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기동력이라.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시더는 몸을 기울여 찡그린 미간을 꾹 눌렀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불만을 표시하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군사학에서 기동력이란, 병력을 얼마나 짧은 시간 안에 목표 지점까지 이동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죠. 전사로서의 당신은 물론 최고예요. 내 마법사.”
날 선 분위기를 어루만지듯, 화가 난 에스페란사를 달래듯 말했지만, 시더의 어조에는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 자신이 그러하듯, 에스페란사도 자기 분야에 있어서 누구보다 뛰어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다. 다만 지금은 여건이 받쳐 주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나인 호더는 당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에요.”
시더의 설명은 이랬다. 나인 호더와 같은 대도시에는 건물, 사람, 마차, 시선, 공권력과 같은 수많은 장애물이 있다. 에스페란사는 상당히 민첩하고 빠르지만 도시에서의 전투를 대비하기에는, 지금으로선 무리가 있었다.
헌터 에스페란사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약점이다. 헌터들은 던전을 공략하거나 퀘스트를 수행하는 도중에 도시를 파괴하기도 했지만, 뒤처리는 헌터 협회에서 알아서 했었다. 게임 속 도시가 좀 부서진다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고.
게임 속이었다면, 그날 에스페란사는 다리아와 결단을 내기 위해 총의 화력을 높여서 건물을 뚫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까짓 배상금, 좀 내고 말지.
하지만 여기선 그럴 수 없다. 여기서 사람을 죽이면, 진짜 죽는다. 에스페란사가 구하지 못했던 파인먼트 하우스의 고용인들처럼.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방어적으로 대꾸했다.
“그치만, 장애물이 나한테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 여자는 건물이 있으면 부수고 지나가겠죠. 사람이 있으면 죽든지 말든지 밀고 지나갈 테고. 하지만 당신은 할 수 있어도 그렇겐 안 하겠죠. 파인먼트 하우스에서 다리아와 싸웠을 때도 그랬잖아요. 그러니 다른 방법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외부로 다리아를 유인하기라도 할 거예요?”
“유인당해 줄 리가요. 내가 다리아라면 그냥 당신을 무시하고 말걸요. 우리에게 그 여자를 유인할 만한 미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다리아에게 유리한 나인 호더에서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어요.”
“……이해했어요. 결국 그 여자가 원하는 전장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그 전에 장애물이 많은 나인 호더에서의 전투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동력을 높일 때까지 몸을 사린다? 기동력은 어떻게 높이게요?”
“내가 할 수 있어요.”
자신감 넘치는 말투였다. 대체 뭘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선 안 돼요. 영지의 저택에 내 연구소가 있어요. 거기로 가야 해요.”
“그게 당신이 아까 학교에서 하려고 했던 말이구나.”
시더는 옅은 미소로 긍정했다.
“공작의 편지가 좋은 시점에 왔죠. 다리아와 당신의 옛 동료도 왕실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회복해야 할 테고, 마도 공학자들을 찾으러 다니는 걸 보면 당분간 우리를 신경 쓸 수 없을 테니, ‘레벨 업’에 이만한 적기가 어디 있겠어요?”
레벨 업. 피가 끓어오르는 말이다. 에스페란사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다리아와 사이러스, 두 명을 한 몸으로 상대하려면 에스페란사도 준비가 필요하다. 게다가 그들은 던전을 만들 수 있다. 그 능력을 얼마나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에스페란사를 던전에 가두고, 가두고, 또 가둬서 힘을 뺀 다음 공격하면 그대로 당해줄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야 없다.
“좋아요. 결론은 영지로 가는 거네요. 언제 갈 거예요?”
“되도록 빠르면 좋겠죠.”
“그럼 내일? 오늘도 좋아요!”
“……그렇게 빨리요?”
“짐만 싸면 되잖아요?”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한껏 끌어당겨 웃었다. 호승심이 삐죽삐죽 솟아나 기분이 좋았다. 잠깐 마음이 상했던 것도, 책을 읽으려 했던 것도 전부 잊어버렸다.
레벨 업, 좋지. 오랜만의 레벨 업이다.
* * *
“답장은?”
헨리 베이먼이 고개를 저었다. 갈리스턴 공작, 에드먼드는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에스페란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읽기는 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몸을 사리라고 한 것은 비단 그들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여왕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겨우 다시 구축된 다리아와의 협력 관계가 깨어질까 봐. 에스페란사와의 협상이 긍정적으로 끝났다면 여왕에게 걱정할 필요 없으니 때를 봐서 다리아를 습격하자는 이야기를 꺼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결국 거절했고, 왕실은 또다시 아무런 무기 없이 다리아와 사이러스라는 두 강력한 태풍에 맞서야 하는 처지였다.
문제는 다리아가 왕실이 에스페란사를 통해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시점에서 에스페란사나 에이번데일 백작이 다리아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한다면 그 불똥은 전부 왕실에 튈 것이다.
