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아, 이거 뒤집으면 돼요?”
잠시간의 침묵 후 날개를 가리키며 말을 돌리자, 시더는 못 이긴 척 대답했다.
“날카로우니까 조심해요.”
날개 한쪽이 팔 한 짝보다 더 길었고 전부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정도 크기의 날개 한 쌍이 이어진 기계를 땅에 부딪지 않고 혼자 깔끔하게 뒤집기란 쉽지 않았다. 기계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에스페란사는 팔에 슬쩍 마력을 불어넣었다.
“무거우면 그냥 둬요.”
마력에 예민하게 반응한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시더는 에스페란사를 기계에서 떼어 내 근처 의자에 앉혔다.
생각 의자도 아니고, 이게 뭐람.
에스페란사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서 시더가 스위치보드를 누르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이것보다 더 큰 기계들도 많던데, 나 없을 때는 어떻게 옮겼어요?”
“당신은 별로 도움이 안 됐어요.”
시더는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는 톱니바퀴를 아예 다른 것으로 바꿔 넣으며 말했다. 에스페란사가 그를 불만스레 노려보았다.
하다못해 만화 속에 나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들도 조수가 있다. 보통 멍청해서 툭하면 괴팍한 스승에게 깨지는 역할이었던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그 폭탄 머리들도 석사생인지 박사생인지 모를 사람들을 조수로 데리고 다니는데 왜 시더 클라이번은 모든 걸 혼자 하고 있느냔 말이다.
“옛날엔 밀런이 도와줬고……. 아, 지금 있는 밀런 말고 그 형이요.”
“형은 어떻게 됐어요?”
“전염병으로 죽었어요.”
“……아.”
“지금 밀런은 몇 번 시켜 봤는데 영 못하길래 그냥 자동화하기로 했어요.”
시더가 스위치보드에서 뭔가를 더 누르자 벽이 열리며 황동빛 기계 팔이 나타났다. 천장에서 긴 파이프가 내려와 증기를 빨아들이고 공기를 뱉었다.
기계는 정말로 일을 잘했다. 멍하니 지켜보던 에스페란사는 기계가 지나갈 수 있게 의자에 발을 올리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똑똑한 기계님들이 편히 일하실 수 있게 이 연구실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공간이라도 줄여야 할 것 같았다.
“저렇게 일 잘하는 기계를 두고 왜 일일이 손으로 하고 있었어요? 도움도 안 되는 나는 왜 불렀고.”
조금 심통이 난 것을 알아챘는지 시더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당신이 할 일 없이 노닥거리고 있으니까요.”
“아, 네.”
K22
“얼굴 볼 핑계도 되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쪽 좀 봐주지 않을래요?”
또다. 또 이런 정적. 또 이런 기분. 시더는 저런 말을 참 쉽게도 하고, 그걸 의식하는 건 에스페란사 혼자였다. 에스페란사는 무릎에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꺼냈다.
“당신은 대체 날 왜 좋아해요?”
아까보다 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괜한 질문을 했다. 시더는 작업용 장갑을 벗었다. 기계 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대답 안 해도 괜찮아요. 나도 괜한 소리를 한 거 같으니까.”
진짜 그런 말을 왜 했지? 조금만 ‘그런’ 분위기가 되면 어쩔 줄을 모르면서. 감당할 자신도 없는 질문을.
“질문은 멋대로 하면서 대답을 듣기는 부담스러워요?”
시더는 몸을 굽혀 에스페란사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억누른 불쾌감이 느껴졌다. 질문의 무례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소와 같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날 보는 눈을 직접 보면 알 텐데.”
에스페란사의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번쩍 빛을 냈다.
“내가 뭘 어쨌다고요.”
어차피 자기 시선을 직접 볼 방법도 달리 없었다. 에스페란사가 눈을 피하자, 시더는 뺨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금세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마치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그러나 숨이 닿는 거리에서 멈추었다. 엇박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얽혀 어느 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봐요.”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던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시더의 눈에 멈추었다. 깨끗한 눈동자에 에스페란사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다른 것은 이지러져 잘 보이지 않아도 강렬한 보랏빛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린 모양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저게 나라고?’
내가 저렇게 보고 있다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알지도 못했던 치부를 들킨 것 같다. 저렇게 홀린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니.
“직접 보면 알 거라고 했잖아요.”
뺨을 감싼 손길이 떨어졌다.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턱 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에스페란사는 빨갛게 익은 얼굴을 감추지도 못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기만 반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더가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사실 방금 건 그냥 가까이에 있는 걸 보려고 초점이 풀린 것뿐이에요.”
뭐라고?
뜨끈거리던 피부는 핏기가 빠지듯 놀라운 속도로 식어 버렸다. 놀란 심장이 정신없이 두방망이질 쳤다. 진짜인가? 안심 반, 의심 반이었다. 시더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이 빨개진 걸 보면, 내가 이러는 게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죠?”
정말이지 심술도 이런 심술이 없다. 뻔뻔스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그런데 또 심술을 부린다고 부리는 대로 다 당해 주고 있는 꼴은 또 뭔지. 분명 저쪽이 먼저 좋아했는데, 왜 매번 이쪽만 평정을 잃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때마다 스스로를 붙잡아 놓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뭘 어쩌고 싶은 거냐고.
* * *
이렇게 하루 종일, 남의 무신경한 말에 얽매여 기분 나빠 본 적이 없었다.
