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거기엔 아주 중요한 사정이 있죠.”
마치 긴 이야기를 시작할 것처럼 말끝이 길어졌다. 아하…… 별거 아니었군. 에스페란사가 코끝으로 웃었다.
“먼저, 피후견인 설정은 여기선 안 먹혀요.”
그럴 거면 애초에 피후견인 설정은 왜 한 거람.
물론 그때는 백작께서 난데없이 뚝 떨어진 미래의 인물에게 그 정도 강도의 신원 보증을 해 주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무엇이 다르냐고 하면, 글쎄. 에스페란사는 답을 유보하기로 했다.
“리튼은 보수적인 지역이에요. 이곳의 사교계는 폐쇄적이고, 나인 호더보다도 신분과 예의에 까다롭죠. 또래의 피후견인? 리튼 사람들은 속는 척도 안 해 줄걸요.”
이해는 간다. 나인 호더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좁고 보수적인 지역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볼지는. 붙어먹었다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그걸 어떻게 그럴싸하게 포장하느냐만 남았을 뿐이다. 나인 호더에서도 대충 기정사실이긴 했겠지만…….
“당신은 괜찮겠어요?”
시더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이런 소문이 누구를 더 다치게 하는지 알잖아요.”
일방적이고 무례한 파혼서를 보낸 던바틴 공작과 말도 안 되는 사유로 파혼당한 코델리아 중 누가 더 크게 다쳤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시더는 양손으로 에스페란사의 턱을 부드럽게 쥐고 들어 올렸다. 새삼 이런 손길이 거북하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난 당신의 평판을 걱정하죠.”
에스페란사가 멈칫한 사이, 시더는 나무라듯 덧붙였다.
“자기 평판에도 관심 없는 누구와는 달리.”
“관심 없는 건…….”
“맞잖아요.”
“맞지만.”
여기서 좋은 평판을 쌓아 봐야 돌아가면 다 쓸모없어질 텐데 굳이 어려운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잖은가. 에스페란사도 물론 상대의 호의적인 반응을 선호하지만, 그런 욕구는 때에 따라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신사와 숙녀의 처지가 그토록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서 평판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에스페란사가 아니라 시더였다. 반쯤 장난 섞어 한 말이었으나 그의 입으로 평판이 떨어져 결혼이 어려울 거란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고.
‘몇 년 지나면 다들 한때의 일탈로 잊어 주겠지.’
그래도 타격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샤프롱을 두는 건? 문 닫고 단둘이 있지 않았다는 증인만 있으면 되잖아요.”
“거추장스러워요. 정숙하다는 평판이 필요한 거지, 정말 정숙하게 굴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 봤자 앉아서 톱니바퀴나 맞추고 있을 거면서…….”
뭐 대단히 난잡하게나 굴 것처럼. 시더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에스페란사는 치맛자락을 고쳐 쥐며 물었다.
“근데 약혼녀라고 해도 평판에 문제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렇죠. 우린 우리 자체로 큰 문젯거리니까.”
에스페란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는 듯이.
“아무리 다들 뻔히 악용하는 제도라고는 하지만, 피후견인보다는 나아요. 약혼 관계라면 불명예스럽게 보이더라도 몇 년만 지나면 농담 거리도 안 될 테니, 아무래도 좀 덜하죠.”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설득되려는 찰나, 시더가 여상한 어조로 덧붙였다.
“사심이 없다고는 하지 않겠어요.”
“아…….”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다.
뭐라 한마디 해 주려다가도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말문이 막혔다. 어쩔 수 없이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에스페란사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미 저질러 버린 거 어쩌겠어요. 어차피 손님이 자주 오는 집도 아니니까.”
생활 방식이 잘 맞는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시더가 하루가 다르게 무도회를 여는 종류의 사람이었다면, 에스페란사 쪽에서 진작 집을 구해서 나갔을지도 모른다.
“연구 시간도 부족한데 손님 부를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불청객 때문에 귀한 연구 시간을 빼앗긴 시더가 못마땅한 눈으로 저택 쪽을 응시했다.
“근데 굳이 저쪽 집에 연락했다면서요? 그냥 우리 마차 빌려주면 안 돼요?”
“들켜서 좋을 게 없는 기능들을 덧붙여 놔서 곤란해요.”
