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에이번데일로 가는 메이플린행 세 시 열차가 출발했다. 기찻길을 거칠게 내달리는 열차의 1등석 객실에 한 숙녀가 초조한 얼굴로 손끝을 세워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돼요?”
“그래도 마벨우드 저택인데, 아무렴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죠?”
“기껏 해 봐야 얼터 지구 정보상이에요. 공작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공작 본인이 아니고. 하물며 공작 본인이라 해도 지금은 당신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진정해요.”
시더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에스페란사의 턱 밑에 묶인 분홍색 리본을 당겼다. 리본이 풀리자 머리 위에서 살짝 기울어진 모자를 들어 객실 의자에 내려놓았다. 모자챙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걱정에 뺨이 달아오른 모습은 언뜻 보면 부끄러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니까 잭은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해서…….”
“당신이 좋았나 보죠.”
“그래서 미안한 거예요.”
시더도, 잭도, 에스페란사가 책임질 수 없는 호의를 내밀 때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
“미안하면 잘해 주면 되잖아요?”
시더가 그 속을 꿰뚫어 본 듯 빙그레 웃었다.
이야기는 열차가 출발하기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벨우드에 갈 때 잭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던 에스페란사는 떠나기 전에 잭을 만나러 갔다. 빵집 앞에 서 있는 긴 후드 차림의 여자를 발견한 잭의 얼굴이 밝아졌다. 뺨의 검댕을 낡은 소매로 벅벅 닦은 잭이 아닌 척 입꼬리를 씰룩대며 다가왔다.
‘갑자기 왜 불렀어요? 내가 진짜 대단한 거 발견했는데 보여 줄까요?’
들뜬 이유가 있었다. 루크 헤이븐리의 뒷조사는 이제 의미가 없었지만…… 에스페란사는 할 말을 잠시 미루고 고개를 끄덕였다.
‘뭘 봤는데?’
잭은 에스페란사를 끌고 건물 뒤쪽으로 가더니, 손짓을 했다.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숙이자,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선생님’이랑 돌팔이 의사가 친한 거 알아요?’
‘돌팔이 의사?’
‘왜, 저번에 꼬마 데려다줬던 그 의사 있잖아요. 폭탄 머리.’
‘아. 그 사람.’
어떻게 생겼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돌팔이 의사가 피터 패거리를 치료해 주는 대신 자릿세를 안 내거든요. 근데, 그 의사, 그냥 의사가 아닌가 봐요.’
‘그냥 의사가 아니라고?’
‘흠, 흠. 내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요. 선생님이랑 돌팔이 의사가 만나고 있을 때 내가 몰래 들어갔었거든요.’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어!’
‘하나도 안 위험해요. 아무튼, 들어 봐요.’
놈은 암살자 출신에 공작을 뒷배로 둔 정보상이다. 에스페란사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잭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 의사가 저번에 망가진 그, 그 총을 다시 설치해 주더라고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그리고 무슨 말을 했는데, 회로가 어떻고 기어가 어떻고,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렸어요.’
말투를 보아하니,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말이 어려워서 기억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 상관없고.
‘마도 공학자였구나.’
그냥 돌팔이 의사인 줄 알았더니, 마도 공학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마도 공학자가 뒷골목에 산다니.
‘이름도 알아왔어요. 알프레드래요. 알프레드 설리번. 이상한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와서 협박을 한다고, 지켜 준다더니 약속이랑 다르지 않냐고 그랬어요.’
알프레드 설리번. 그 의사가 설리번 박사였다고? 보고도 짐작도 하지 못했다. 에스페란사가 아는 설리번 박사처럼 하얗게 센 머리가 아니라 갈색이 듬성듬성한 머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빈민가의 돌팔이 의사에 대한 편견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도 공학자가 빈민가에 숨어 있다니,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고서야, 대체 왜?
‘사이러스, 대체 나한테 어떤 놈을 소개해 준 거야?’
