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다행히 집사는 경고의 말을 꺼냈을 뿐, 가지 못하게 막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그 경고를 금방 잊어버렸다.
집사가 내어 준 흰 말을 타고, 하녀장 덴버 부인이 싸 준 피크닉 바구니를 인벤토리에 넣은 에스페란사는 약도 한 장에 의지해 저택 뒤의 숲길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곱게 자란 말이 히힝 소리를 내며 투레질을 했지만 기수는 어리광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쉬지도 않고 꼬박 20분을 달렸다. 숲길은 갈림길도 없이 하나로 쭉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닦아 놓은 길 위에 잡초가 자라서 의외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내려 묶은 머리칼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달리다가 고삐를 휙 잡아당겨 멈춰 선 에스페란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
이래서는 약도도 의미가 없었다. 약도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은 뒤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단숨에 손에 잡히는 나뭇가지를 쥐고 나무를 탔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다가 두 번 더 뛰어올라 자리를 옮겼다. 어느덧 숲의 정경이 다 보일 정도로 높게 올라왔다. 우거진 숲 중간쯤에 나무와 비슷한 높이의 석재 건물이 보였다.
주머니에 넣어 둔 약도를 꺼내 확인해 보아도 저기밖에 없었다. 그 건물 하나 말고는 뒤쪽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창고뿐이었는데, 설마하니 시더가 그런 곳을 연구소라고 부르진 않을 것이다.
길을 확인한 에스페란사가 말 옆으로 뛰어내린 뒤 올라타 고삐를 당겼다. 말은 기수가 어디 갔다가 다시 나타났는지 어리둥절해서는 움찔거리더니 시키는 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1층짜리 건물이 나타났다.
상당한 규모였다. 내심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에이번데일 저택의 연구실은 어린애 장난 같아 보일 정도였다. 이만하면 대학에 설립된 연구소 못지않았다. 즉, 혼자 유지할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고용인들이 꼬박꼬박 와서 청소하려나?
시더가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말이 마치 차고처럼 생긴 곳에 들어가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그 옆에 멈추고 말에서 내렸다. 하얀 말은 아는 말을 만나서 적잖이 안심한 것 같았다. 말들이 재회의 기쁨을 누리도록 내버려 두고, 에스페란사는 건물 문 앞으로 다가갔다.
굳게 닫힌 철문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복잡한 잠금장치가 여러 겹으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부품들이 입을 벌려 손을 물어 버릴 것 같았다. 문 옆에 다이얼이 붙어 있었고, 카드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이 한 문장만 적힌 카드. 에스페란사는 카드를 뽑아 들었다.
갑자기 귀여운 우정 챌린지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에스페란사는 피식 웃었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다.
다이얼을 돌려 여덟 자리의 숫자를 맞추었다.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매듭처럼 얽힌 쇠막대들이 차례대로 풀렸다. 거대한 철문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하지만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위험한 것이 있다면 시더가 설명을 빠뜨렸을 리 없으니까.
그 어두운 실내를 향해 거침없이 한 발 내디뎠다. 두 발이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문이 쾅 닫혔다. 다시 철컥, 철컥, 잠금장치가 얽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미약한 불안감이 솟았다. 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
에스페란사는 간단한 마법으로 작은 빛무리를 만들어냈다. 침대 옆 무드등 정도의 희미한 빛이었지만 적어도 지나가다 넘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르니까, 조심조심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고작 한 치 앞만 보이는 상태였다. 안에 무슨 기계가 어떻게 배치되어 있을지 몰라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작은 보폭으로 조심히 걷다 보니 얼마 가지 않아서 계단이 나타났다. 에스페란사는 망설이다가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그러나 계단 위쪽도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에스페란사는 이를 갈았다. 이쯤 되면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걸어 보던 에스페란사는 발을 쿵 구르며 투덜거렸다.
“시더 클라이번,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나와 보지도 않는 거야?”
