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여기가 어디야……?”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
“왔던 길이 어딘지도 모르겠어!”
길도 모르지, 날은 어두워지지. 게다가 춥고 배가 고팠다. 준비해 온 음식을 먹으며 사냥감을 잡으면 축하 겸 마시려고 가져온 위스키를 뜯어 병나발을 불었다. 식사가 끝났을 때쯤엔 해가 지고 있었다. 말은 어디로 갔는지,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어두운 숲, 맹수 울음소리, 폐가, 소나기까지. 이 위험천만한 곳에 밤늦도록 단둘이 남겨질지도 모른단 공포감이 그들을 덮쳐 왔다. 바짝 오른 술기운을 등에 업고 숲을 마구잡이로 헤매던 그들은 라고 적힌 표지판을 보고도 호기롭게 넘어갔다.
분명 숲 한가운데 있는 집을 발견하고 달려갔던 것 같은데. 사냥터지기의 집이었나? 그러나 그 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제임스 보일은 적당히 손님용으로 꾸며진 방의 침대에 처박혀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요?”
모르는 저택이다. 게다가 잘은 몰라도 규모가 상당히 컸다. 악마에게 납치라도 당한 것 같은 기분에 처음 보는 하녀를 붙잡고 대뜸 묻자, 하녀는 별 웃기는 사람 다 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글라일리 하우스입니다.”
“……여기가?”
리튼 주에서 가장 오래된 저택 중 하나인 글라일리 하우스. 물론 몇 번에 걸친 대규모 보수 공사를 통해 그 세월의 흔적은 거의 지워지고 말았지만, 여전히 그 이름에는 권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 저택은 제임스 보일도 익히 잘 아는 곳이었다. 선대 백작이 살아 있을 때에는 부모님과 함께 두어 번 방문한 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구조가 낯익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지?’
“신사분, 식사가 준비돼 있습니다.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상급 고용인으로 보이는 젊은 하인이 그를 보고 다가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거짓말처럼 배 속이 텅 빈 것이 느껴졌다.
“내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숲속에 쓰러져 계시던 것을 하인 중 하나가 발견하고 데리고 왔답니다.”
하인, 밀런은 태연스럽게 명령받은 거짓말을 말했다. 제임스 보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던가? 아, 내 친구도 같이 있었는데! 혹시 봤나? 더윈 에거튼이라는 이름일세.”
“성함은 모르지만 같이 오신 신사분께선 식당에 계십니다.”
“그래?”
제임스 보일이 반색하며 밀런을 따라갔다. 큰 규모의 만찬을 너끈히 주최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식당이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로 은 촛대 두 개를 놓은 식탁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도 하나하나 입이 떡 벌어지도록 귀한 물건들로만 이루어진 공간.
그 공간에 황송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앉아 있는 더윈 에거튼과, 그를 심드렁히 응시하는 젊은 미남자가 있었다.
이런 대저택의 주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젊었다. 곱상하다 못해 화려한 미모 탓에 얼핏 어리게까지도 보였다. 그러나 적당히 편안한 차림과 고용인들의 조심스러운 태도, 그 자리에서 태어난 것처럼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모양을 보면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글라일리 하우스의 주인. 에이번데일 백작. 아마도 선친이 작고한 후 작위를 이어받은 그의 아들일 것이다.
“보일 씨로군요.”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임스 보일은 황급히 인사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임스 보일이라고 합니다. 백작님의 사유지에 무단으로 침입한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술에 취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혹시 저희가 훼손한 것이 있다면 보일가로 청구서를 보내 주십시오.”
“그렇게 하죠.”
한 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아예 집사에게 청구서를 보내라고 당부를 해 두기까지 한다. 제임스 보일은 약간 기가 질린 채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리고, 불청객을 환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백작은 귀찮은 기색이 슬쩍 드러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곤경에 빠진 이웃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당연한 일을 하면서 왜 저렇게 기분 나쁜 얼굴인지.
