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사실이다. 친구 사이라도 설렐 순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잠깐의 설렘을 느끼는 일은 생각보다 흔했다. 대부분은 때 이른 눈처럼 녹아 없어지는 기분에 불과했다.
그러니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떨림이 그저 분위기를 탄 것뿐이었는지, 의식하다 보니 착각한 건 아니었는지.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만큼 불확실한 감정으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지. 어쩌면 이미 상처를 주고 있나?’
에스페란사의 귀환을 도우면서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돌아갈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못 들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스페란사가 돌아간다면, 그래도 좋은 건지. 만약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볼까?
지금이라도 나가서,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방문을 두드리고 고개만 내민 채 얼른 물어보면 된다. 그는 대답을 해 줄 테고, 그걸로 궁금증은 끝이다. 아까도 그랬듯이.
하지만 지금 나가서 그를 보면, 마벨우드에서 그랬듯이 밤공기를 맞으며 눈을 맞추면 잠깐의 기분을 진짜처럼 착각해 버리진 않을까?
밤에 분위기를 타고 괜히 친구에게 설렌 적이 몇 번 있었다. 밤공기에는 사람을 들뜨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 들뜬 기분이 사람 때문인 줄로 착각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물론 착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환한 아침 햇살 아래에서 친구의 얼굴을 다시 보면 그것이 얼마나 알량한 기분에 불과했는지 알게 되니까. 그러니까 시더 클라이번도…….
다음 날 아침, 에스페란사는 지독한 낭패감을 맛보고 있었다. 맨정신으로 봐도 흠잡을 데 없이 유려한 얼굴이 에스페란사를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불이 꺼진 듯한 에스페란사의 얼굴을 걱정스레 살피며 물었다.
“악몽이라도 꾼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닌데.”
밤에 쉽게 설레고 아침에 쉽게 깨어나는 건 공기 탓도 뭣도 아니고 얼굴 때문이었을까? 그때, 밤엔 얼굴이 안 보여서 설렌 거였나?
그런 거라면 유감스럽게도, 상대는 밝은 빛 아래에서 보는 게 더 나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잠을 좀 설쳤나 봐요.”
“저런.”
왠지 모르게 수척한 에스페란사의 뺨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시더가 이내 눈까지 접어 웃었다.
“그럼 오늘은 연구는 그만두고 저택 구경이나 다니죠.”
“무슨 저택 구경을 하루 종일 할 것도 아니고.”
마주 웃으며 답하자,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루 종일 할 수 있을걸요. 관광객들이야 고작 열, 덴버 부인! 개방된 방이 몇 개였지?”
하녀들을 진두지휘하던 덴버 부인은 멀리서도 그 소리를 용케 알아듣고는 똑같이 소리를 높여 답했다.
“정확히 스물두 개랍니다, 백작님. 드레스룸과 홀까지 합쳐서요.”
“드레스룸은 빼고 세야지. 아무튼, 관광객들이야 그 스무 개만 보면 된다고 쳐도 당신은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으니까요.”
너무 넓어서 하루를 꼬박 쓰고도 다 보지 못하고 돌아갔던 베르사유 궁전이 생각났다. 물론 이 저택은 절대 왕권을 지닌 왕이 사치의 절정에 이르러 지은 궁전만큼 거대하지는 않았다.
“뭘 얼마나 보여 줄 생각이에요?”
“사실 별것 없어요.”
아파트먼트를 나가면, 고용인들을 따라 저택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쪽에서도 시더를 발견한 듯했다. 고용인들이 날렵하게 인사했다. 시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복도로 에스페란사를 이끌고 갔다.
“우리 어디 가요?”
“어디든 사람 없는 곳으로요.”
시더는 정말로 에스페란사를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끌었다. 아무도 없는 곳은, 다만 아무도 없는 이유가 있었다. 즉 볼 것이 없었다. 시더는 난감한 얼굴로 아치형 통로를 넘어섰다. 다음 방도, 그다음 방도 마찬가지였다.
