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그렇게 자기답지 않은 배려를 전한 시더는 이번엔 영지 관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딜런 셔스비는 숙녀의 정체가 궁금한 티를 채 숨기지는 못했지만 눈치 좋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하겠다고 했으니 일은 하겠지만, 한 번 결판을 내기는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자기 일을 고용주에게 떠넘겨도 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두 번이나 영지 관리에 하루를 통째로 빼앗기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시더는 책상에 턱을 괴고 장부를 대충 훑어보며 물었다.
“내가 이걸 오늘 안에 처리를 못 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럼 내일도 올 겁니다!”
“내일도 자네한테 시간 내 준다고 한 적 없어.”
나태한 백작은 장부를 덮어 버리며 말했다.
“셔스비, 난 자네를 평균 연봉의 두 배를 주고 고용했네. 더 필요하다면 더 줄 수도 있어. 내가 자네에게 지불하는 돈은 내 시간의 값이니까.”
턱을 괸 채 회색 눈동자를 굴리던 백작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자네가 해고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주 많을 거야. 원리 원칙 주의 좋지, 성실하고 정직한 것도 좋아. 그런 점을 높게 사서 자네를 고용했고. 하지만 값을 못하면 다 쓸모없는 것 아니겠나.”
딜런은 삐걱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그 정도 값은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더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맨 윗 장부터 훑기 시작했다. 서재 안은 먼지 내려앉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이 조용해졌다. 딜런이 마른침을 삼켰다.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정적을 깨뜨렸으나 그것뿐, 숨 쉬는 소리조차 신경 쓰이는 고요가 이어졌다.
* * *
그리고 서재와 문 한 짝으로 나눠진 복도. 흰 드레스 위로 길게 땋은 옆머리와 구불거리는 머리채를 한데 묶어 늘어뜨린 여자가 문을 가린 채 서 있었다.
서재 문고리를 쥔 채 한참을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 있던 에스페란사가 김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할 말도 없으면서.’
분명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는데, 계단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서재까지 굳이 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문을 두드리려다가 손을 툭 떨어뜨렸다.
한창 바쁠 텐데 방해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가씨, 백작님께서 오늘 하루는 혼자 연구소에 가 계시라고 하셨습니다.’
고저 없는 밀런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묘하게도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던 말이다.
‘나 혼자? 나 혼자 가서 뭐 하라고.’
‘백작님께서는 연구소에 가 계시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저택에 남아 계실 거라면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밀런의 어투에는 강압성이 없었다. 오히려 공손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느꼈던 것은 그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에스페란사는 한 번도 시더의 일, 그러니까 그의 취미 생활에서 열외였던 적이 없었다.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는 중요한 연구의 주제, 개발하는 기술,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발명품.
그러나 영지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함부로 묻는 것도 주제 넘는다. 생각해 보면 시더는 의회 일도 에스페란사와 나눈 적이 없었다. 나눌 이유도 없지만.
그래도.
‘자긴 여기 있을 거면서 혼자 연구소에 가 보라니. 완전히 떼어 놓겠다는 거잖아.’
배척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밀런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손님 대접도 해야 할 테고, 일이 많을 텐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는데……. 에스페란사는 다시 문고리를 꼭 쥐었다가 한숨과 함께 내려놓았다. 상대가 청하지도 않는데 굳이 도와주겠다고 하는 게 더 우스웠다.
알고 있었다. 지금이 지나치게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거리감이 마음에 드는 것과는 관계없이, 시더가 밀어내려 한다면 에스페란사는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책임져 주지도 못할 거면서, 심지어 먼저 선을 넘어가려고?’
스스로의 질책에 답할 말이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얇은 겉옷을 여미며 서재에서 멀어졌다.
날씨가 좋았다. 바람에 머리칼이 부풀었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에스페란사는 마구간에서 지금까지 타 보지 않은 말을 골라 타고 숲으로 향했다. 상쾌한 숲속 공기가 찌꺼기처럼 남은 불편한 생각들을 씻어 내렸다.
여전히 답은 구하지 못했지만…….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손길이 곳곳에 배어 있는 연구소로 향하는 대신 숲을 좀 더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사유지 표지판이 있는 곳까지만 다녀와도 하루 종일 걸릴 테니까 시간 죽이기엔 그만한 것이 없었다.
“날씨는 왜 이렇게 좋담.”
시더 클라이번은 밀린 영지 일을 하느라 저택에 처박혀 있는데 말이다. 자기 없인 재미없을 걸 알면서, 연구소에나 가 있으라고 하다니. 차라리 일을 도우라고 했으면 이렇게나 얄밉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투덜거리던 찰나였다. 시야 한쪽 구석, 저 멀리 바람에 흔들거리는 잎사귀 사이로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거리가 있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숲에서는 보기 힘든 색감이라 눈에 띄었다.
연구소에 처음 왔을 때, 나무에 올라 숲 전체를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분명 이 숲에 다른 건물이 있었다. 다 무너져 가는 것도 건물이라고 칠 수 있다면 말이지.
그러고 보니 보일이었던가? 분명 숲에 ‘폐가’가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술 취해서 연구소를 폐가라고 한 줄 알고 무시했는데 그게 저 건물이었던 건가?
확인해 봐도 되겠지?
뭐가 있든 에스페란사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시더가 쓰던 건물이라면 건드리면 안 되는 기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나무를 타고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보안 장치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만들 당시의 시더 클라이번이 나무를 타고 허공에서 들이닥치는 적까지 상정했을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선 상식적이지.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 비상식적인 것은 에스페란사 쪽이다. 빽빽한 나무 사이를 거침없이 누비며 빙그레 웃었다. 울적했던 게 언제냔 듯이 눈이 흥미로 불타고 있었다.