“무엇보다, 보일 씨야 멀쩡하시지만 친구분은 상태가 영 안 좋으셔서.”
더윈 에거튼이 멋쩍은 얼굴로 다리를 슬쩍 걷었다. 붕대를 둘둘 감아 놓은 다리에 피가 배어 있었다.
“나무에 긁혔었나 봐”
시더는 슬쩍 눈을 피했다. 말에 대충 쌓아서 데리고 오다가 한 번 떨어뜨렸다는 건 비밀이었다. 목숨값으로 그만하면 싸게 먹힌 셈이니 실수로 좀 긁었더라도 뭐라 하기야 하겠느냐마는.
“밀런. 에스페란사는?”
“아직 안 일어나신 모양입니다.”
못마땅한 눈동자가 두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특별히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나란히 흠칫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보일 씨, 집사가 댁에 연락을 해 두었으니 오후 내로 마차가 올…… 에스페란사.”
눈을 비비며 식당으로 들어온 에스페란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간소한 모닝 가운 차림이었다. 처음 에이번데일 저택에 떨어졌을 때는 꼭꼭 성장을 하던 것이 편해졌다고 조금씩 풀어지더니 이젠 격식을 지켰다고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아, 맞다. 손님이 있었지.”
에스페란사는 대강 인사하고 시더의 옆자리에 앉았다.
“숙녀분께서는?”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 내 약혼녀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에스페란사는 휙 돌아가려는 고개를 애써 고정하고 식탁 아래에서 손끝으로 시더의 무릎을 건드렸다.
말뜻이 뻔히 전해졌을 텐데, 그는 그 손을 붙잡고 손장난이나 쳤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의 피후견인 설정은 어디로 가고?
“약혼녀, 아, 그러셨군요.”
“그렇게 됐죠.”
소개 아닌 소개가 끝난 후, 시더는 말을 돌려 버렸다. 물론 에스페란사가 항의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두 분은 어쩌다 그런 곳에 쓰러져 계셨는지?”
두 사람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게, 그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장은 시작도 못 하고 얼버무리는 말만 잔뜩 쏟아 냈지만 상대로부터는 ‘불편하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는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사유지에 총을 들고 난입했으니 할 말도 없었다.
“사냥을 하다가…….”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아무 생각 없다가도 남에게 말하려고 입만 떼면 걷잡을 수 없는 수치심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정작 일을 벌일 때는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수치심이, 그때야 한꺼번에 밀려온다.
“예, 사냥을 하다가 소나기가 와서, 비를 피하다 보니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맹수 소리가 떼로 나질 않나 웬 폐가가…….”
“거긴 사냥터가 아닌데.”
식기를 내려놓은 시더가 턱을 괴며 물었다. 그사이 에스페란사는 잡힌 손을 빼내려고 팔을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단단한 손마디가 아예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이가 없어서.
“예?”
“그 숲은 사냥터가 아닙니다.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사냥터로 썼지만, 관리를 안 한 지 오래됐죠. 게다가 두 분끼리만 오시다니, 길잡이는?”
“아,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죽으려고 작정했나 봐.
에스페란사가 인상을 찡그리자 시더가 달래듯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이 사람들, 연구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살아 있었던 게 용할 지경이다.
관리도 안 된 숲을 초행길에, 사냥 경험도 없는데 길잡이도 없이, 심지어 말도 버리고 다녔다고? 게다가 총은 한 번에 몇 발 쏠 수도 없는 구식이고. 장전도 불편하고. 그런데 이 꼴로 나오는 걸 주변의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니.
“그런데 말은 어디에다 두시고 두 분만 다니셨어요?”
“말은, 그게, 끌고 왔었는데 말입니다. 잘못 묶어 놓는 바람에.”
자기가 생각해도 창피한지 말끝이 기어들어 갔다. 그 꼴을 보는 에스페란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무리 기가 막혀도 싫은 소리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말이 사람을 버리고 도망가기라도 했다고요? 대체 말을 어떻게 몰았길래?”