에이번데일 백작이 마도 공학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굳이 마차를 내어 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멀리 살진 않을 테니, 마차가 금방 오면 저녁에는 연구소에 가 볼 수도 있겠네요. 난 그 수련장을 아직도 못 써 봤는데!”
“글쎄요.”
시더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에스페란사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하나로 모아 등 뒤로 넘겨주며 덧붙였다. 유감을 담아서.
“마차가 그리 일찍 올 것 같진 않군요.”
* * *
식당 옆에 붙은 시가룸의 창문에는 환기용 파이프가 붙어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가룸에 필요한 종류의 기계였지만 나인 호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과연 에이번데일.”
제임스 보일이 감탄하며 파오란을 쭉 빨았다. 시가룸에는 신사들이 궐련을 피우며 할 수 있는 간단한 게임과 오늘 발간된 신문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정작 제임스 보일과 더윈 에거튼이 보고 있는 것은 널찍한 호수의 정경을 담은 창문이었다.
백작과 그의 약혼녀가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창밖의 광경을, 제임스 보일은 부러운 듯이 응시했다.
“나도 윌컷 양과 약혼해서 저렇게 지내고 싶다…….”
“지금쯤 네 사촌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계시지 않을까?”
“듣던 중 고마운 소리다, 참. 사이먼 녀석이야 좋다고 윌컷가로 달려갔겠지.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내가 없으니까. 가서 내 흉이라도 보고 있지 않을까.”
더윈 에거튼은 라비니아 윌컷에게 두 보일이 그다지 순위 높은 구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우정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윌컷 양은 너무 인기가 많지 않나? 차라리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어때? 리튼 최고의 미인을 차지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리튼 최고의 미인. 그것도 앞으로는 좀 애매해질 것 같긴 했다. 더윈 에거튼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저쪽 숙녀는 백작 부인이 되거나 아니면 리튼에서 볼 일이 없을 테니 결혼 시장에서의 라비니아 윌컷의 지위는 유지될 것이다.
경쟁자는 분산되지 않을 테고, 제임스의 욕심 많은 사촌은 부유한 상속녀의 약혼자 자리를 노리기 위해 그를 끊임 없이 귀찮게 할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보일은 강경했다.
“난 윌컷 양의 재산을 노리는 게 아니야. 누구와는 달리.”
열에 들뜬 얼굴로 말한 청년은 여전히 창가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백작의 모습을 부럽다는 듯이 응시하며 투덜거렸다.
“나도 윌컷 양과 저렇게 채신머리없는 장난을 치고 싶다.”
“난 빨리 마차가 왔으면 좋겠다…….”
남의 애정 행각을 보고 있는 것도 눈꼴시고, 상황 파악 못 하는 친구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있는 것도 재미없었다. 지금 같아선 친구 대신 친구의 아버지에게 재떨이를 맞아도 좋으니 돌아가고 싶었다.
“마차? 저녁이나 돼야 올걸.”
“왜?”
“너 같으면 이런 기회를 놓치겠어?”
아. 더윈 에거튼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 그의 어머니, 에거튼 부인이 같은 소식을 들었더라도 한껏 늦장을 부리다가 저녁때가 다 돼서야 마차를 보낼 것이다. 마차만 보내면 다행이지.
“온 가족이 몰려오진 않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모두의 예상대로 보일가는 저녁이 다 되도록 마차를 보내지 않았다.
에이번데일 백작은 아침 식사 테이블에서의 심술을 버리고 흠 없이 고상한 태도로 손님을 대접했다. 제임스 보일과 더윈 에거튼은 백작과 그의 약혼녀를 따라 저택을 구경했고, 백작의 약혼녀가 고른 찻잔에 차를 마셨으며, 두 사람과 카드 게임을 했다.
시더 클라이번은 열 판 중 일곱 판을 내리 이기다가, 약혼녀의 눈빛에 못 이겨 판에서 빠졌다.
“아예 눈을 가리라고 하지 그래요?”
“진짜 가리고 할래요?”
“됐어요. 빠지죠, 뭐.”
일반적인 약혼자 사이라고 하기에는 대화에 스스럼이 없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자, 미스 에스페란사 헌터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파오룬 출신이라서요.”