대답 대신 왼쪽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면서도 자세를 낮춘 채 방어 태세에 들어섰던 에스페란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유리로 된 진열대 안을 비추며.
그리고 진열대 안에는 높은 실크해트와 나비넥타이를 갖춘 토끼가 서 있었다. 매끈한 황동으로 이루어진 토끼가 삐걱삐걱 몸을 굽혀 인사했다. 삐걱거리는 몸과 달리 영업사원처럼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숙녀분? 저는 변호사 브론즈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몸을 세운 황동 토끼가 말했다. 각도가 달라지자 토끼의 얼굴은 으스대는 듯 보였다. ……토끼 주제에. 그러나 아래에서 비추는 빛을 받은 토끼의 황동빛 얼굴은 또 꽤 스산하기도 했다.
[유산 상속에 문제가 있으십니까?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셨나요? 숙녀분의 외도를 들키셨습니까? 참지 못하고 남편을 살해하셨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저 브론즈는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약속드립니다!]그제야 토끼가 포동포동한 앞발에 든 것이 두꺼운 법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에스페란사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까지 봐 온 장난감 같은 오토마톤과는 달랐다. 녹음된 목소리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놀랄 것도 아니었다. 목소리는 한 글자 한 글자 녹음한 것을 조합한 듯 어색했으니까. 휴대폰에 들어가는 인공지능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거야……’
그렇게 생각해도 오싹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숙녀분?]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잠깐만.
‘내가 ‘숙녀’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런 걸 인식할 수 있는 기능이 있나? 그리고 에스페란사의 그런 의문에 답하듯이 토끼가 뭉툭한 발을 삐걱삐걱 움직여 나비넥타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변호사란 이런 일을 위해 있는 존재니까요. 천천히 말씀하십시오.]진짜 말을 하네……?
“……진짜 말을 하네!”
이게 뭐야.
뒤로 물러나던 에스페란사의 등이 뭔가에 턱, 부딪혔다. 반대편과 똑같은 유리 진열장이었다. 환한 빛과 함께 진열장 내부가 비쳤다. 그리고 거기엔 착장만 다르고 생긴 것은 똑같은 토끼 오토마톤이 있었다.
“왜, 왜 또 토끼야?”
이 무슨 변태 같은……. 설마 여기만 이런 게 아니라 이 거대한 건물이 다 똑같이 생긴 토끼 오토마톤으로 채워져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거라면 집사가 왜 가지 말라고 했는지도 알겠다. 진짜 기괴하니까! 에스페란사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토끼들이 기름칠이 덜 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저는 수학자 브론즈입니다. 도슨 방정식의 풀이법을 연구 중이지요.] [저는 의사 브론즈입니다. 다리를 다치셨습니까? 붕대를 교체하셔야겠군요!]에스페란사는 뒷걸음질 치며 슬금슬금 왔던 길로 돌아갔다. 왠지 등을 보이면 저 많은 오토마톤들이 진열장에서 빠져나와 공격이라도 할 것 같았다. 이기고 지는 건 둘째치고 징그러웠다.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가 철문으로 돌아갔을 때, 에스페란사의 앞에 발 대신 바퀴를 단 오토마톤이 멈춰 섰다. 이번엔 다행히 토끼가 아니었다. 토끼였으면 기계란 걸 알면서도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저는 경비원입니다. 연구소의 치안을 맡고 있지요. 에스페란사 아가씨가 맞으신지요?]“마, 맞아.”
내가 지금 로봇이랑 대화를 하고 있나? 목소리는 한 글자 한 글자 녹음된 것을 틀어 주는 듯 어색했지만 대화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경비원 오토마톤이 문 옆의 레버를 당기자 연구소 전체에 불이 들어왔다.