“백몇십 개짜리 방이 다 이 모양인 건 아니겠죠?”
에스페란사는 먼지가 쌓인 천을 슬쩍 넘겨 보며 말했다. 대리석으로 코팅한 고풍스러운 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하나 들춰 보면 보는 재미는 있겠지만, 먼지가 너무 많이 나는 작업이었다. 손 위의 묵은 먼지를 털어 낸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따라 통로를 넘어갔다.
“볼 게 없네요.”
“유감스럽게도 그러네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요? 관리를 잘하셨나 봐요.”
“그렇다기보단 파티를 좋아하셨어요.”
전 백작 부인. 본인의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잔뜩 모으는 취미가 있는, 좀 특이한 사람.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어머니에 대해 아는 건 그 정도였다.
“이 저택의 반절 정도를 손님으로 가득 채우셨죠. 남편이고 아들이고 다 싫다고 도망가는데도.”
“좀 어울려 드리지 그랬어요. 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같이 어울려 드리지 못한 게 제일 후회됐는데.”
시더는 매정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어울려 드리지 않아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나마 좋게 남은 게 아닐까 싶네요.”
“아, 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좀 어울려 드리지, 하고 중얼거리자 시더가 덧붙여 말했다.
“어머니도 날 당신 파티에 데려가는 걸 좋아하시진 않았어요. 재미없거든요. 내기 포커를 하다가 아끼는 목걸이를 저당 잡혔을 때는 자는 사람을 깨워서라도 데리고 나갔지만.”
전 백작 부인이 살아 있을 때면 시더는 스물도 안 됐을 텐데. 목걸이를 찾아오랍시고 어린 아들을 내기 포커판에 밀어넣는 백작 부인이라.
“그거참. 당신 성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겠다고 해야 하나…… 이겼어요?”
“생긴 건 아버지를 닮고,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더군요. 이겼죠.”
하긴 이기는 거야 당연한 거고. 생긴 건 아버지를 닮았다고? 에스페란사는 문득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부모님 초상화 있어요?”
“있긴 한데, 거긴 지금 관광용으로 열려 있어서.”
그럼 지금은 가도 제대로 보지도 못할 것이다. 집주인을 데리고 손님들과 마주쳐서 좋을 것도 없고. 밤에 몰래 나가 봐야지.
“당신 부모님은요?”
지나가듯 질문한 시더는 스페어 키를 꺼내 다음 문을 열었다. 다른 것은 모두 평범한 방이었으나, 서슬 퍼런 사슴 박제만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다른 가구들은 전부 천으로 가려 놓은 상태라는 점은 아까 본 방과 같았지만 이 방은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듯 깨끗했다.
낯익은 박제를 발견한 시더의 낯이 조금 흐려졌다. 에스페란사의 손끝을 붙들고야 원래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의아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스무 살 때 두 분이 같이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였다. 두 딸에게서 부모님을 앗아갔을 뿐, 뉴스에 나오지도 않을 만큼 평범한 교통사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 가던 날, 장례식 날보다 더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별로 특별한 건 없었어요. 걸핏하면 서른이 다 된 언니와 학교에 있던 나를 데리고 여행을 가려고 했던 것 정도?”
“그래서 도망 다녔나요?”
“도망 다니진 않았고, 몇 번 핑계 대고 빠졌죠. 딱 어른들 취향의 여행이었거든요.”
산에 가면 등산을 하고 바다에 가면 낚시를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밤까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여행. 솔직히 질색할 만했다. 시더는 알 만하다는 듯이 답했다.
“내 아버지도 그랬어요. 사냥광이었거든요. 방학이 하필 사냥철과 겹쳐서 피할 구석도 없었죠.”
“당신도요? 아빠들은 왜들 그러는지.”
시대도 상황도 사람도 다른데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
“그럼 저것도 당신 아버지가 잡은 거예요?”
“……맞아요. 큰 걸 잡아야 한다고 얼마나 괴롭히던지.”