다리아는 이미 한 번 에드먼드를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에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그다음은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그 숙녀분을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불안한 공작의 기색을 읽은 헨리 베이먼이 슬쩍 물었다. 에드먼드는 어두운 낯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궁금증이 생기더라도 주인의 의중을 묻지 않는 수석 시종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에스페란사 헌터가 그의 감정을 제대로 뒤흔든 것만은 분명했다.
“싫어한다. 아직도.”
에스페란사는 던전이 재앙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에스페란사의 존재가 더한 재앙이었다.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그렇듯이 압도적으로 강하고 잔혹했다. 그 강함을 직접 목도하기 전에는 다리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경원시했고 지금은…….
그 여자가 던전을 공략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 경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직 선의로 그러한 일을 해내는 사람. 그래서 더더욱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매력을 느꼈다면,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그저 다리아보다 더 강하고 더 상냥한 재앙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선하고 발밑을 굽어살피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던전을 겪어 보기 전에는 만약 둘 중 하나만 남는다면 그나마 협상이 되는 에스페란사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힘을 눈앞에서 본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과 같은 자는 우리의 세상에 있어서는 안 돼. 존재 그 자체로 균형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오스던의 왕실도 이 문제에서는 평범한 사람들만큼이나 무력했다. 무력한 자는 계략을 쓸 수밖에 없다.
두 재앙이 맞붙어 서로를 파괴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결말이 있겠는가?
* * *
“그 여자. 마법사였어.”
다리아가 조용히 뇌까렸다. 사이러스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잘못 본 거 아니야?”
“내가 잘못 봤을 리 없어. 그 여자랑 싸워 봤다고. 착각이 아니야.”
“시더 클라이번의 마도구가 그만큼 강한 건 아니고? 마정석으로 둘둘 감아 놨다면야…….”
“멍청아, 그런다고 내가 마법사랑 비마법사를 구분 못 하겠냐?”
다리아의 발이 사이러스의 발등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완전히 다르다고. 그 여자 마력은 자기 거야. 그리고, 이런 말 굉장히 불쾌하지만…… 나보다 강해.”
“그럴 리가.”
이번의 ‘그럴 리가’는 감탄 반 부정 반이었다. 사이러스는 다리아가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힘을 갖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약간의 행운, 그리고 피나는 노력.
그런 다리아보다 강한 마법사.
“그 사람도 우리처럼…….”
“쉿.”
다리아가 사납게 손가락을 입술 위로 올렸다. 사이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잘만 떠들다 갑자기 단속을 하는 것이 유난스럽긴 하지만 다리아의 걱정이 완전히 근거 없는 유난은 아니었다.
파인먼트 하우스에 던전을 일으켰던 날, 던전에 뛰어들어 공작을 구하러 갔던 다리아를 기다리던 사이러스는 궁전 문 앞에서 템프턴 수상의 보좌관을 보았다.
운이 좋았던 셈이다. 마침 마주친 이가 돌격대나 다름없는 다리아가 아니라 간단한 최면술을 익힌 사이러스였던 탓에 수상의 보좌관은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돌아갔다. 의심 많은 레이먼드 템프턴은 아무 이상이 없다는 부분에서도 이상함을 느끼겠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를 것이다. 이 부분은 왕실에서 알아서 덮어 줄 테니 걱정할 것 없었다. 왕실로서는 다리아가 자신들을 협박하는 것보다, 레이먼드 템프턴과 손잡는 것이 더 두려울 테니까.
하지만 궁전에서 의심의 눈초리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들도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것이야 들키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들의 비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두 사람의 말은 한층 두루뭉술해졌다.
“만약 그 사람도 우리와 같다면, 황금 발톱 말고 다른 수단이 있는 걸까?”
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 조사를 해 보니 우리처럼 출퇴근은 아닌 것 같고, 에이번데일 저택에 머무는 모양인데.”
사이러스는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와 다른 방법이라는 뜻이겠지. 그게 에이번데일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역시 시더 클라이번이? 마도 공학자란 마도 공학자는 전부 찾아가 봤지만 허탕이었잖아. 아직 안 건드려 본 건 그 뒷골목 돌팔이랑 시더 클라이번밖에 없어.”
“확실하진 않아. 일단 너무 어려. 그리고 접근하기도 어렵고.”
다른 마법사가 그를 선점해 버렸으니 말이다. 다리아는 이를 꽉 물었다. 운도 좋지. 그런 천재를 덥석 잘도 물었어. 이쪽은 이렇게 발품을 팔아 가며 사람을 찾는데 말이다.
“일단 돌팔이 쪽을 먼저 확인해 봐. 그리고 맞으면.”
사이러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키지 않는 부분이었다.
“‘죽이고, 연구는 전부 빼앗는다.’ 알고 있어.”
그들이 찾는 자가 돌팔이 쪽이라 돌팔이 하나를 제거해서 모든 것이 쉽게 풀리길 바랐다. 하지만 다리아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찾는 자가 누구인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직감으로 향하는 길을 막는 것은 막연한 패배의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다리아는 끝까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