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
11화
한참 걷다 보니 건물의 모양이 달라졌다. 길의 크기도,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무엇보다도 공기 자체가 달랐다.
나인 호더 최대의 빈민가, 얼터 지구였다.
시궁창 냄새가 났다.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가도 쥐와 벌레가 드글거렸고, 사람들은 고깃덩어리처럼 뭉쳐 살았다.
“귀한 아가씨, 한 푼만 주세요.”
섬뜩한 기분에 발을 들어 올리자, 휘적거리는 시커먼 손이 그 아래를 지나갔다.
‘아, 구두.’
라이딩 후드는 틀어 올린 머리칼, 귀해 보이는 외모, 드레스까지도 가려 주지만 구두까지는 가릴 수 없었다. 존재감을 30% 줄여 주는 아이템으로 모두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내놔!”
순순히 잡혀 주지 않자 땟국물 낀 손이 좀비처럼 후드 자락을 붙잡았다. 에스페란사는 혀를 차고 그 손을 발끝으로 가볍게 누르며 뛰어올랐다. 흔들거리는 몸이 건물에 조악하게 걸쳐진 창살 위에 섰다. 내려다보니 이 구역의 구조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알던 거랑 많이 다르네.”
아무리 많이 부서지고 변했다지만, 이렇게까지 다른 구조일 줄은.
[맵: 얼터 지구, 나인 호더]맵도 전부 시커먼 색이다. 그나마 에스페란사의 현 위치가 붉은 동그라미로, 마법 용품 가게가 있던 자리가 미로의 출구처럼 표기되어 있었다. 꽤 안쪽으로 들어온 상태였지만 지금까지 왔던 길만 미색으로 밝아졌고, 건물들은 여전히 시커멓다.
확실히 너무 무턱대고 들어왔다. 13년은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이다. 13년 전의 얼터 지구는 거미줄처럼 복잡했다.
게다가, 저 눈빛들.
얼터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떠난 상태였다. 남은 이들은 너무 어리거나 늙어서 일을 구할 수 없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었다. 그 시뻘건 눈동자가 사지에 달라붙을 것 같았다.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감수할 이유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꼬질꼬질한 소년이 빠진 이가 드러나도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낡은 모자를 벗어 뒤집어 든 채로.
“한 푼 주실래요?”
누가 보면 맡겨 놓은 줄 알겠다. 에스페란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군가는 말을 걸었을 것이다.
“그럼 넌 뭘 줄 수 있는데?”
“아가씨의 목숨이요.”
요것 봐라?
“네가?”
“그럼요. 아가씨가 100테롯만 주시면, 안전하게 바깥까지 데려다드릴게요.”
소년이 제법 스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기 형들은 꽤 무섭거든요. 아가씨처럼 귀한 분은, 뼈도 못 추릴걸요?”
“너 이름이 뭐니?”
그런 걸 왜 묻냐는 듯이 소년이 얼굴을 찡그렸다. 검댕이 잔뜩 묻은 걸 보니 굴뚝 청소 일을 하는가 싶었다. 아니면… 소매치기? 뭐든 간에 이런 곳의 아이들이 하는 일 중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테니까.
“잭이에요.”
이 녀석도 잭이다. 흔한 이름이지만, 공교롭게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안 주겠다고요? 그럼 빼앗아야겠네.”
소년이 씩 웃었다. 이 녀석, 바람잡이였군. 다른 사람과 같이 온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에스페란사는 등 뒤로 다가온 덩치 큰 남자들을 흘끔거리며 생각했다.
좁은 골목길에, 뒤로 열 명. 앞으로도 대강 열 명.
퇴로 없음.
“붙잡아!”
“형들, 소매 장식은 내 거예요!”
잭이 생쥐처럼 옆으로 쌩 빠지며 말했다. 이가 누런 남자들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귀한 댁 아가씨 같은데, 팔아 버리는 것보다 몸값이 더 높지 않을까?”