건물은 연구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에스페란사는 나무를 타고 와야 했던 탓에 근처까지 접근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정말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이었다. 형태는 창고 정도로 보이는데, 워낙 형편없이 찌그러져 안에 뭐가 들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벽면은 물론이고 문 위까지 덩굴이 덮여 있었고, 외벽의 벽돌은 성한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운 수준이었다.
여기에 뭐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이런 건물을 왜 아직까지 철거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에스페란사는 건물에 들어가 보길 포기했다. 덩굴을 뜯어 내고 문을 열어 봐야 쥐 떼밖에 더 만나겠는가?
대신 에스페란사의 관심을 빼앗아 간 것은 그 쓰러져 가는 건물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나무 오두막이었다. 건물과 달리 덩굴이 벽면을 뒤덮지도 않았고, 얼마 전에 사용한 것처럼 깔끔했다.
사냥용 오두막인가?
그러나 이 숲에는 사냥터가 없다. 선대 백작이 마지막으로 사냥터를 썼다고 했으니 그건 적어도 5년은 된 일이다. 누가 관리를 하나? 하지만 옆의 건물은 저 꼴로 내버려 두면서, 여기만 관리를 한다니 그것도 웃긴 일이지 않은가?
에스페란사는 발소리를 죽여 오두막에 접근했다. 시더가 쓰는 곳은 아닌지 마법 물품은 보이지 않았다. 연구소와 이렇게 가까운 곳인데, 시더가 아니면 대체 누가 이 작은 오두막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두막은 좋게 말하면 검소하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초라했다. 말을 매어 두는 데 쓰는 말뚝 하나. 가느다란 잠금장치 하나로 잠가 둔 문. 민가였다면 진작에 도둑이 밀알 하나까지 다 털어 갔을 정도로 허술했다.
창문을 통해 안을 보았다.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았다. 생활용품은 없고 온갖 사냥 용품만 즐비했다. 사냥 중에 쉬어 갈 만한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창고 같았지만, 어차피 어디의 백작께서 연구소행을 명하신 덕에 할 일도 없는 참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서 철사를 꺼내 제법 능숙하게 잠금장치에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철사를 써서 열었던 것이 에이번데일 저택의 문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작은 빛의 구를 몇 개 띄워 내부를 밝혔다. 잘 정리된 내부에서는 여전히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본적으로 취사도구가 없었고, 심지어 그 흔한 의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손때 묻은 사냥 용품들. 박제와 동물 털가죽. 누렇게 낡은 일지.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도도하게 서 있는 묵직한 고급 목재 책장. 책장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작은 수첩이었다. 가죽 표지로 감싸인 수첩의 겉표지에는 유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초상화에서 봤던 이름이었다. 시더의 어머니가 쓰던 수첩인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망설이다가 수첩을 내려놓았다. 함부로 열어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미 오두막 안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기는 했지만.
사냥 용품들은 먼지 없이 잘 닦여 있었고, 비록 불을 땐 흔적은 없지만 난로도 재 없이 깨끗했다. 사용하진 않는다 해도 누군가 살뜰하게 관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대체 누가?
에스페란사는 짙은 갈색 천으로 덮인 소파와 그 위에 놓인 낡은 쿠션을 들어 보았다. 단서랄 것도 별로 없었다.
그때 바람 사이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에스페란사는 재빨리 창문으로 향했다.
“콜먼?”
자루 하나를 든 늙은 집사가 휘청이며 가까워졌다. 에스페란사는 왠지 몸을 피해야 할 것 같아, 긴 커튼 안쪽으로 들어갔다. 발밑에 바람을 넣자 신발까지 완전히 감춰졌다.
콜먼은 바깥에 잔디깎이 오토마톤을 켜 놓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에스페란사는 인기척을 완전히 죽인 채 콜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사는 그다지 넓지 않은 오두막을 꼼꼼히 쓸었다. 없는 먼지를 털고 오두막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책장 위의 작은 천사상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 모든 것은 청소라는 실용적 목적을 지닌 행위라기보다는 어떤 의식 같았다. 주름진 눈이 창문 바깥의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을 응시하다가 중얼거렸다.
“도련님은 언제까지 저 놀음을 하실는지. 돌아가신 백작님 뵐 낯이 없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쉰 콜먼은 에스페란사가 숨어 있는 커튼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설마 커튼을 걷지는 않겠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제 혼인도 하실 때가 됐는데, 아직도 마귀 놀음 같은 것이나 하시니.”
한탄을 하면서도 콜먼은 착실히 청소 도구를 정리했다. 그리고 서랍에서 공구함을 꺼내더니 가져온 자루를 열었다. 에스페란사의 눈도 커졌다.
‘사슴 박제…….’
당장이라도 살아날 것처럼 화려한 뿔을 가진 사슴 박제를 본 에스페란사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사실 에스페란사는 박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동물 사체를 장식품으로 만드는 행위에 무슨 감흥을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놀란 것은 박제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그 박제가 일전에 저택에서 봤던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뿔이 크고 모양이 특이해서 다른 사슴일 것 같지 않았다.
‘시더가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에스페란사와 같은 이유는 아닐 테지만, 사슴 박제를 덮어 버리던 그의 얼굴에는 불편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여기로 옮기는 건가? 에스페란사는 그 노인이 홀로 못을 박고 박제를 벽에 거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시더가 대충 먼지 쌓인 천으로 덮어 둔 사슴 박제는 콜먼의 손에서 뿔이 번쩍거리는 깨끗한 상태로 다시 태어났다. 조심스러운 손길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하염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콜먼의 주름진 눈가에 물기가 서렸다. 노인은 참고 참다가, 터뜨리듯이 속삭였다.
“백작님…… 저는 도련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