왔는데.”
“아침 식사 전에 나가셔서 새벽에 들어오신 걸 ‘꼬박꼬박 들어왔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에스페란사 아가씨께서도 당연히 그리 생각하실 테고요.”
“자네까지 에스페란사 이름을 들먹이게 됐다니.”
얼른 주인 옆자리에 숙녀를 들어앉히고 싶어 안달이 난 럭스 부인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고, 그건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원리원칙주의자인 집사 하워드까지 에스페란사의 이름을 무기처럼 휘두르다니, 어지간히도 티를 낸 모양이지.
“다른 분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그럴 리가? 하지만 숙녀분의 의사도 여쭈어야지.”
에스페란사는 그가 부리는 시답잖은 수작을 곤란해하면서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휘두르는 대로 휘둘려 주면서, 중심을 내어 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구혼자의 구애도 허락하실 생각이신지요?”
“물론 에스페란사가 원한다면.”
선택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선택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주 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기 때문에 그를 고르기를 바랐다.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만.”
뭐, 에스페란사가 잔챙이 같은 놈들의 구애를 굳이 받아 주진 않을 거라는 계산이 없지는 않다. 경쟁심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가뜩이나 생활 반경이 그리 겹치지 않는 그들 사이에, 에스페란사의 시간을 잡아먹는 기생충이 더 달라붙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래도 구애를 허락할 생각이 있다는 건 진심이다. 에스페란사가 원한다면. 원하지 않을 테지만.
“하워드, 자네가 뭘 알겠어.”
“그러는 백작님이야말로 뭘 아신다는 말씀이신지…….”
드물게도 주인의 말에 반기를 들었던 하워드는 이내 헛기침을 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에스페란사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구애를 허락하시겠다고 하셨으니, 갈리스턴 공작 전하께서 보내신 편지는 에스페란사 아가씨께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은쟁반 바닥에 딱 하나 남은 편지를 들어 보인 집사가 허리를 굽혔다. 시더가 재빨리 집사의 쟁반을 붙잡았다.
“그건 두고 가야지.”
“에스페란사 아가씨께 온 편지입니다만. 설마 백작님께서 먼저 뜯어보시는 무례를 저지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설마.”
하지만 그 편지가 여기 있으면 에스페란사가 여기로 올 게 아닌가? 공작 이름이 나오는 순간 질색하고 콧등을 찡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면서 서재 소파에 누워 버리겠지. 별 내용도 영양가도 없는 얘기를 주고받다 보면 쿠션에 얼굴을 묻고 키득거릴 테고, 한 몇 시간쯤 그런 시답잖은 짓으로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니 그 편지를 침실까지 배달해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두고 가게.”
“……백작님께서 숙녀분께 온 편지를 몰래 보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이윽고 편지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잠시 후였다.
“책 빌리러 왔어요.”
눈이 슬쩍 마주쳤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떨어졌다. 에스페란사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시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책 찾아요?”
“아까 도서관에서 본 책인데, 대출이 안 되더라고요.”
“대출 카드라도 만들어 줄 걸 그랬네요.”
“뭐, 다신 갈 일 없을 테니까요.”
시더는 하워드가 가져다준 편지들에 기계적인 거절 답신을 쓰면서 대답했다.
“그거야 모르죠.”
“안 갈 거예요.”
“과연.”
과연? 에스페란사도 똑같이 생각했다. 시더의 강의도 끝났고, 적어도 내년 이맘때까지는 대학에 갈 일이 없을 텐데 에스페란사도 그때쯤이면 돌아가지 않았겠는가?
아래에서 시더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책 찾아요?”
“당신 석사 논문이요.”
시더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혀 차는 소리를 내며 2층 난간에 기댄 에스페란사를 향해 소리를 높였다.
“그걸 대체 왜 그 도서관에서 빌려요?”
“여기도 있어요?”
“그럼 없겠어요?”
음, 연구자들이 자기 석사 논문을 창피해한다는 이야기는 이쪽엔 해당 사항이 없군.
“어디 있어요? 찾아 줘요. 그거랑 예이츠에서 나온 마도 공학 입문서도.”
“예이츠에서 나온 입문서? 아, 청소년용.”
“네, 네. 그거.”
별로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에스페란사가 마도 공학에 대해 쥐뿔도 모른다는 건 피차 아는 사실이니까. 시더가 사면을 가득 채운 책장들 사이에서 책을 찾는 동안 에스페란사는 난간을 붙잡고 투덜거렸다.
“거기서 빌리려고 했는데, 사실 당신 이름도 써먹어 봤어요. 로드 에이번데일의 친척인데 강의 청강하러 따라왔다고.”
“친척?”
“정확히는 친척 아저씨라고 했죠.”
시더가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에스페란사는 가끔 정말 말도 못 하게 엉뚱한 짓을 한다.
“그걸 믿어요?”
“당연히 안 믿었죠. 안 믿을 줄 알긴 했어요.”
단호히 안 된다고 말하는 사서에게 다시 항의해 볼 생각도 없어서 ‘그럼 어쩔 수 없죠.’ 하고 책을 놓고 나왔었다.
“음. 위임장이라도 써 줄까요? 위 사람은 에이번데일 백작의 사무를 대행하고 있음.”
에이번데일 백작의 사무를 대행해서 청소년용 마도 공학 입문서와 백작 본인의 석사 논문을 대출한다고? 꼴이 아주 우습긴 하겠다. 에스페란사는 키득거리며 시더가 꺼내는 책을 받아 들었다.
“쓸 거면 아주 포괄적으로 써요. 위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면 에이번데일 백작이 전부 책임지겠음.”
