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다시 보니 정말 예쁜 눈이었다. 그리고 왠지 잘못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눈이기도 했다. 그런 점까지 닮았구나.
“눈이 똑같네요.”
“그런가요?”
“네. 정말 똑같아요.”
시더는 기뻐하지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과 닮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비슷한 얼굴일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찡그리며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조명에 세심한 신경을 쓴 덕에 대낮처럼 밝은 갤러리 안에서 그의 눈은 정확히 초상화 속 여자의 눈과 같은 빛을 띠었다.
“혹시 어머니랑 닮았다는 말, 별로인가요?”
“아뇨, 별생각 없어요.”
시더는 천천히 초상화에서 시선을 뗐다. 건조한 목소리였다.
“사실 저 초상화는 내 기억 속 어머니와 별로 닮은 것 같지 않아서 낯설어요.”
“그래요?”
“초상화가 좀 더 미화된 편이죠. 아버지도 그렇고.”
그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초상화까지 도매급으로 팔아 버렸다.
“뭐, 초상화가 알아볼 수만 있으면 됐죠.”
필터와 보정이 만연하던 세계에서 살던 에스페란사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초상화의 기능을 증명사진 정도로 본다면, 에스페란사의 여권이나 면접용 사진도 그다지 본인과 닮지는 않았었다.
‘원래 그런 거지, 뭐. 사진이 알아볼 수만 있으면 됐지 똑같을 필요까진 없잖아.’
그리고 에스페란사는 몇 걸음 더 옆으로 걸어서 13대 에이번데일 백작, 시더 클라이번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눈이 샐쭉해졌다.
아, 그래. 본인은 미화 없이도 예쁘다 이거지.
시더는 여전히 어머니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낯선 것을 보는 듯이. 하지만 낯선 것은 초상화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와 어머니는 성격은 비슷하고 성향은 정반대였으므로. 애초에 서로 맞춰 가며 어울릴 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어머니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전혀 아니다. 모자 관계는 싸울 일도, 기분 상할 일도 없이 평탄했다.
어머니는 모성애가 강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시더는 그런 어머니에게 만족했다. 어설프게 불쾌한 방향으로 튀는 모성애보다는 적절한 수준의 애정이 그를 단단히 키웠다.
어쨌든 그의 부모는 그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너무 비범한 나머지 살짝 악마의 씨앗 같기도 한 아들을 그럭저럭 멀쩡하게 키워 냈다. 약간의 방임과 적절한 수준의 훈육으로.
어쩌면 키우다 보니 기준이 살짝 이상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오차 범위 내였다. 쏟아지는 염려와 관심을 좀 더 즐기고 싶지만,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스페란사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반년 동안 부모님 얘기를 들은 적이 없잖아요. 그래서 사이가 별로 안 좋았겠거니 했나 봐요.”
그렇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시더는 픽 웃으며 답했다.
“평범하게 서로 데면데면한 부모님 사이에서 평범한 훈육을 받으면서 평범하게 컸어요.”
평범하게 서로 데면데면하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 시대 귀족 부모라는 게 다 그렇다고 친다면…….
‘그런데 당신은 왜 이 모양이지?’
양육에도 문제가 없다면 대체 어디서부터 엇나가기 시작한 거야?
“그 무례한 시선은 뭐죠?”
말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본인도 뭐가 문제인지는 아는 모양이지.
에스페란사는 아직도 만난 지 하루 만에 대뜸 피를 달라고 하던 시더 클라이번을 기억하고 있었다. 애초에 총 들고 들어온 사람을 자기 집에 재우는 것도 이상했고. 자세히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끝도 없었다. 하지만 그 호의 아닌 호의 덕에 모든 것이 보다 순조로워진 것도 사실이다.
“당신이 이상한 사람이라서 나한텐 다행이죠, 뭐.”
시더가 다시 웃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초상화를 한 번씩 더 보고 밖으로 나왔다.
등불 하나에 의지해 돌아가는 길이 스산했다.
외부인들이 곧잘 드나드는 외부 예식 홀에는 촘촘히 가스등을 설치해 두었지만 사는 사람에 비해 방이 수십 배나 많은 저택 전체에까지 가스등을 설치할 이유는 없었다.