“아……”
있었구나, 불이. 괜한 헛수고를 했네. 환한 빛 아래에서 보는 토끼 오토마톤들은 아까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경비원의 팔에서 손처럼 생긴 부품이 쏙 들어가고 집게발이 나왔다. 집게발로 다이얼을 끝까지 돌리자 시끄럽게 살인이니 방화니 떠들어대던 변호사 브론즈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변호사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던 법전이 마저 팔랑이다가 완전히 덮였다.
에스페란사는 오토마톤 경비원을 따라 걸으며 환한 연구소 내부를 구경했다. 기괴한 토끼 시리즈는 오히려 평범한 축이었다. 내부 벽면은 문이 있는 벽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커다란 스크린과 회로처럼 복잡하게 꼬인 기계 부품으로 뒤덮여 있었다. 금속판으로 된 스크린에 회로가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발 대신 컨베이어 벨트가 달린 오토마톤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벨트 앞쪽에 청소기 같은 것이 있어서 돌아다닐 때마다 먼지를 빨아들였다. 양쪽 팔이 먼지떨이 같은 솔을 들고 다니며 기계 부품 사이의 먼지를 털어 냈다.
천장에서 팔뚝 높이 정도 아래에서는 발이 네 개 달린 기계 장치가 증기를 뿜으며 날아다니다가 중간중간 부품을 발로 건드렸다. 에스페란사는 그 발이 시더가 가지고 다니는 스티뮬러 끝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녹슨 부품을 찾으면 기계에서 분리해 내고, 입을 커다랗게 벌려서 부품을 먹었다. 그러자 똑같이 생긴 다른 기계가 와서 입을 벌려 새 부품을 꺼냈다. 멈췄던 회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 얘는 청소부고 쟤들은 기계공이겠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생각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연구소 안의 것들은 13년 후의 세계에서도 볼 수 없는 오버 테크놀로지였다. 비견하려면 13년 후가 아니라 에스페란사가 살던 현실과 비견하는 것이 옳았다. 어떤 부분은 현실보다 못하지만 어떤 부분은 현실보다도 더 발전되어 있었다.
이 커다란 오스던 전체에서, 오직 이 연구소만.
머릿속에서 아침에 본 카드 위의 문장이 도드라졌다.
시더 클라이번은 이 연구소 내부의, 세상의 발전을 백 년 정도 앞당긴 모든 업적을 숨기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날 믿어요?’ 라니. ‘내가 당신을 믿어도 되겠어요?’라고 물었어야지. 이런 걸 보여 주려고 했으면서.
그를 신으로 만들 수도, 완전히 몰락시킬 수도 있는 비밀이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그를 경외할 것이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이제 겨우 땅을 고르고 경작을 시작한 마도 공학이라는 분야에 홀로 거대한 궁전을 지어 버린 그를 두려워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시더 클라이번에게 그리 이로울 것은 없었다.
콜먼이 왜 연구소에 간다는 말에 부정이라도 탄 듯이 기겁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척 보기에도 보수적인 노인이다. 자신이 알던 세상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듯한 이 광경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에스페란사가 정말 13년 전의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까무러쳤을지도 모르겠다. 인공지능, 우주 비행선, 자율 주행 자동차, 초고속 인터넷, 가상 현실 게임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이 모든 게 너무나도 낯설기만 하니까.
[에스페란사 아가씨, 이 문 안쪽으로는 아가씨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경호원이 레버를 당겼다. 커다란 마력판으로 이루어진 문이 열렸다.
“음, 고마워.”
역시 기계에게 말을 거는 것은 상당히 민망한 일이다. 경호원의 눈 부분을 가린 짙은 녹색 화면에 검은색으로 눈웃음 모양 그림이 나타났다. 경호원은 아까 변호사 브론즈가 그랬듯 몸을 깊이 숙여 인사하고 뒤로 돌아갔다.
에스페란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 발을 내디뎠다. 복잡한 기계로 빼곡한 것을 빼면 평범한 저택의 복도와 다를 것 없이 생긴 복도를 따라가다가 복도 끝의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안에 있어요?”
“……들어와요.”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에스페란사가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