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아침 바람을 맞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 딱 좋을, 그런 날이었다.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해가 너무 높게 뜨기 전에 숲을 달려 쾌적한 연구소에서 하루 종일 수련과 책과 달콤한 간식에 빠져 있고 싶은 날.
미적미적 몸을 일으킨 에스페란사는 벽면을 넓게 가린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마치 그 전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쾌한 아침이다.
“어?”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하인들은 아침 준비를 하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근처 목장에서 받아 온 우유 통을 수레에 올려놓고 덜덜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짐작건대 시간은 일곱 시도 안 됐다는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일찍 일어나 버렸다. 시더와 생활 패턴을 맞추다 보니 에스페란사의 기상 시간도 조금 늦어진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오늘은 이례적이었다. 전날 피곤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상했다.
‘더 잘까?’
침대로 돌아가려던 에스페란사가 멈칫했다. 아래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택의 주인이 깨어나기 전의 아침 시간에 걸맞지 않은 고성이. 에스페란사는 급한 대로 잠옷 위에 숄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일찍 일어나 응접실에서 청소를 하던 애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방금. 잘 잤어?”
“그럼요.”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서. 누가 왔나?”
애니는 ‘이 집에 누가 또 찾아오겠어요’ 하는 눈치로 입을 삐죽거렸다. 에스페란사도 픽 웃었다. 그렇지. 귀족 저택치고는 좀처럼 손님이 없는 곳이었고, 손님이 온다고 해도 적어도 이 시간에 방문하는 것은 두고두고 욕을 먹을 무례였다.
“별일 아닐 거예요.”
“그래도 신경 쓰여서. 내려가 볼게.”
저택 현관으로 바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던 에스페란사는 콜먼 집사가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목소리로 짐작건대 상대는 젊은 남자. 진짜 무슨 일이지? 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홀에는 일찌감치 일어난 시더가 계단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계단참에 서서 시더와 콜먼, 그리고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부스스한 머리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자네. 이게 무슨 행패인가?”
“행패, 맞습니다. 하지만! 백작님께서 어제 하루 종일 저택에 계셨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어서 말입니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아? 집사님이라도 말씀을 해 주셨어야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술에 취한 것마냥 말끝을 삐죽삐죽 올리던 청년이 발을 쾅 굴렀다. 그 위협적인 행동에 방금 전까지의 평온함이 통째로 씻겨 내려가고 기감이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에스페란사는 손을 등 뒤로 넘겨 인벤토리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위험해 보이지는 않지만, 여차하면 쏠 생각이었다.
그때 시더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유순한 체 웃었다.
“이리 내려와요.”
잠시 멍해졌던 에스페란사는 손안의 리볼버를 휙 던져 넣고 아무 일 없었던 척 홀로 내려왔다.
“일찍 일어났네요.”
“보다시피 불청객이 있어서.”
불청객으로 불린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에스페란사를 흘끔 보고 입을 다물었다. 주춤거리며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걸 보면 공격 의사는 없어 보였다.
“누구예요?”
시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영지 관리인이요.”
* * *
불세출의 천재. 세기의 마도 공학자. 오토마톤의 개발자. 13대 에이번데일 백작.
시더 클라이번에게 붙는 수식어는 화려했다. 근미래에 그의 위인전이라도 집필된다면 저 수식어들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양반이 영주로서 얼마나 나태했는지는 한 줄도 들어가지 않겠지. 에스페란사는 뚱한 얼굴로 분노한 영지 관리인과 무신경한 시더의 대화를 관전했다.
듣고 있자니 너무할 지경이었다.
에이번데일 백작의 영지를 관리하는 영지 관리인, 딜런 셔스비는 그와 비슷한 규모의 영지를 관리하는 영지 관리인들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되는 연봉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보물 밑에는 함정이 있기 마련.
그 연봉이면 과도하기까지 한 업무량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영지 관리인이 대부분의 사무를 위임받는다지만, 최종적으로 결재를 해 주어야 할 백작이 만나 주질 않으니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결재만 남은 서류가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고.
“제가, 오늘은 작정했습니다. 이제! 곧! 수확철인데! 아직 상반기 지대도 결산이 안 됐단 말입니다! 광산 책임자들은 대체 언제 만나 보실 겁니까? 그 사람들 벌써 며칠째 저만 달달 볶고!”
“그런 일 하라고 자네를 고용한 거지.”
시더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무리 제가 두 배 값을 받고 일한다고 해도요, 백작님이 직접 하셔야 되는 일도 있는 거라고요! 제가 대체 무슨 수로 콧대 높은 농장주들 비위를 맞춰 가면서 지대 올린다는 말을 하냐고요. 그 사람들 콧방귀도 안 뀐다고요!”
“누가 올리라고 했나.”
“그럼 어떡합니까? 세금도 오르고 물가도 오르는데! 물가 상승률만큼만 올리는 것도 안 됩니까? 저희 지대는 이미 주변에 비해서 낮은 편이라고요. 지대 낮게 받는 것도 얼마나 여기저기 눈치 보이는 일인지 왜 백작님은 모르시고 저만! 저만! 아냐는 말입니다!”
얼굴이 빨개진 딜런 셔스비가 가슴을 탕탕 내리쳤다. 딱할 지경이었다.
에스페란사가 혀를 찼다. 작은 소리였는데 그걸 어떻게 들었는지 시더가 눈치를 줬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보죠?”
“아뇨, 어지간히 일 안 하고 도망 다녔구나 싶어서.”