서먹한 공기가 흘렀다. 저녁이 되도록 말 한마디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필사적으로 시더를 외면하고 있었고, 시더 역시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
진심으로 임할 자신이 없으면 모른 척했어야지.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그저 불쌍한 남자 하나가 우연찮게 홀려서 걸려든 것처럼 순진하게 눈이나 깜박이고 있었어야지. 그렇게 하라고 판까지 깔아 줬는데.
마치 어울려 줄 것처럼 그런 질문을 던져 놓고, 냉큼 꼬리를 빼는 건 비겁하다. 잠깐 치솟았던 화는 눈이 마주치자 금방 가라앉았지만, 그렇다고 속도 없이 아양이나 부리고 싶진 않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조용한 관찰이었다. 에스페란사가 그 시선을 모르지는 않겠으나, 또 고작 시선만으로 속내를 읽어 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마음 편히, 좀 더 불편해하란 뜻으로. 시더는 그를 등진 채 재미도 없는 책장에 집중한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책장에 비스듬히 기대 책을 넘기는 손이 평온했다. 집중하다 보니 애초에 왜 책을 보기 시작했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서렸다. 시더는 고개를 내저었다. 관심의 차이란 이런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자기 혼자만 의식 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는 에스페란사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분해해 분석하고 싶은 한편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온전히 품에 안고 싶었다. 이 이율배반적인 욕망 아래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관찰뿐이었다.
낮게 묶은 풍성한 곱슬머리와 빛이 서린 눈동자. 찌푸려진 콧등과 동그랗게 말린 입술에는 앳된 기색이 남아 있었다.
예쁜 얼굴이었다. 객관적으로도, 이미 객관성을 잃어버린 눈으로도. 하지만 그는 저 얼굴이 더 환하게 아름다워지는 때를 알고 있었다. 마도 공학자들이 끄적거린 지루한 책 따위로는 그 얼굴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그 자신이 그 얼굴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도.
어쩔 수 없지.
‘다리가 다 나은 걸 확인하고 나서 보여 주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이런 충동적인 행동도 이젠 그러려니 한다.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책을 덮자, 시더는 몸을 일으켰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여자의 귓가가 불그스름했다. 시더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생각을 좀 해 봤어요. 결론은, 당신이 너무 심심해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한 박자 늦게 말뜻을 깨달은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지금 그 말 하려고 말 건 거예요?”
우아한 눈매가 빙긋 웃음 지었다.
“내가 그럴듯한 이유로 납득 가게 설명했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사랑에 빠질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물론 아무런 대비책도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으므로 그럴싸한 대답조차 만들어 내지 못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입을 비죽거린 에스페란사가 되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요?”
“그거 놓고, 나와요.”
“결론이 쫓아내는 거예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비슷해요. 자, 어서.”
아무리 그래도 쫓아낸다니. 등이 떠밀려 나가면서도 서운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래?
어어 하고 떠밀리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시더의 서재가 있는 층을 벗어나서, 그들은 1층의 널찍한 홀로 내려왔다. 거기서 복도를 통해 조금 더 걸어가면,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빈 공간이 나타난다. 시더는 바닥에 부착된 긴 레버를 당겼다. 소리도 없이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와…….”
무심코 터뜨린 탄성이 내부를 울렸다. 제법 커다란 강당 규모의 공간. 운동 기구 몇 가지. 벽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놓인 기계들의 정체는 대충 짐작이 가능했다. 맞은편 벽에는 과녁을 단 기계가 놓인 레일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파인먼트 하우스의 던전 이후로 제대로 총을 잡아 본 게 얼마나 오래됐더라?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여길 내가 써도 돼요?”
“당신 쓰라고 만들었어요.”
“진짜로?”
“원래 비어 있던 공간이라 레일 설치하고, 기계만 몇 개 더 추가한 것뿐이에요.”
몇 개는 전에 쓰던 피칭머신과 비슷한 물건이고, 하나는 생김새가 꼭 카메라처럼 생겼다. 거기다 스크린이 달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자세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기계가 아닐까 싶었다. 그것 말고도 세 가지 기계들이 더 있었다. 생긴 것은 투박해도 사람의 조작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최첨단 기계였다.
21세기 태릉이야, 뭐야……?
국가 대표 선수단이라도 이런 호화로운 훈련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뭐부터 써 보지?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지?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마음에 들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엄청 마음에 들죠!”
이것저것 만져 보며 방황하던 에스페란사가 벌떡 일어나면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진짜 최고예요!”
시더의 팔을 꼭 붙든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고. 좋은 점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었다.
“여기서 살고 싶을 정도예요.”
흡. 자기가 한 말에 지레 놀란 에스페란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흥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시더의 팔을 붙잡고 거의 안기다시피 했던 몸도 슬그머니 떨어졌다.
“……그, 미안해요.”
“당신이 날 멋대로 끌어안은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
말문이 막혔다. 그렇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이 정도로 당황스럽지 않았다. 이 혼란스러움과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비추고 있는 것이 상대의 마음인지, 혹은 자기 자신의 마음인지.
시더는 주춤거리는 에스페란사를 당겨 안았다. 등줄기를 완전히 감싸 받친 팔이 허리를 감았다. 심장이 맞닿을 만큼 짓눌렸다.
“자, 여기까진 당신이 멋대로 한 거고.”
“……지금 끌어안은 게 누군데? 왜 내 멋대로가 됐어요?”
그 말을 가뿐히 무시한 시더는 머리 위에 턱을 괴며 말했다.
“내가 사심 좀 섞어서 그걸 받아 준다고 해서 날 비난할 순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