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 저녁 만찬은 훌륭했다. 소스를 발라 오븐에 구운 양고기 요리와 파이, 연어구이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음식들. 주인의 격조 높은 취향을 보여 주는 술.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만찬의 높은 수준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미묘했다.
“……약혼녀라고요? 식민지 출신의?”
“네, 아직 리튼에서는 소개할 자리를 가지지 못했지만요.”
“금시초문이기는 하네요.”
보일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악의 하나 없이 순수한 어조로 덧붙였다.
“거긴 워낙 야만적이고 못 배운 사람들이 넘쳐 나는 곳이라던데. ……물론 미스 헌터를 말하는 건 아니에요. 로드 에이번데일이 선택하신 분이라면 분명 훌륭한 숙녀분이실 테죠.”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진심이 느껴져서 기분이 더 이상했다.
“어머니, 제발.”
루이즈 보일이 눈치를 보며 보일 부인의 팔을 붙잡았지만 보일 부인은 ‘왜 그러니?’ 하며 딸을 소개했다.
“아, 조금 전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소개해 드리지 못했네요. 제 딸 루이즈예요. 여학교에서도 성실하고 정숙하기로 유명한 재원이었답니다. 피아노 연주에 맞춰 노래를 할 때는 정말이지 요정이 따로 없지요. 피아노가 있다면 노래를 들려드려도 좋으련만.”
루이즈 보일이 창피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냅킨을 꽉 쥐었다. 제임스 보일과 더윈 에거튼은 모른 체 술잔만 홀짝였다.
“훌륭하군요.”
시더만이 그 우습지도 않은 자랑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중간중간 예의 바르고 성의 없는 맞장구도 쳐 가면서. 호스트로서 나무랄 데 없는 태도였다.
“그나저나 백작님께서 약혼하셨다니, 리튼의 수많은 숙녀들이 얼마나 안타까워하겠는지요.”
분명 시더 클라이번이 최고의 신랑감으로 리튼과 나인 호더를 뜨겁게 달구었던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훌륭한 객관적 조건과는 달리 그가 좋은 남편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아는 백작 본인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런가요?”
“그럼요! 어떤 정숙하고 신실한 숙녀분이 새 백작 부인이 될는지 얼마나 기대가 많았는데요.”
어쩐지 ‘그런데’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말이었다. 에스페란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젊은이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보일 남매와 에거튼의 사이에서 자기들만 아는 눈빛이 오갔다. 물음표, 느낌표, 그리고 한숨. 알 만했다.
아까의 그 호의 섞인 모욕이 사실은 그냥 모욕이었던 걸까? 어차피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 낸 설정이다. 그걸 헐뜯어 봤자 모욕받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아니면 그냥 떠보는 건가?
손님 일행은 제각각 다른 이유로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시더가 예의 바른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기대가 충족되셨을 테니 다행이군요.”
보일 부인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계산이 섰다는 듯이, 혹은 알 만하다는 듯이.
“어머, 물론이지요. 리튼 사람들이 미래의 백작 부인을 만나고 감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와.
보일 부인의 혀는 기름이라도 칠한 듯 매끄럽게 굴러갔다. 어조만 들으면 태도를 바꾸었다는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루이즈 보일과 청년들이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에스페란사는 좀 체할 것 같았다.
그냥 푼수 같은 귀부인인 줄 알았더니, 아까는 일부러 떠보는 게 맞았던 모양이다. 하긴, 사교계란 거대한 결혼 시장이니 매물인 줄 알았던 것이 품절된 게 맞는지 한 번 뒤집어 볼 법도 했다. 도무지 방심할 곳이 없다.
시더의 태도가 사뭇 확고했던 덕에 그 이후의 식사 시간은 평화로웠다.
전채부터 메인 요리까지 하나하나 먹을 때마다 보일 부인은 다소 과장스러운 어조로 솜씨를 칭찬했다.