예전이라면 그도 모르고 소개해 줬겠거니 했겠지만, 지금은 적어도 모르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설리번 박사도 사이러스와 다리아의 조력자였을지도. 루크 헤이븐리의 보호를 피해 설리번 박사를 찾아왔다는 그 사람들이 다리아와 사이러스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리고, 그 의사가 선생님한테 또 뭘 물어봤냐면요. 시공간 기계? 그런 걸 아냐고 물어봤어요.’
‘선생이 뭐래?’
‘모른대요.’
맥이 탁 풀렸다. 그래, 아무리 정보상이라도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시공간 기계.’
이름만 들어도 황금 발톱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억측이라 생각했던 짐작과 맞아떨어진다. 그 이름을 머릿속 한편에 저장해 둔 에스페란사는 문득 잭을 내려다보았다.
‘너, 이걸 다 듣고 있었던 거야? 들키진 않았고?’
‘안 들켰어요. 내가 바본줄 알아요? 그 정도는 다 방법이 있다고요. 피터 패거리의 마약 뒷거래 얘기도 한 번도 안 들키고 엿들었어요.’
에스페란사는 잭의 코를 꽉 쥐고 비틀었다.
‘악, 악, 아파요!’
그런 건달 놈들과는 다르다. 암살자 출신 정보상이 어린애 기척 하나 알지 못했을 리 없다. 어쩌면 일부러 정보를 풀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보가 무사히 에스페란사에게 도달했다는 건, 잭이 정보상의 신뢰를 저버렸다는 뜻이다. 정보상은 더 이상 잭을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빈민가 어린아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어쩌자고 이런 얘기를 다 엿들었어, 위험하게.’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니까요.’
어린아이 특유의 허세 섞인 목소리에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애는 정말로 위험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부탁 따윈 하지 않는 건데.
‘난, 널 책임져 줄 수 없어.’
잭이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아이는 아주 영특하지는 않아도 눈치가 빨랐다. 낡은 신발이 툭툭 바닥을 건드렸다. 아이는 상처받기 전에 방어막을 세워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에스페란사가 더 빨랐다.
‘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둘 수도 없으니…… 잭,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지?’
‘그거야 누구나 다 그런 거고요.’
‘짐 챙겨.’
‘어디로 갈 건데요?’
눈에 서린 기대감을 못 본 척한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난 다른 일이 있어서 널 데리고 있을 수 없어. 갈 곳이 있거든. 그래서 내 친구에게 맡기려고 해. 그 애를 따라서 마벨우드로 가.’
잭은 실망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거기서 글도 배우고, 일도 배워 봐. 글을 배우면 편지를 써도 좋고.’
‘답장해 줄 거예요?’
‘그럼.’
언제까지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언질을 해 둔 덕에, 코델리아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빈민가 꼬마를 집에 들이는 일에도 흔쾌히 찬성했다. 마벨우드 남작이 꼬장꼬장한 시선으로 쳐다보기는 했지만, 에스페란사가 마벨우드와 가족들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부탁해요.’
‘걱정 말아요. 듀를 시켜서 이것저것 가르쳐 볼게요.’
‘고마워요.’
‘에스페란사, 당신이 해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꼬마야, 이름이 뭐랬지?’
‘잭이에요.’
에스페란사의 치맛자락을 꽉 쥔 채 대답한 소년이 불안한 얼굴로 낯선 공간을 흘끔거렸다.
‘그래, 잭. 네가 말을 잘 듣고 공부도 잘 하면 에스페란사를 만나러 가는 데 끼워 줄게.’
코델리아는 에스페란사가 내심 서운해질 정도로 쉽게 잭과 친해졌다.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에스페란사는 잭과 코델리아의 안위가 계속 신경 쓰였다. 잭을 코델리아에게 보냈다는 말을 들은 시더가 달래듯 말했다.
“공작의 성정상, 꼬마 하나 죽이자고 폐하의 충실한 신민인 마벨우드 남작의 저택에 살수를 보내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것도 당신과 척을 지면서까지.”
“그렇겠죠?”
“그럼요. 자, 그보다 저길 봐요.”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관심을 창밖으로 돌렸다. 뾰족뾰족한 건물들이 줄지은 도시를 넘어 긴 산맥을 따라 달린 기차는 높고 긴 다리 위를 지나며 흰 증기를 뿜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에이번데일이에요.”