두 사람의 태도와 에스페란사의 출신지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식민지 출신 숙녀들은 좀 더 자유분방하다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어차피 말한 사람도 알고 한 말은 아니었다.
“오, 리튼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친구 같은 약혼녀라니, 저로선 썩 부럽습니다.”
팔걸이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괸 채 대화를 관망하던 백작이 불만스레 눈을 치켜떴다. 그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한 제임스 보일이 떠벌거렸다.
“사실은 제가 구애 중인 아가씨가 있는데 말입니다…….”
백작의 눈빛이 평온해졌다. 제임스 보일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의 구구절절한 구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에스페란사는 그사이 카드를 내려놓으며 손을 털었다.
“끝났네요.”
“앗, 미스 헌터, 이건 반칙입니다!”
“내 차례였어요.”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 연속으로 여덟 판을 진 제임스 보일이 꾸물꾸물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정말로 마차가 늦는군요. 다시 한 번 연통을 보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말해 두죠.”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혼녀의 턱을 들어 양 뺨에 가볍게 뺨을 대는 인사를 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에스페란사는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코끝에 잔향이 남아 있었다.
“한 판 더 할까요? ……미스 헌터?”
“아, 네.”
자기 앞의 카드를 밀어 준 에스페란사는 뒤늦은 숨을 내쉬었다. 마차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차가 온 건 정확히 6시 40분. 노린 듯한 저녁 시간이었다. 거대한 정문으로 증기 마차 한 대가 들어오자, 차를 마시며 눈치를 보던 두 청년은 냉큼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럴 줄 알았어요.”
창문을 가리킨 시더가 느긋하게 말했다.
“이래도 괜찮겠어요? 저녁 식사가 부족할 텐데.”
“저택에서 50년 넘게 일한 집사가 그만한 눈치도 없을까요? 벌써 다 준비해 놨을걸요. 오히려 남을지도 몰라요.”
남는 건 문제가 안 됐다. 고용인들끼리 작은 파티라도 벌이면 되니까. 에이번데일 백작은 자기 일에는 까다로워도 그런 부분에서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관대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확인은 해 볼게요.”
“좋을 대로 해요.”
에스페란사는 주방으로 향했고, 시더는 가볍게 혀를 차고는 현관 앞의 촌극을 내려다보았다.
“어머니!”
제임스 보일과 똑 닮은 귀부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굴뚝이 남은 증기를 뿜어냈다. 보일 부인이 내리고도 마차 문은 닫히지 않았다. 제임스 보일의 턱이 떡 벌어졌다.
“루이즈? 어머니, 마차만 보내시면 되지 루이즈까지 데리고 오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시끄럽다! 사냥 나간다던 녀석이 숲에서 실종이 되질 않나, 글라일리 하우스에 있다질 않나! 너야말로 가족들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 하지! 더윈, 너도 마찬가지다. 네가 말렸어야지!”
그러나 부인의 목소리에는 희열이 섞여 있었다. 아들이 사고를 친 것은 유감이지만 좀처럼 저택 밖을 나서지 않는 에이번데일 백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실보다 득이 더 많았다. 다음 모임에서 자랑할 거리도 될 테고.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백작을 발견한 부인이 반색하며 뛰어가 무릎을 굽혔다.
“로드 에이번데일, 실례가 정말 많았습니다. 저희 애들이 무슨 실수를 하진 않았겠지요?”
“보일 부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두 분은 매우 신사다우셨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보일 저택에 수일 내로 도착할 청구서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보일 부인이 활짝 웃었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아, 내 정신 좀 봐. 이 애는 제 딸입니다. 루이즈라고 하지요. 루이즈!”
10대 후반의 숙녀가 발간 얼굴로 인사했다. 급하게 치장한 티가 전혀 없었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질 않는다. 피 같은 연구 시간도, 둘만의 유유자적한 오후도 이 난데없는 민폐에 전부 빼앗기고 말았다. 하지만 때론 알면서도 속아 줘야 하는 일이 있는 법.
“마침 저녁 시간이니 숙녀분들께서도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길 바랍니다.”
“어머나, 기별도 없이 와서 폐가 되는 게 아닐까 죄송스럽네요.”
그 능청스러운 말에 보일 부인의 뒤로 밀려난 세 사람의 얼굴에 일제히 ‘퍽이나 그러겠다’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