백작이 쓰는 메인 아파트먼트는 3층 동쪽 복도에 위치하고 있었고, 거기까지 가는 데 거쳐야 하는 복도와 계단의 구조는 가스등 없이 걷기엔 꽤 복잡했다.
에스페란사는 둥근 빛의 구를 몇 개 더 동동 띄웠다.
“잘하네요.”
“이런 눈속임밖에 못 해요.”
“남들은 그것도 못하죠.”
그렇긴 했다. 오직 이것 하나만으로도 어디 가서 먹고살 걱정은 없을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잔웃음을 터뜨리며 빛의 색깔을 마구 바꿨다. 선이 날렵하고 우아한 뺨 위에 온갖 색깔의 빛이 번쩍거렸다. 시더는 결국 찡그리며 눈을 가렸다.
“적당히 하는 게 어때요? 누가 보면 유령인 줄 알겠어요. 안 그래도 밤에 이 근처 복도에서 유령 때문에 하녀들이 기절하는 일이…….”
에스페란사가 불을 뚝 껐다. 그리고 사뭇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난 귀신 얘기 싫어요.”
“아. 그래요?”
“들으면 잠을 못 자요.”
처음 듣는 얘기였을 것이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헌터 에스페란사의 흔치 않은 약점이니까. 스플래터는 잘 보는데 호러에 약하다.
“저런. 오늘 좀 무섭겠어요. 죽은 사람 초상화도 봤겠다, 귀신 얘기도 들었겠다.”
어느덧 도착한 에스페란사의 아파트먼트 문을 가리키며 시더가 느긋하게 말했다.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가 통로 안쪽의 침실까지 가는 길에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하나 있다. 에스페란사는 조용히 동그란 빛 덩어리를 두 개 더 띄웠다. 시더는 나직이 혀를 찼다. 에스페란사의 잠 못 드는 새벽이 눈에 뻔히 보인다는 듯이.
“정 못 자겠으면 서재로 와요. 다른 건 못 해 줘도 밤새 체스 정도는 둬 줄 수 있어요.”
체스 둘 줄 모르는 거 뻔히 알면서.
“마음은 고맙지만 됐어요. 나야 낮에 자도 되니까.”
“남은 한참 연구하는데 옆에서 잘까 봐 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등 뒤로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렸다. 정갈한 작은 거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머리 너머로 거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턱 밑에서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였다.
“왜 그래요? 이 방 처음 보는 것처럼.”
“처음 봐요.”
“……전 백작 부인의 방이라던데?”
잠깐 아리송한 얼굴을 했던 시더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곤란해 보이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다.
“백작 부인의 방이었다면, 내 침실과의 사이에 문이라도 있었겠죠.”
멈칫했던 에스페란사가 말뜻을 깨닫고 눈을 피했다. 문의 용도는 말 안 해도 뻔했다. 뺨이 달아올랐다. 시더는 짧게 웃었다.
“엄연히 말하면 백작 부인의 방은 아니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약혼자로서 방문했을 때 쓰던 방이에요.”
시더는 잠깐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에 대고 덧붙였다.
“당신이 그럴까 봐 말 안 했어요.”
에스페란사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씁쓸한 기색은 사라지고, 그는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그런데 내 배려가 당신의 불온한 상상을 부추겼나 보네요.”
“불온한 상상이라니, 그냥 물어본 것뿐이잖아요.”
에스페란사가 소리치듯 속삭이며 항의했다. 혹시 시더가 감당이 안 되는 방을 안겨 준 건 아닌지, 난감하고 부끄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쳐요.”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없었다니까요.”
“자, 그럼 당신의 불온한 상상을 끌어안고 이만 자러 들어가요.”
시더는 정말로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한 번 뒤돌아보는 법도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억울한 맘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삐죽이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역시 이 상황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건 에스페란사뿐인 것 같았다.
* * *
시더의 연구가 시작된 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달이 바뀌고도 며칠이 더 흘렀다.
그동안 시더와 에스페란사가 주로 시간을 보냈던 곳은 고풍스러운 글라일리 하우스가 아니라 숲길을 30분이나 달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연구소였다.
[어서 오십시오.]경비원 오토마톤이 몸을 삐걱삐걱 숙였다. 에스페란사가 그들을 멀뚱히 보다가 시더를 향해 물었다.