“모르지, 마담이 귀한 집 아가씨는 귀하게 쳐줄지.”
그러나 다 잡았다고 생각한 여자는 어깨를 쥐고 후드를 젖히려는 수십 개의 손이 닿는 순간, 땅을 박차 오르며 손을 전부 떼어 냈다. 후드 아래로 자주색 치맛자락이 넓게 퍼졌다. 여자가 다시 땅에 착지했을 때 두 손에는 각각 긴 세검이 들려 있었다.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0
상태 이상 0
사망 0
좌측 상단에 작은 창이 나타났다. 언제나 확인할 수 있는 프로필 창과는 달리 전투 모드에서 적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창이었다. 던전에서는 유용하지만, 지금은 필요 없다. 에스페란사는 익숙하게 그것에서 눈을 돌렸다. 13년 전으로 떨어진 후 제대로 된 전투는 처음이다. 감이 떨어지진 않았나 볼까?
“뭐야, 아까까진 빈손이었잖아!”
“진정해. 귀족 계집애 하나야.”
“그래도 칼을 들었다고.”
맨손의 남자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에스페란사는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길을 내는 대로 앞으로 나갔을 뿐이었다.
오늘 운이 좋았다면 정보상을 찾았을 텐데, 꼭 이런 것만 달라붙는다.
‘이놈들을 두들겨 패서 정보상의 위치를 물어볼까?’
좋은 생각이다. 이렇게 머리가 많은데 이 중 한 명은 알겠지.
생각을 마친 에스페란사는 몸을 낮추었다가 그 반동으로 튕기듯 달려 나갔다.
“악!”
세검이라고, 여자라고 무시하던 자들이 낙엽처럼 쓸려 나갔다. 종잇장같이 얇은 검은 뼈 사이를 깊게 찔렀다 쑥 빠져나왔다. 두 자루의 검은 열여섯 자루쯤 되는 것처럼 전진하며 앞뒤에서 달려드는 자들의 허벅지, 팔, 복부를 빠르게 찌르고 비틀어 빠져나왔다. 뒤에서 달려드는 자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에스페란사는 기가 막히게 급소만 피했다.
죽이지는 않되, 전투 불능으로 만든다. 그 명제에 지독하게 충실한 움직임이었다.
“도, 도망가. 얼른!”
“저리 비켜!”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자들이 뒤로 돌아 달려갔다. 에스페란사는 도움닫기 하나 없이 뛰어올라 창틀을 박차고 한 바퀴 돌아 그 길을 막아섰다.
“어딜 가려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세검이 다가왔다. 뒤에는 쓰러진 동료들, 앞에는 검을 든 여자.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앞을 골랐겠으나, 지금은 다친 동료들을 무자비하게 밟고 도망갈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퇴로를 막은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기다려 줄 리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도망가려던 네 명의 허벅지에 똑같은 상처를 내 주었다.
총 서른두 명이었다. 피 묻은 검을 남자의 더러운 옷자락에 문대자, 남자는 게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32
상태 이상 0
사망 0
“담력도 없는 것들이, 누굴 건드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간에 휘말려 도망도 못 가고 새파랗게 굳어 있는 꼬맹이.
“이리 와.”
잭이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총기의 시대에 고작 세검 두 개를 들고 거의 서른 명의 왈패들을 정리한 가공할 만한 무위가 아니었다. 저 여자의 머리. 그 난리 통에도 후드가 벗겨지지 않았다.
“마법……!”
“제법 눈썰미가 좋구나?”
새까만 후드 아래 분홍빛 입술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잭은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풍선을 탄 듯 보는 사람을 들뜨게 하는 미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사그라든 미소가 바늘이 되어 풍선을 찌르자, 두둥실 떠오른 기분도 곤두박질쳤다.
“네 이름이 잭이라고 했지? 이름이 좋으니까, 넌 곱게 살려 주마.”