“정말이지 세심하고 멋지네요. 이런 만찬에 참석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사고뭉치 아들을 뒀다고 혀를 차던 친구들이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부러워할까요!”
루이즈 보일이 잠시 창피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긴 했지만, 노선을 정한 보일 부인은 개의치 않았다.
“미스 헌터, 아직 리튼에선 소개할 자리를 가지지 못하셨지요? 다음 주에 저희 집에서 열릴 저녁 무도회에 참석하시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사교계에 처음 나올 때는 아는 숙녀가 있는 것이 도움이 되니까요.”
그 사이에 무슨 계산을 두드린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감사한 말씀이네요. 로드 에이번데일의 연구 일정 때문에 다음 주 무도회는 참석이 어렵겠지만, 초대에 감사드려요.”
“에스코트가 없으면 아쉽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지요. 제 모자란 아들을 빌려드릴 테니, 혼자라도?”
에스페란사가 머뭇거리며 답할 말을 찾는 동안 시더가 끼어들었다.
“미스 헌터는 제 연구를 돕고 있답니다. 유능한 조수 없이는 혼자 일지도 못 쓰는 몸이 되어 버린지라. 부인께서 양해해 주시길.”
보일 부인은 애써 빙그레 웃었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지만, 더 강요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들과 아들 친구가 친 철없는 사고가 소문날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어쨌든 리튼과 에이번데일 사교계의 누구보다 빠르게 백작과 접견했고, 백작의 약혼녀와 정식 만찬도 함께했다. 백작과 약혼녀도 사교계에 나설 일이 생기면 보일 저택의 무도회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는 세 청년과 야욕에 눈을 빛내던 보일 부인을 가장 기껍게 만든 것은 그런 계산속이 아니었다.
“와아아!”
“세상에, 아이스크림이네요.”
놀란 것은 에스페란사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스크림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냉동고 여기까지 가져왔어요? 대체 언제?”
“그걸 어떻게 여기까지 옮기겠어요. 설치하기도 귀찮고 복잡한데.”
옮기려면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를 쓰는 게 나았다. 하지만 인벤토리에 들어갔던 짐 중에 냉동고가 있었다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러면요?”
“하나 주문했죠. 영지로 내려오기로 결정하자마자 바로. 아마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을 거예요.”
“말을 하지!”
“안 했던가요?”
안 했다.
안 했더라도 주방에서 알아서 챙겨 줬다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주방장도 맨날 연구소에 눌러앉아 있는 에스페란사의 피크닉 가방에 한 시간도 안 돼서 물이 될 아이스크림을 넣을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구소에서 허송세월하지 않는 건데. 에스페란사는 혀를 차다가, 문득 너무 자기들끼리만 대화한 건 아닌가 싶어 슬쩍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다들 호스트보다는 아이스크림에 푹 빠져 있었다.
글라일리 하우스는 마도 공학자 주인을 둔 덕에 다른 석조 저택들보다는 냉난방이 잘 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 오래된 저택을 다 뜯어서 시설을 개조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약간 후덥지근한 공기가 돌았다. 그런 식당에서 김이 폴폴 나는 음식들을 먹다가 마지막에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달콤한 얼음 덩어리를 입에 넣는 기분이란.
혀끝이 황홀해졌다. 남아 있던 아주 작은 긴장까지 날아가는 듯했다.
“불경한 말이지만, 왕성에 초대받는다 하더라도 이것보다 더 좋은 만찬을 경험하진 못할 것 같아요.”
루이즈 보일이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로 불경한 말이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고작 아이스크림 하나가 급히 준비한 만찬을 더없이 훌륭하게 만들었다. 청하지 않은 손님들도 만족했고, 에이번데일 백작의 평판도 이만하면 지켜진 듯했다.
시더에게 사교계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굳이 척을 져서 좋을 것도 없으니까.