“그,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아…….”
에스페란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는 기껏해야 스물 초반으로 보이는 애송이들이 경험도 능력도 없으면서 정신 나간 짓을 잘도 해댄다. 아예 어린 애들보다 이런 애들이 더 위험하지. 오죽하면 던전에서 제일 잘 죽는 민간인이 20대 남자 귀족이란 소리가 있었겠는가.
그런 주제에 술이나 처먹고 얼마 없는 탄알을 허공에 허비하질 않나. 시더가 그 숲에 연구소를 짓지 않았다면 이 두 사람은 어제 죽었을 것이다.
식탁 위의 유일한 숙녀가 한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더윈 에거튼과 제임스 보일은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다가 그 숙녀의 약혼자인 에이번데일 백작에게 닿았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좀 해 보란 간절한 시선에, 시더는 넌지시 물었다.
“다 좋은데, 내 사유지라는 표지판이 있었을 텐데요? 표지판을 못 봤나요?”
우리를 희생하란 뜻은 아니었는데. 청년들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게, 저희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표지판이고 뭐고 눈길도 안 줬던 선명한 기억을 애써 무시하며, 제임스 보일이 딱딱하게 말했다.
“흐음.”
사실 백작의 사유지에 총을 들고 멋대로 침입했으니 복잡하게 가자면 경관을 부르고 소송까지도 갈 수 있는 문제였다. 지금의 태도를 봐선 그렇게까지 일을 크게 만들 것 같지는 않았으나, 또 모르는 일이다. 보기에는 세련된 나인 호더 신사 같아도 에이번데일 백작은 유명한 괴짜였다.
‘말이 좋아 괴짜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잖아.’
그런 양반이 어쨌거나 이 근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지라는 것도 문제였다. 무슨 일이 터지면, 누구도 그들의 편을 들어주진 않을 테니까. 제임스 보일은 불안한 눈으로 에거튼을 흘끔거렸다.
“그, 그럼. 저희는 잠시, 파오란이라도 피우러 가 보겠습니다.”
“응접실에서 뵙죠.”
거기까지 생각한 두 사람이 도망치듯 사라지고, 잠시 후 느긋이 식당에서 나온 에스페란사가 따라 일어선 시더를 돌아보았다. 평소엔 남의 일에 그렇게 무관심한 사람이, 오늘은 에스페란사 못지않게 심술을 잔뜩 부렸다.
“파오란 피우러 안 가요?”
“줄이는 중이에요.”
금연을…… 하는구나?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 없어요. 조금씩 줄이고 있었으니까.”
“아, 그래요?”
“네, 그래요.”
별것도 아닌 말장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굳어 있던 어깨가 부드럽게 풀렸다.
“기분이 좀 나아졌나 보죠?”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오늘 심술을 엄청나게 부리던데요.”
“불청객이 반가울 사람은 없죠. 게다가 남의 사유지에 무기까지 들고 나타난 침입자라면 더더욱.”
아.
‘남의 사유지에’ ‘무기까지 들고 나타난’ ‘침입자’이자 ‘불청객’이 입을 다물었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신고 안 해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런데 우리 응접실에 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불청객도 손님은 손님이니 말이다. 주인으로서 시더는 그들을 즐겁게 할 의무가 있었다. 그가 그 의무에 충실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눈 가리고 아웅 정도는 해야 한다. 아무리 괴짜라 소문이 났다 해도, 그 소문이 그를 사회적 의무에서 자유롭게 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이 걷는 방향은 응접실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시가룸에서 적어도 30분은 있을 테니까 그때까진 자유예요.”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건데요?”
“좀 더 밝고 기분 좋은 곳.”
그게 어딘가 했더니, 정원이었다. 거울처럼 반드르르한 호수가 보이는 정원.
“여기까지 온 건 작전 회의가 필요해서인가요?”
시더가 말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모른 척하기는. 에스페란사는 바람에 풍선처럼 부푼 치맛자락을 쥐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왜 당신 약혼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