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시더는 궐련에 불을 붙이며 생각에 잠겼다. 파오란 연기가 창문으로 흩어졌다. 마치 사냥터에 피운 모닥불 연기처럼.
아버지는 사냥철이면 집을 떠나 사슴이며 여우를 잔뜩 사냥해 오곤 했다. 귀부인 그 자체인 어머니는 번번이 질색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후계자란 이유로 열세 살 때부터 징발당한 시더는 사냥 자체에 흥미가 없었던 고로 늘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막아 주는 시늉을 하던 어머니는 자기만 살겠다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 해는 시더가 사냥에 끌려다닌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그쯤의 그는 성인 남자 평균을 훌쩍 뛰어넘은 키와 사냥꾼의 아들다운 체격을 갖추었으나 사냥 성적에 무관심한 티를 숨기지 않는 열여섯 소년이었다. 회색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아버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네 엄마 털 코트라도 한 벌 해 주려면 뭘 잡아야 하려나. 담비?”
담비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는 태도와 달리 총을 드는 자세에는 군인 출신다운 절도가 있었고, 진지한 눈을 빛내는 옆모습에선 20년 전, 등장만으로도 사교계를 뒤집어 놓았던 미모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관객은 그저 심드렁히 이 지루한 여행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뭘 해 주셔도 안 입으실 텐데. 그냥 입고 싶으신 거 사 입으시게 두세요.”
“네 엄마가 자기 옷을 사 입기나 하냐? 늘 멀대 같은 하녀들 인형 놀이 옷이나 사들이지.”
“그게 어머니의 취미니까요.”
“별게 다 취미다. 쓸데없이.”
시더는 아버지의 취미도 그다지 생산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눈치 좋게 입을 닫았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생산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배려 아닌 배려였다.
“어머니는 당신께선 키가 작고 뚱뚱해서 어떤 옷도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네 엄마가 뭐가 어때서? 그 멀대 같은 하녀들보단 훨씬 낫구만. 그럴 시간에 자기 옷, 자기 보석이나 더 챙길 것이지.”
아버지의 가장 큰 문제는 그 말을 당사자가 아니라 애먼 아들을 붙잡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가 싫어하시는 사냥을 하겠다고 한 달씩이나 나와 계시잖아요.”
‘저까지 끌고.’
소년은 불만을 우겨 넣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몸을 젖히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사냥 핑계로라도 나와 있어야 네 엄마도 그 쓸모없는 취미 생활이든, 너절한 양반들 모임이든, 마음껏 하지 않겠냐?”
그런가? 아버지는 속없는 바보 같다가도 예리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예리한 듯하다가도, 결국 중요한 것은 놓쳐 버리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냥에 성공한 아버지가 뿔이 멋진 사슴을 해체해서 머리는 박제 장인에게 넘기고 가죽을 벗겨 돌아왔을 때는 전염병이 리튼 전역을 휩쓸고 간 후였다. 에이번데일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원래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더욱 쇠약해져 그 후 한 달도 더 살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로만 가득한 애정사였다. 취미 핑계로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전부였던 아버지의 애정은 끝까지 어머니에게 닿지 않았다. 사교계 최고의 인기인이었다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그럴 만도 했다. 어머니인들 그게 애정인 줄 알았겠는가? 알아주길 바랐다면 티를 냈어야지.
아버지도 죽어 가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좀 더 티를 낼 걸,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어머니가 앓던 한 달 내내 후회했을 것이다. 문제의 사슴 박제가 등장한 건 어머니가 죽은 바로 그 날이었다.
시더 클라이번의 평온하고 굴곡 없는 인생에서 가히 최악의 날이었던 그 새벽.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오래된 저택의 창문은 쉴 새 없이 덜컹거리고, 아직 어린 심장을 가진 소년은 저택 안을 가득 채운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
어머니는 그 날 해가 뜨기 전에 숨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을 때, 아버지가 장인에게 의뢰한 사슴 박제가 도착했다. 마치 어머니와 박제를 바꾼 것처럼.
우연의 일치였다. 그러나 마음을 다친 사람에게는 작은 우연도 운명과 같이 절대적이다. 저 흉한 걸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 버리라고 울부짖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그 날 처음으로 파오란을 입에 대 봤다. 지금처럼 어둑한 하늘을 보고 앉아서 혼자 불을 피웠었다. 파오란 한 대를 다 피운 후에는 연구소로 들어가 새 연구를 준비하며 머리를 비웠다. 어머니가 앓던 한 달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한 탓인지 생각보다 금방 괜찮아졌다.
그리고 한 번 해 봐서인지 4년 후, 아버지의 죽음은 파오란 한 대로 깔끔하게 극복했다. 아버지가 알았다면 차별하는 거냐며 사냥터로 질질 끌고 갔겠지만, 돌아가신 분이 뭘 알겠는가?
사슴 박제를 본 자리에서 이런 얘길 구구절절 늘어놓았다면 에스페란사는 그가 상처라도 받았을까 봐 눈치를 살피다가 약한 척을 하면 금세 품을 내어줬을 것이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에스페란사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많이 물러졌으니까.
하지만 그의 성장 환경은 특별히 부족한 점이 없었다. 그는 그저 평균보다 조금 더 목적 지향적인 인간일 뿐이고, 그건 전적으로 유전이다. 요즘은 드물게도 과정을 즐기고 있지만.