영지 관리인이 영주를 향해 저 정도로 대거리를 하는 건 어지간히 얕보였거나, 정말 울분에 찼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전자가 아닌 건 확실하고. 에스페란사는 딱하단 듯이 딜런 셔스비를 내려다보았다. 곱상하고 인상 좋은 청년인데도 퀭한 눈을 치뜬 모습이 괴기스러울 지경이었다.
“부인? 아가씨? 아무튼 저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저기 저 백작님께 제발 일 좀 하라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시더가 변명하듯 말했다.
“도장 줬어요.”
“제가 그 도장을 어떻게! 어떻게 찍냐고요! 백작님 도장을!”
게다가 그 말을 들은 건 에스페란사와 딜런뿐만이 아니었다. 늙은 콜먼 집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장을 주셨다고요?”
시더가 이마를 찡그렸다. 마치 엄마에게 혼나기 직전의 10대 소년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콜먼이 한탄했다.
“제가 백작님을 이렇게 키웠습니까? 그게 어떤 도장인데 그걸 밖으로 내돌리신단 말입니까?”
“자넨 날 안 키웠지.”
“지금이 헛소리하실 때입니까? 밀런, 네가 와서 말해 봐라!”
밀런은 에스페란사를 따라 내려왔는지 어느덧 1층에 나와 있던 애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닷없이 끌려 들어왔다. 시더는 콜먼과 딜런이 합세해서 몰아대는데도 반쯤 흘려듣다가 말했다.
“셔스비, 내가 찍으나 자네가 찍으나 도장 모양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겁먹지 말고 찍어. 콜먼, 보다시피 도장 찍는 것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셔스비가 도장을 팔아먹기라도 하겠어? 내버려 둬. 자, 이제 끝났지?”
“그렇게 말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결재하셔야 하는 올해 서류 다 가져왔고, 해치우시기 전까진 안 나갑니다. 농장주들한테 뿌릴 편지는 문서로 만들어 뒀으니까 따라 쓰시고요.”
“대필가를 고용해. 그러라고 준 돈이야.”
“아뇨, 백작님이 하실 겁니다!”
딜런은 아예 드러누워서 꽥꽥 소리를 질렀다. 하녀들이 어머, 하고 탄성을 터뜨리자 얼굴이 시뻘게졌으나 꿋꿋했다.
시더는 나직이 혀를 찼다. 도무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연구는 갈 길이 멀었다. 기술 자체는 완성되었으나 그걸 적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넉넉히 잡은 20일도 부족할지 모르는데, 어제는 심지어 하루를 통째로 날렸다. 남에게 맡길 수 있는 영지 관리 같은 일에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에스페란사에게 닿았다. 처음엔 뚱하니 ‘이 한심한 꼴은 뭐람’ 하고 쳐다보던 에스페란사가 슬슬 그 한심한 꼴을 즐기고 있는 게 보였다.
……어쩌면 조금쯤 늦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에이번데일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독점할 수 있는 기간도 길어진다. 나인 호더에는 에스페란사를 귀찮게 굴 사람이 아주 많다. 친구부터 적까지. 그는 이 짧은 평화를 최대한 누리기로 결정했다.
“오늘 하루 안에 다 처리할 테니 부를 사람 있으면 다 불러.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 예, 그러시겠…… 예?”
“싫으면 말고. 자네가 알아서 도장 찍든지.”
시더는 구두코로 딜런의 정강이를 툭툭 쳐서 밀어냈다. 그리고 짐짓 유감스럽다는 듯이 뒤로 돌아 에스페란사를 보며 선언했다.
“이런 이유로, 오늘도 연구는 못하게 됐어요.”
“일해요, 일.”
에스페란사는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시더는 짐짓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놀았다는 듯이 말하는군요?”
물론 일반적인 의미로 놀았냐면, 그건 아니었지.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코웃음으로 답했다.
“놀았죠. 취미 생활이라면서요.”
“당신을 위해서 밤새도록 노력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취미 생활 운운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숙녀분께서는 휴가를 가지시도록 하고. 나는…….”
“집사님, 백작님 잡아 놓으셔야 됩니다. 진짜 그 많은 돈이 아직도 처리가 안 되고 있는 걸 보면 제가 손이 다 떨려서…….”
“걱정 마시오, 셔스비 씨.”
콜먼이 담담하게 확언했다.
* * *
유능한 영지 관리인 딜런 셔스비는 지난 1년 치 장부와 서류를 시더의 서재에 내려다 놓았다. 게다가 잠깐 어딜 다녀오더니, 약속까지 야무지게 잡아 놓았다. 하루를 최대한 아껴서 쓰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백작님 말씀대로 하루 안에 다 우겨 넣어 봤습니다. 열두 시에는 지주들과 점심 식사, 오후 세 시에는 광산 사업자들을 만나 보실 거고요, 남은 시간에 이 장부들을 참고해서 결재를 마쳐 주시면 됩니다!”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쏘아붙인 딜런은 서재 책상에 턱을 괴고 앉은 시더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백작이 마음을 바꿀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시더는 협조할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딜런 셔스비, 광산 사업자들, 지주들……. 하루 종일 밀려들 손님과, 친분 없는 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피곤해하는 에스페란사의 성정을 생각해 보던 그는 하는 김에 조금 더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밀런, 에스페란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연구소에 있으라고 전해.”
밀런은 요상한 눈으로 시더를 흘끔거리더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서재에서 나왔다. 밀런이 보기에도 과한 배려였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