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04
104화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도착한 저택은 마벨우드 저택에 비해서도 훨씬 거대하고 고풍스러웠다.
글라일리 하우스. 커다란 호수와 숲을 끼고 백 개가 넘는 방을 지닌 이 저택은 그중 스무 개의 방과 메인 홀을 외부에 공개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에 맞추어 돌아가던 관광객들이 백작이 돌아왔다는 말에 고개를 내밀다가 고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늦으셨습니다, 백작님.”
“어쩌다 보니. 에스페란사, 이쪽은 저택의 집사인 콜먼이에요. 콜먼, 이쪽은 내 피후견인인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미스 헌터. 에이번데일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부디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반가워요, 콜먼.”
밀런과 애니가 단출한 짐을 내리자, 콜먼이 흰 눈썹을 치켜들었다.
“백작님, 백작님의 짐은 없다고 치더라도 숙녀분의 짐이 너무 적은 게 아닙니까?”
에스페란사가 아차 하고 인벤토리에서 짐 상자 다섯 개를 꺼냈다. 콜먼의 차분하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대체 이게……. 백작님, 설마 숙녀분께 몹쓸 짓을 저지르신 건 아니겠지요?”
“몹쓸 짓?”
갑자기 어떻게 이야기가 거기서 거기로 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점잖아 보이는 집사의 망상 능력을 따라잡지 못해 눈만 굴렸다. 대체 인벤토리랑 몹쓸 짓이 무슨 상관이라고.
“콜먼, 그 방은 확실히 준비해 뒀겠지? 숙녀분이 묵으실 방이니 차질이 없어야 할 거야.”
뜬금없는 말인데도 콜먼은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아, ‘그런’ 몹쓸 짓을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전 백작님께서 어찌 가르치셨는데요. 이 늙은이는 백작님이 훌륭한 신사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네의 걱정은 알아. 미스 헌터는 내 연구에 작은 도움을 주고 있지. 물론, ‘적절하고 합법적인’ 선에서.”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어쩔 줄 모르는 집사를 비웃듯이.
“시간이 늦었으니 식사는 준비해 뒀겠지? 에스페란사, 피곤하겠지만 식사부터 하고 쉬어요.”
그렇게 하는 편이 사용인들도 편할 것이다. 아니면 주인이 씻고 내려와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꼼짝없이 대기해야 할 테니까.
“아까 그건 뭐였어요?”
식사 준비를 마친 고용인들이 식당 밖으로 물러나자, 에스페란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콜먼 말인가요? 당신이 신기한 걸 보여 주니까 놀란 것뿐이에요. 내가 당신을 해부라도 한 줄 알았나 보죠.”
아하. 심지어 자기 영지에서도 그런 소리를 듣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에스페란사가 합리적인 의심을 제기했다.
“……전적 있어요?”
“산 사람 해부한 적은 없어요.”
이 얘기를 전에도 한 적 있는 것 같은데.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생물학에 관심 없다면서요?”
시더는 억울하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마력학에는 관심이 있으니까요. 기초 학문이잖아요. 마도 공학에도 생물학적 지식이 적용되는 부분이 있고……. 그런데 누가 식사하면서 해부 얘기를 꺼냈죠?”
“당신이요.”
그랬던가, 하고 고개를 기우뚱한 시더가 잔을 들었다.
“그럼 내가 잘못했네요.”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접시가 빌 때쯤 에스페란사가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뭐예요?”
“글쎄요. 일단 당신의 기동력을 높일 수 있는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보는 것이 급선무겠죠. 그러다 여유가 생기면 당신을 데리고 도시 구경도 가고, 산책도 하고, 승마도 하고.”
“여긴 뭐가 제일 볼만한데요?”
그 질문에 시더는 뻔뻔스레 대꾸했다.
“내 연구소요.”
“아, 네에.”
“별거 없어요. 그냥 작은 도시예요. 거리 구경이나 할 만하고. 식사 다 했으면 일어날까요?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은 저택 안내를 해 줄게요.”
에스페란사는 문득 나인 호더의 에이번데일 저택에 처음 떨어졌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음. 그 폐가 말고.’
이름 모를 로드 에이번데일은 난데없이 나타난 에스페란사를 럭스 부인에게 맡겨 버렸다. 그 다음 날 오후까지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럭스 부인이 저택 안내를 해 줬었다.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거의 반년이 지나는 동안 그들은 서로를 알아가고 가까워졌다.
“당신 정말 많이 변했네요.”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시더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채 반문했다.
“그래요? 왜 변한 것 같던가요?”
“어…….”
눈을 굴리다 말끝을 흐리자,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 시더는 고개를 기울이며 덧붙였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변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에스페란사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관계는 두 사람이 서로 닳고 마모되며 익숙해지는 것이다. 하나가 변했다면 다른 하나도 변하는 것이 당연한데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도 변했나?
“그런 생각은 못 해 봤는데. 그렇겠네요.”
“그럼 당신은 왜 변했을까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말문이 막혔다. 답을 알고는 있지만 저렇게 대놓고 물어보니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답을 입 밖에 꺼내 놓은 뒤의 분위기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모른 척 입을 꾹 닫아 버렸다.