에스페란사를 즐겁게 해 줄 만한 파괴적인 일화가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시더는 연기 한 모금 마시지 않은 파오란 궐련을 대충 비벼 껐다. 이까짓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 복도를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밖의 발소리.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그러나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는 독특한 리듬. 어딜 가는 걸까.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 * *
자정이 되자, 에스페란사는 조용히 등불 하나만 들고 문을 나섰다. 덴버 부인에게 미리 받아 놓은 스페어 키가 손 안에서 짤랑거렸다.
‘아버지랑 닮았다고 했었지.’
외부에 공개된 의전실과 연결되어 있는 홀에는 초상화뿐 아니라 여러 거장들의 그림과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역대 백작과 백작 부인들의 초상화는 그중에서도 홀 한쪽 벽을 따라 걸려 있었다. 고작 열세 명의 백작과 그보다 네 명 많은 백작 부인. 후계자가 아닌 자녀들의 초상화는 없었다.
1대 에이번데일 백작이라고 적힌 명패에 노란 불빛이 드리웠다가 매정하게 사라졌다. 그로부터 열 개의 초상화를 지나치는 동안 두 명의 시더 클라이번을 더 만났다. 그리고 12대 에이번데일 백작, 모리스 클라이번의 초상화 앞에 섰다.
가까이서는 크기 때문에, 멀리서는 밝기 때문에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에스페란사가 어렴풋이 윤곽만 보이는 그림을 좀 더 제대로 보기 위해 등불을 높이 든 순간, 별안간 홀 전체가 환해졌다.
샹들리에마다 불이 들어왔다. 대낮처럼 밝아진 홀 한가운데, 에스페란사는 등불을 어정쩡하게 든 손을 내렸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드디어 초상화의 모습이 온전하게 눈에 들어왔다.
“……와, 진짜 잘생겼다.”
“뭐라고요?”
성큼 다가온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앞을 가리고 서서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가볍게 뒤로 물러나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짜 잘생겼어요.”
“저 사람 우리 아버지예요.”
“그러니까요. 당신이랑 닮았는데, 진짜 똑같이 생겼는데…….”
그런데 진짜 잘생겼다. 홀릴 것 같았다.
“저 때 이미 마흔이었다고요. 당신, 분명히 마흔 넘은 남자랑 엮이기 싫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누가 엮이겠대요? 근데 진짜 잘생겼어요.”
세 번째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시더가 신경질적으로 에스페란사의 눈을 가려 버렸다. 커다란 손이 얼굴을 완전히 덮었다.
“보지 말아요.”
“아, 왜요? 초상화 보려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는데.”
“기분 나빠요.”
“비켜 봐요.”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리고, 혹시나 다시 눈을 가릴까 두 손을 모아 쥔 다음 그림에 시선을 주었다.
“진짜…….”
“잘생겼단 얘기 한 번만 더 해 봐요.”
마흔이 넘었다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서른 중반 정도로 보였다. 같은 얼굴로도 시더 클라이번은 우아하면서도 묘하게 사악한 눈빛을 지닌 신사 같았고, 그의 아버지는, 실례가 아니라면, 백치미 금발 미남 같았다.
소품으로 짐작건대 키는 거의 2m 가까이 되어 보였고, 팔다리가 근육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시더의 체격이 유지되는 건 어디까지나 유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중세 기사 같은 몸에 그늘이라곤 하나도 없는 새파란 눈동자. 자신만만한 미소.
“웃는 건 당신 닮았어요.”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한 웃음이 똑같았다.
“어떤 분이었어요?”
“왜요, 관심 있나 보죠?”
삐딱한 반문이 돌아왔다. 에스페란사는 혀를 찼다. 관심은 있었다. 물론 그런 의미의 관심은 아니고. 시더 클라이번의 아버지에 대한 관심이었다.
어디까지나 일반론에 의거해 말하자면 원래 천재는 키우기 어렵다. 인지발달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시피 한 이 시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혹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천재의 불우한 어린 시절 같은 걸 생각했다면 틀렸어요.’
이런 얘기를 했던 걸 보면 시더는 운이 좋은 축이었던 것 같다. ……아닌가? 박제를 덮어 버리던 시더의 눈빛이 떠오르자 확신이 조금 옅어졌다.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얘기는 거의 못 들은 것 같아서요.”
어머니 얘기도 옷장과 보석을 떠넘기면서 지나가듯 한 말뿐이었지만.
“평범했어요. 젊었을 땐 사교계에서 좀 유명했던 모양이고, 결혼한 뒤에는 얌전한 남편으로 살았고. 나보다야 영지나 의회 일에 열심이었고, 사냥광이고.”
“당신을 끌고 사냥을 나가고요?”
“아버지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죠. 상대방이 기꺼워하지 않을 방식으로 표현하는 애정이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시더는 사슴 박제를 떠올리며 한 말이었으나, 에스페란사의 눈은 매정한 아들에 대한 비난을 가득 담고 가늘어졌다. 시더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며 가볍게 웃었다.
에스페란사는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전대 백작의 눈부신 초상화 옆, 수수한 여자의 초상화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에밀리아 플로렌스 클라이번. 시더의 어머니일 것이다.
시더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왜소하고 통통한 몸매나 맑고 선량하지만 특색 없는 얼굴 그 어디에서도 흠결 없이 아름다운 시더 클라이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명한 회색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초상화 속에서도 짓궂은 빛을 내는 눈동자.
내기 포커판, 이상한 취미,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
에스페란사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고, 바로 옆에 선 남자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무심한 얼굴로 자기 어머니의 초상화를 같이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빙그레 웃음 짓는 그 한 쌍의 회색 눈동자를.
그의 눈동자는 어머니의 것을 빼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