잭은 낡은 모자를 꽉 쥔 채 덜덜 떨었다. 여자의 기준에서 ‘곱게’가 얼마나 곱게일지는 알 수 없었다. 잭에게 재산이라고는 날렵한 몸뚱어리뿐이다. 그리고 눈앞의 여자는 잭의 유일한 재산을 순식간에 빚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저, 저한테 물어보려고 하셨던 게 있었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꼬마는 어떻게든 괴물의 신경을 끌어 보려고 했다. 대단한 실력자였지만, 방심하면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잭 같이 비리비리한 꼬마는 턱도 없고, 지금 여자의 뒤에서 발목을 쥐려고 하는 저 건달이.
“으악!”
무도화 같은 구두가 건달의 발목을 지르밟았다. 처음에는 손을 떼어 내듯이. 그리고 여전히 잭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발꿈치만으로 건달의 손목을 분질러 버렸다.
“너 이 근처 잘 아니?”
“뒷골목 지리라면, 제가 누구보다 잘 알아요.”
건달들은 다쳐도 괜찮다. 보아하니 죽을 만큼 찌른 것도 아니고,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는 있어도 회복하고 나면 다시 하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쩍 마른 꼬마 잭은 공장에서도 받아 주지 않아 건달들의 수발이나 들 뿐이다.
다치면, 조금이라도 몸이 불편해지면, 그는 곧장 버림받을 것이다. 그리고 굶어 죽겠지. 멀건 오트밀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자리를 유지하려면 이 여자의 검에 찔려선 안 된다.
‘나 같은 건 뼈도 못 추릴 거야.’
상황 판단 하나는 확실했다.
주변을 휘휘 둘러본 에스페란사가 조용히 잭에게 속삭였다. 신경 쓰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래? 그럼 정보상이 어디 있는지도 알겠네?”
“……왜요?”
“이유는 알 것 없고.”
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건달들, 소매치기들, 창녀들과 남창들, 광대들, 공장 노동자들…… 그런 자들을 찾는 것은 괜찮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이고, 위험한 사람들이지만 이 여자에겐 해당 사항이 없을 것 같다. 위험해지더라도 상관없었고.
그런데 건드려선 안 되는 부류들도 있었다. 인신매매단, 용병, 그리고 정보상. 그들은 뒷골목이라는 무대를 필요로 해서 숨어들어 온 자들이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만, 그걸 함부로 누설하는 것은 잭에게도 무리가 따른다.
‘이게 대답을 안 하네?’
오른손을 빙글빙글 돌리자, 어둑한 뒷골목에서도 날이 바짝 선 검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잭의 눈이 그리로 향하자, 에스페란사는 보란 듯 자기가 밟고 있던 건달의 팔에 검을 박아 넣고 비틀었다.
“으아아악!”
얌전히 누워 있던 건달이 비명을 질렀다. 에스페란사는 발로 그의 입을 뭉갰다.
“잭, 모르니?”
잭은 무슨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에스페란사가 한 번 더 위협하려던 찰나, 길 반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저쪽이다!”
도망간 놈이 있었나? 아니면 멀리서 누가 보고 패거리를 불러 왔나? 수가 너무 많았다. 서른 명 정도는 너끈한 에스페란사도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데다 전부 무기를 들고 있는 왈패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검을 거두었다.
다 죽이는 건 마력 없이도 가능하다. 하지만 저 정도 되는 쪽수에 전부 무장 상태라면 이쪽도 약간의 부상 정도는 감안해야 한다. 그런데 심지어 지금처럼 무장 해제만 시키려고 한다면? 기껏 차려입은 드레스가 걸레짝이 될 것이다.
“다음에 보자. 아, 말하면. 알지? 너 찾아오는 것 정돈 일도 아니야.”
뭉개 놓은 건달의 입을 한 번 더 밟아 준 에스페란사는 훌쩍 멀어졌다.
“저년 잡아!”
서른 명 남짓 되는 동료들의 몸을 밟고 가느라 왈패들이 지체되는 사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13년 후나 지금이나, 뒷골목 인간들은 발전이 없구나.”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건가? 기껏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