* * *
카펫이 깔린 복도에서는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가스등으로 불을 밝힌 벽에 겹치듯 드리운 그림자 두 개가 복도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이곳은 외부인에게 개방되지 않은 백작 가문 사람들만의 사적인 공간이었다. 이곳에 막 들어왔을 때, 집사 콜먼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클라이번 가문 사람들이 머무는 아파트먼트는 개방된 공간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고 웬만한 저택 못지않게 넓다고 말했었다. 시더는 ‘누가 보면 자네 저택인 줄 알겠어.’ 하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완연한 여름인데도 저녁 공기는 쌀쌀했고, 석재로 된 벽은 더더욱 차가웠다. 찬 바람이 뺨을 스치자 에스페란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다 왔어요?”
“네. 이 방이에요.”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어요? 그냥 다 왔다고 말을 하지.”
“가는 길이라서. 내 침실은 이 복도 끝에 있어요.”
그러니까, 같은 층이란 말이다. 같은 층, 같은 복도에 위치한 아파트먼트. 에이번데일 저택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마벨우드 저택에서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엄연히 말하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내일 봐요.”
에스페란사가 대체 왜 이런 식으로 방 배정을 했는지 고민하는 사이, 시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끝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에스페란사는 널찍한 등이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에 대해서도 시더가 무슨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콜먼, 그 방은 확실히 준비해 뒀겠지? 숙녀분이 묵으실 방이니 차질이 없어야 할 거야.’
그렇게 말한 것치고 방은 특별한 게 없었다. 작은 거실이 딸려 있고 크기가 아주 크다는 것만 빼면.
아담한 거실과 그에 비해 상당히 큰 침실은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쓸 것 같은 산뜻한 꾸밈에 조망이 좋았다. 지금은 저녁이라 바깥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아침이면 햇살이 방 안 가득 들어찰 것이다.
식사하는 사이 애니가 다녀갔었는지 서랍과 옷장 안에 짐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문 없는 통로를 통해 옆 방으로 건너가자 작고 예쁜 서재가 있었고, 그보다 안쪽에는 욕실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온수 기계가 달려 있었다. 기계를 조작하자 검은 마정석이 빛을 내며 톱니바퀴가 돌아갔다. 황동빛 파이프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 때문에 이 방을 준비하라고 한 건가?’
그런 거라면,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신경 써 준 셈이었다. 증기로 가득 찬 욕실 안에서 무릎을 모으고 앉은 에스페란사는 다시 한 번 첫날을 떠올렸다. 반년. 벌써 반년이나 지났단 말이지.
잠시 뒤 목욕을 마치고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고 나온 에스페란사는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깜박였다. 침대 밑에 주저앉아서 돈을 세던 첫날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지금은 그 낯설던 방이 진짜 에스페란사의 방 같고, 여긴 여행 와서 묵는 호텔 같았다. 벌써부터 그 방이 그립다니.
“심심하다.”
눈짓으로 창문을 슬쩍 보았다. 어차피 밤이라 누굴 마주칠 일도 없을 텐데 나가서 밤의 도시를 구경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곧 밀려온 졸음이 생각을 흩어 버렸다.
어차피 도시를 구경할 시간은 많을 테니까…….
* * *
다음 날 아침, 에스페란사는 협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카드 한 장을 발견했다.
“올해가 1837년인 건 알고 있는데. 근데 여기 처음 온 날이……”
그게 언제더라?
고민하던 에스페란사가 침대 머리맡의 종을 쳤다. 눈을 비비며 들어온 애니가 물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아가씨?”
“달력 있어?”
“네?”
애니가 눈을 깜박였다. 잠시 후 콜먼에게서 받아왔다며 커다란 달력을 가져다줬지만 에스페란사의 결론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애니에게 물어봤지만 애니도 ‘반년 정도 된 것 같아요’ 하는 대답밖에 내놓지 못했다.
“좀 쉬운 걸로 하지.”
도저히 못 찾겠다. 3일 안으로 추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짐작이 가는 날짜가 그것보다 많았다. 결국 오랜만에 알림 창을 뒤진 에스페란사는 꼬박 한 달 넘게 위로 거슬러 올라가 퀘스트 알림이 처음 뜬 날짜를 찾아냈다.
편지를 달랑 들고 마구간으로 내려가던 도중 만난 집사 콜먼이 물었다.
“아가씨, 어디 가십니까? 혹시 관심이 있으실까 해서 피아노를 닦아 놓았는데…….”
마음은 고맙지만 오늘은 갈 곳도 있었고, 안 친 지 10년도 넘은 피아노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편지를 흔들며 대답했다.
“로드 에이번데일의 연구소요. 보다시피 본인이 직접 초대했어요.”
혹시 에스페란사가 괜히 시더를 방해한다 여길까 봐 덧붙여 말했으나, 콜먼은 외알 안경 안의 눈을 연신 비비며 에스페란사가 보여 준 편지 중간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연구소’란 글자 주변에서 한참 빙빙 돌던 시선을 들어 올린 노인은 거멓게 죽은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거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가시려고 하십니까?”
“연구소 아닌가요? 연구하는 건 여러 번 봐서 괜찮아요. 어차피 봐도 모르고.”
“저야 백작님께서 길을 가르쳐드리라 했으니 알려는 드립니다만……. 마음을 단단히 먹으십시오.”
집사의 비장한 얼굴은 마치 에스페란사가 다시 못 돌아올 곳으로 가겠다고 한 듯했다. 지금 내가 이 집 주인의 개인 연구소가 아니라 마귀 소굴에 가겠다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