식사가 끝나고, 적당히 일어나려던 때에, 보일 부인이 에스페란사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는데 이렇게 훌륭한 대접을 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부디 답례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어요? 다음 주가 안 된다면 언제든 가능한 때에 이쪽으로 연락을 주세요.”
보일 부인이 눈짓하자, 뒤따라온 하녀가 명함을 꺼냈다. 보일 부인의 이름이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인 명함을 받아 든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나면 연락 드릴게요.”
“좋아요, 그때 리튼에서 꼭 알아야 할 만한 분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에스페란사는 대답 없이 그냥 웃었다. 절대 안 가야지.
에스페란사가 보일 부인에게 잡혀 있을 때, 시더는 마찬가지로 보일 부인의 딸에게 붙잡혀 있었다. 루이즈 보일은 에스페란사의 팔짱을 끼고 앞서 나간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시더를 향해 수줍은 얼굴로 냉동고를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옆에서 은근히 관심을 보이는 형제의 팔을 잡아채서는, ‘우리도 냉동고를 마련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는데, 까딱하다가는 1년 수입을 전부 여동생의 식도락에 내어 주게 생긴 제임스 보일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럼 로드 에이번데일, 가정용 냉동고를 사는 방법은 주문 제작밖엔 없다는 건가요?”
“지금은 그렇지요.”
“루이즈, 포기해라.”
“그래야겠네요, 정말 아쉬워요. 친절한 조언 감사드립니다, 로드 에이번데일.”
호의와 실망감이 겹쳐진 목소리가 보일 부인의 끈덕진 초대를 거절하던 에스페란사의 귀에 불현듯 꽂혀 들었다.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돌려 막 현관에 도착한 네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더가 다른 숙녀와 나란히 선 모습을 관찰자의 시선에서 바라볼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그 어울리지 않는 일행을 바라보는 에스페란사의 시선은 평소보다 조금 더, 마치 파헤치듯이 집요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 예의 바른 미소. 상냥한 말씨.
그리고 무관심한 시선.
그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아주 좁은 관심사 바깥의 일에는 관심을 주는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원래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저렇게 온도 없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나?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아 에스페란사는 우뚝 멈춰 섰다.
그 순간, 마치 시선을 느낀 것처럼 그가 고개를 돌려 에스페란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 무기물을 보는 듯 빛 없던 눈이 에스페란사가 아는 바로 그 눈으로 변했다. 서서히, 번지듯이. 등이 오싹했다.
물결조차 일지 않는 고요한 내면을 엿본 적이 있었다. 평탄하고 무감동한 세계. 흐르되 파도치지 않는 곳. 그러나 방금의 그것은, 비유하자면 분명 파도였다.
그와 동시에 에스페란사는 그 파도가 낯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시더는 에스페란사를 볼 때 늘 웃고 있었다. 다른 곳을 보다가 눈을 마주쳤을 때, 언뜻 변하던 눈빛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야 마음을 긁는 이유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변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당신은 왜 변했을까요?’
당혹스러웠다. 이토록 사소한 순간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이고, 그러한 눈 맞춤은 수백, 수천 번도 더 있었는데.
부산스레 세 사람을 팔에 꿰고 마차로 향하는 보일 부인의 잔소리가 열린 문밖으로 멀어졌다. 문이 닫히자, 시더의 시선은 온전히 에스페란사에게로 향했다.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보일 부인이 당신을 많이 괴롭히긴 했나 보군요. 피곤해 보여요. 이만 올라가는 게 좋겠네요.”
그 말을 듣고 나니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몸보다는 정신이 피곤했다. 역시 낯선 사람을 한꺼번에 많이 만나는 경험은 별로 즐겁지도, 편안하지도 않았다. 전투할 때보다도 더 빨리 지쳤다. 그래, 피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곤해서 이상한 생각이 든 것뿐이다.
“내일은 연구소에 갈 수 있겠죠?”
“별일 없다면요.”
수련장에 처박혀 있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도 줄어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