시더는 그렇게 말하며 가구를 가린 천을 들어 벽 한가운데를 장식한 사슴 박제를 덮어 버렸다. 음영이 드리운 시더의 눈을 흘끔거렸다. 복도로 나와 먼지가 뿌옇게 일어난 방문을 닫은 시더가 불쑥 물었다.
“부모님을 만나러 가고 싶진 않아요?”
“네?”
“7년 전에 돌아가셨다면, 지금은 살아 있을 것 아닌가요.”
머리가 뻣뻣해지는 듯했다. 그래, 그렇지.
“만나는 게 부담된다면 적어도 얼굴은 볼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에스페란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맞는 말이다. 만약 에스페란사의 부모님이 이 세계에 있었다면. 그리고 시더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건가요?”
눈을 맞추고 있지 않았기에, 창백해진 낯빛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손끝을 붙들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시더는 고개를 비뚤게 기울였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군요.”
“……아니에요. 당신 말대로, 그냥 굳이 보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신 분들이니까.”
거짓말을 하는 혀가 돌처럼 무거웠다.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모른다.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마른 입술을 깨물며 눈을 내리떴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시더가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었다. 기분이 상한 듯 보이는 에스페란사의 뺨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저런 흉한 것 말고, 당신이 좋아할 만한 거 보여 줄게요.”
에스페란사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시더에게 잘못해 놓고 그가 눈치를 보게 할 순 없었다.
“그게 뭔데요?”
“백 년 전의 무기 컬렉션. 관심 있어요?”
이 남자는 정말이지 에스페란사를 잘 안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픽 웃었다.
“관심 있어요. 엄청.”
언젠가 말할 때가 있겠지. 조금 더 지금을 즐기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비겁하기는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더의 옆에 붙어 따라왔다.
오래된 미술품, 고서적, 무기, 도자기. 옛 에이번데일 백작들이 수집한 물건들은 종류도 시대도 다양했다. 수집품 자체야 아주 대단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녀 본 경험에 비춰 보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박물관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수집품들을 직접 만져 볼 수 있었다.
“원래는 하면 안 되는 거지만.”
시더가 장난스레 웃었다.
마상 시합이 건재하던 시절의 랜스, 화약이 겨우 들어왔던 시절의 소총, 마도 공학 태동기의 마법 무기를 만져 보는 에스페란사의 눈이 쉼 없이 반짝거렸다. 경매에 내놓으면 수백만 테롯에 팔릴 미술품이나 인근 대학에서 빌려달라 사정을 하는 고서적을 볼 때는 그저 신기해하기만 하더니, 지금은 거의 관리인을 잡아먹을 기세였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씩 부풀었다. 하루를 통째로 써서 정원까지 한 바퀴 다 돌았을 때쯤에는 평소보다도 기분이 더 좋았다.
시더는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손에 뭔가 묻은 것 같은 불편한 기분을 전부 털어 내지는 못했다.
저택을 돌아보면서 점점 좋아지기는 했지만 에스페란사는 생각할 거리가 많아 보였다. 사슴 박제가 있던 방에서 시더가 한 말 때문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시더도 에스페란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홀로 서재로 돌아온 그는 서재를 정리하던 하인을 손끝으로 불렀다.
“콜먼을 불러와.”
고용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백작은 좀처럼 집사를 부르는 일이 없는 인물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나이 든 집사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의 박제, 분명히 버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 아직도 그게 이 저택에 남아 있지?”
콜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전 백작님께서 손수 잡아 오신 것 아닙니까. 아무리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지만…….”
“물론 저게 어머니를 죽인 건 아니지. 하지만 아버지가 버리라고 하셨으니 버렸어야지. 미련이 남으면 자네 집에 가져다 놔. 그건 안 말릴 테니.”
늙은 집사가 울상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버리라고 길길이 날뛰던 백작의 명령을 어기고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선대 백작과 지금의 백작이 쌍으로 무관심했던 덕택이었다.
콜먼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서재를 나갔다. 정말이지, 정도 많고 미련도 많은 노인이다. 딱하게도.
그 미련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박제는 기분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