“쟤들은 왜 허리 숙이는 기능이 있는 거예요?”
굳이 기계에게 인사를 받고 싶어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만들 때 그런 걸 연구 중이었어요. 생각보다 관절 재현하는 게 쉽지 않아서. 시중 의족이나 의수를 가져다 비슷하게 만들어 보기도 했는데 재질은 그냥 깡통 같은 게 제일 편하더라고요.”
“아, 그래서 쟤들이 다…….”
깡통이구나……. 그러고 보니 정말 깡통 같기는 했다. 때리면 깡깡 소리가 날 것 같고. 정확히는 알루미늄이나 그 비슷한 계열인 것 같은데, 자세히 설명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럼 내 것도 깡통이에요?”
“글쎄요. 비행용에 전투용이니 가벼운 게 좋을 텐데, 저건 생각보다 무거워요. 마정석 무게를 빼더라도. 일단 두고 보죠.”
확실히 그는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천장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증기 기차 모형은 미리 입력된 단어가 들어 있는 책을 바닥에 한가득 쌓아 놓고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할 일이 없어서 옆에서 책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런데 난 왜 여기 와 있어요?”
“자기 발로 따라왔으니까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시더가 대답했다. 에스페란사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나한테 시킬 일 있어요?”
분명 도와달라고 해 놓고, 이 보름간 시더는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 언제 필요할지 몰라 밖으로 나다니는 대신 연구소를 지키고 있었던 에스페란사로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시더는 ‘오늘도 없다고 말만 해 봐라’ 하고 벼르는 눈빛을 마주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은 없어요. 음, 끝 방으로 가면 프로토타입이 있을 텐데 그거 한번 들어 봐 줘요. 크기랑 무게만 맞춰 봤어요.”
“줄여 준다면서요.”
“네. 하지만 지금은 아니고.”
줄여 준다고 했으니 줄여 주긴 하겠지. 에스페란사는 책장에서 용케 청소년용 마도 공학 책을 발견하고 소파 위에 자리를 잡으며 생각했다.
또 그런 식으로 며칠이 꼬박 흘러갔다. 서재 바깥에서 의미 모를 뚝딱거리는 소리가 나고, 책과 종이만 가득하던 시더의 책상에 마력판과 회로가 올라왔다. 에스페란사가 그 위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시더는 마력의 흐름을 관찰해서 또 뭔가를 뚝딱거렸다. 그렇게 몇 번이고 내부 구조를 고치는 동안 빈 프로토타입 날개도 재질을 몇 번 고쳐서 다시 만들었지만, 크기는 똑같았다.
‘저 사이즈라면 어디에도 안 들어갈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저걸 등에 메고 골목길을 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메기만 해도 기동력이 떨어질 것 같은 크기인데. 심지어 무겁기까지 했다. 에스페란사가 메고도 뒤로 휘청거릴 수준이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누워서 옴짝달싹도 못 했을 것이다.
“에스페란사, 할 일 없으면 그쪽 좀 잡아 줄래요?”
시더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드레스 자락에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얇은 파이프를 고정했다. 에스페란사는 날개 끝을 붙잡고 그의 손끝이 능숙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했다.
발로 앞부분을 누르며 가운데 부분의 회로를 고치는 손은 구조도를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는 것 같았다.
“이대로 끝이에요?”
“멀었어요. 이건 그야말로 기본적인 구조일 뿐이고, 중심 기술은 아직 구현이 안 됐으니까.”
기계 장치에서 손을 떼고 태엽을 감아 보던 시더가 말했다. 에스페란사는 시키는 대로 날개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슨 신기술 개발을 열흘 만에 뚝딱 해내려고요?”
“당신을 만난 직후부터 개발 중이었어요. 마침 쓸데가 생겼을 뿐이지.”
하긴, 아무리 이런 오버 테크놀로지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열흘 만에 없던 기술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에스페란사가 피식 웃자, 시더는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열흘 만에 못한다곤 안 했어요.”
“아, 네에.”
“못 믿나 보죠?”
시더가 의심 섞인 눈으로 에스페란사를 흘겼다. 예의와 진심 사이에서 갈등하던 에스페란사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