시더는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 중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리튼 주, 에이번데일 시. 작지 않은 규모의 도시였다.
에스페란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쪽에 병풍처럼 드리운 산맥과 그 아래의 번화한 도시.
“산이 많네요.”
“그런 편이죠. 광산도 있다고 말 안 했던가요?”
“아, 마정석 광산! 거기도 가 볼 거예요?”
“아뇨.”
아. 아님 말고.
“그럴 시간은 없을 거예요. 저쪽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만큼, 우리도 할 일이 많으니까.”
때마침 승무원이 시끄럽게 종을 울리며 복도를 지나갔다.
“이번 역은 에이번데일, 에이번데일 역입니다!”
기차는 차츰 속도를 줄이며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나인 호더만큼 크지는 않지만 건물이 빽빽하고 높은 시계탑 주위에 널찍한 사거리가 있는 도심. 그보다 조금 더 한산한 곳에 역이 있었다. 기관차가 트럼펫 같은 소리와 함께 증기를 내뿜었다. 철컥, 철컥, 커다란 바퀴가 멈춰 섰다.
시더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에스페란사의 모자 아래 끈도 묶어 주었다. 그 탓에 에스페란사는 그의 굳은 입가만 볼 수 있었다.
“나갈 때, 각오 단단히 해요. 절대 날 놓치지 말고.”
“무슨 말이에요?”
“보면 알아요.”
대부분의 짐은 인벤토리에 넣어 뒀기에 두 손이 가벼웠다. 밀런과 애니가 가벼운 위장용 가방 두 개씩을 들고 왔다.
“백작님, 저와 테이트 양은 마부를 찾아보겠습니다.”
짐을 든 밀런과 애니가 먼저 내리고, 시더와 에스페란사는 느릿느릿 내리는 1등석 손님들 중에서도 가장 늦게 기차에서 내려왔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라 노란 가스등이 줄지어 불을 밝혔다. 역 중앙의 커다란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메이플린행 여섯 시, 여섯 시 열차입니다!”
제복을 차려입은 역무원이 종을 치며 커다란 목소리로 안내했다.
한산하다 못해 스산하던 마벨우드 역과 달리 에이번데일 역은 적당히 붐비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 대부분이 시더 클라이번을 한 번씩 흘끔거렸고, 그 중 멀끔히 차려입었다 싶은 사람은 전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로드 에이번데일! 소식도 없이 돌아오시다니요!”
“나인 호더 사교 시즌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걸로 아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옆에 계신 숙녀분은 어느 가문의 아가씨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로드 에이번데일, 내일 저희 집의 만찬에…….”
“사냥터 이용 허가를…….”
“로드 에이번데일!”
아, 이 각오였구나.
도시 최고의 유력 귀족이자 상원 의원이며 나인 호더에서도 인기 좋은 천재 마도 공학자. 그리고 무엇보다 사교계가 사랑하는 젊음과 아름다움.
겉껍데기만 보면 이보다 완벽할 수 없겠지. 속은…… 사실 속도 그리 나쁘진 않은데. 상식적이면서도 유연하고, 짓궂으면서도 상냥한 구석이 있으니까.
물론 겉만 괜찮든, 속도 괜찮든, 그건 시더의 사정이고, 이 난장판에 에스페란사가 끼어 있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시더는 가족 단위로 밀려들어 한마디씩 하다가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다음번엔 오래 걸리더라도 증기 마차로 저택까지 바로 가야지’ 하는 생각을 스무 번째 뇌까리는 중이었다.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난 증기 마차 찾아보고 올게요.”
“……당신, 가기만 해 봐요.”
“찾으면 연락할게요. 이걸로.”
에스페란사는 귓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절대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다.
“날 버리고 갈 건가요?”
시더의 팔 위에 올렸던 손을 슬쩍 내리려던 에스페란사가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더가 눈을 살짝 접으며 웃었다. 에스페란사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채로, 눈만 맞추었다.
“……누가 버린다고 그래요.”
왜 말을 그렇게 한담.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좀 늦지 뭐.
결국 그들이 증기 마차로 20분 거리의 저택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