“저런. 좋아한다고 했지 간도 쓸개도 다 빼 주겠다고는 안 했는데.”
또 이런다. 고개를 휙 돌리자 시더는 밉지 않게 웃었다. 홀리듯이. 심술이 삐죽 솟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한다고도 안 했거든요?”
쏘아붙인 말에 시더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에스페란사는 한순간 그것을 알아차렸고,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안 것을 알았고,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안 것을 알았고…….
“그러네요.”
“그렇다니까요.”
“안 할 거예요.”
“……누가 해 달라고 했어요?”
시더는 어깨를 으쓱했다. 해 달라는 사람도 없는 고백이었지만, 이 정도 자존심은 지킬 수 있는 것 아닌가.
“안 할 거니까, 당신도 대답할 필요 없어요. 너무 의식할 필요도 없고.”
“아니, 의식 안 하게 생겼냐고요. 지금 티를 내는 게 어느 쪽인데……”
그 말을 반쯤 흘려 넘긴 시더가 덧붙였다.
“당신 말대로 당신한텐 나밖에 없잖아요? 난 이 상태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요.”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그게 그 뜻이 아닌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굳어진 뺨을 톡 건드려 깨뜨린 시더가 서재 책상 위에서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와서 안락의자에 앉았다. 책을 들고 따라온 에스페란사는 그 옆의 긴 소파에 누워 무릎 위에 쿠션 두 개를 쌓아 올렸다. 시더가 그 위에 편지를 올렸다.
“이게 뭐예요?”
“공작이 보낸 편지예요.”
레터 나이프도 없이 손으로 북 뜯어낸 에스페란사는 내용을 대충 훑어보았다.
“무슨 내용이에요?”
“별거 아니에요. 몸 좀 사리래요. 수상이 지켜보고 있다고. 근데 난 수상한테 알려져도 상관없는데.”
다리아와의 관계가 알려지면 곤란한 것은 왕실이지 에스페란사가 아니었다.
“왕실과 다리아의 관계는 어떻게 됐을까요? 적어도 공작이 살아 돌아왔으니 예전 같지는 못할 텐데.”
“글쎄요. 당신이 공작 옆에 붙어서 경호해 줄 것도 아니고, 적어도 그들이 공작 정도 되는 거물을 쉽게 처리해 버릴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당분간은 왕실이 굽혀야겠죠. 그들에게도 왕실은 좋은 파트너니까, 말만 잘 듣는다면 더 건드리지 않을 거고. 신뢰 관계가 있었다면 몰라도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던 것 같고.”
결국 왕실은 그 부와 권력을 착취당하고 다리아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지점에서 균형이 맞춰질 것이다. 공작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해도 이런 상황에선 여왕이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이대로 왕실이 다리아의 사업을 지원해 주고, 다리아는 나름대로 왕실 좋은 일을 해 주겠죠? 그리고 몬스터 사태가 일어날 거고…….”
기왕이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황금 발톱을 찾고 돌아가고 싶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흘끔 바라보았다.
저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에스페란사에게 협조해 주고 있는 걸까? 그러나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의문을 눈치채지 못한 듯,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리고 또?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죠?”
스토리를 너무 대충 봐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스토리를 실제 역사 파듯이 파는 게이머들도 있었지만 에스페란사는 7년을 오스던에서 구르고도 굵직한 것만 겨우 기억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음, 또 뭐지. 멜리사 공주 납치 사건? 파오룬 해적 사건? 어, 수상 사퇴? 그게 이때쯤이 맞나?”
“공주 납치 미수 사건은 작년이에요. 잘 알려지진 않은 일이지만. 그것 말곤 다 처음 들어보는 걸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사실 너무 옛날 일이라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에요.”
시더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생각에 빠졌다.
“에스페란사, 공작의 의도는 불순하지만, 몸을 사리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왜요?”
“다리아를 만나면 평화적으로 황금 발톱 한 번만 빌려달라고 할 건가요?”
어? 그러고 보니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될 텐데, 그때 한 번 협상을 시도해 볼까?
“할 수 있으면 그게 좋긴 한데……”
“당신이 다리아라면 주겠어요?”
그게 문제였다. 그들은 이미 적이었다. 에스페란사가 다리아의 사업을 훼방 놓을 생각이 없다고 한들 다리아가 에스페란사의 무엇을 믿고 자기의 가장 큰 무기를 덥석 내어 주겠는가. 한 번 내어 주면 힘으로 빼앗을 수도 없을 텐데.
“대화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싸워서 빼앗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게 문제예요. 당신은 그 여자를 제압할 수 없잖아요.”
에스페란사가 반쯤 누였던 등을 벌떡 일으켰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한 거야? 나보고, 나보고…….
“내가 왜 못해요? 다리아보다 내가 강해요!”
“순수 무력으로야 그렇겠죠.”
“뭐, 다리아가 갑자기 군대라도 끌고 올 거 같아요? 사이러스랑 둘이 덤벼도 이길 수 있어요!”
사실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이러스의 전투 방식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먼저 때려눕히고 다리아와 1 대 1로 싸우면 되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럼 무슨 얘기인데요?”
“지금 당신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뭔지 알았다는 얘기죠.”
에스페란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존심을 긁는 말이 남긴 불쾌한 여운과, 시답잖은 소리는 해도 틀린 정보를 말하지는 않는 남자에 대한 신뢰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후자로 추가 기울었다.
“나한테 제일 부족한 게 뭔데요?”
턱을 치켜들며 묻자, 시더는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기동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