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이번에는 그냥 투덜거림이 아니었다. 아주 작고 조심스러운 속삭임. 에스페란사는 역설적으로 그 말에서 원망을 읽었다. 애정 아래에 가라앉은 원망. 그건 진심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에스페란사의 손이 치맛자락을 정신없이 움켜쥐었다.
콜먼은 사슴 박제를 걸어 놓은 벽이 당장이라도 무너질까 걱정하는 것마냥 못 박은 자리를 거듭 확인하다가 문을 잘 잠근 뒤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문을 안 잠그고 갔던가?”
그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는 에스페란사의 심장도 함께 철렁했지만, 다행히 콜먼은 이 오두막 안에 누군가 숨어서 그가 하는 일을 전부 지켜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콜먼이 충분히 멀어진 뒤, 에스페란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더가 스스로 밝히지도 않은 그림자 같은 것은 아예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 어차피 에스페란사는 숨기지도 못할 테고, 눈치 빠른 그 남자는 눈을 몇 번 피하는 것만 봐도 이변을 알아차릴 것이다.
애정만 받고 큰 것처럼 말하더니. 에스페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콜먼은 왜 시더를 원망하는 거지?’
생각이 이어지다 보니 호기심도 불쑥 솟아올랐다. 에스페란사는 그것을 최대한 억누르며 숨을 다잡았다. 시더 본인이 직접 이야기해 주는 게 아닌 한, 아예 잊어버리는 게 낫겠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고 쉽게 잊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기분으로 사냥용 오두막을 나왔다. 아까 한참 시선을 사로잡았던 폐건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설마 콜먼 그 인간, 시더 앞에서 티를 낸 건 아니겠지?’
안 냈을 리가 없지. 오죽하면 본인도 마귀 새끼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겠는가. 시더는 콜먼의 원망도 애정도 알고 있었다. 별달리 비난하는 기색도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인 것도 알고 있었을까? 다시 생각해도 이상했다.
정말로 마도 공학 연구 때문인가?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따져 보면 걸릴 만한 문제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또 막상 그중에서 정말로 원망할 만한 문제는 꼽기 어려웠다.
시체를 사다가 연구하는 걸 알아서? 그게 불법이기로서니 이 정도로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남들은 무덤을 파서 시체를 가져다 쓰기도 하는 마당에.
아니면 피를 뽑아 쓴 게 문제인가? 그걸 콜먼이 어떻게 알고? 아니,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연구하느라 피 좀 뽑았기로서니, 그게 그렇게까지 원망할 일이야? 반쪽짜리긴 하지만 동의도 받았는데. 무엇보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처음 뽑았을 때는 전혀 괜찮지 않긴 했어도.
첫날의 무자비하던 채혈 과정을 떠올린 에스페란사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리고 점점 더 능숙해지고 다정해지던 행동의 변화도. 그렇다고 피를 안 뽑는 건 아니었지만…….
물론, 이 모든 건 현대적 연구 윤리로 보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이곳은 식민지 개발을 자랑으로 알고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행해지는 시대였다.
연구 좀 했다고, 또 그게 비윤리의 영역에 조금 걸쳐져 있다고 해서 집사가 죽은 백작을 붙잡고 주인을 원망하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할 것은 전혀 아니었다. 콜먼 집사가 그런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졌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나태하게 영주 일을 영지 관리인에게 맡겨 버린 것 가지고 노인이 죽은 전 백작에게 하소연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어느 쪽이든, 에스페란사가 느낀 처절한 애증의 이유가 될 만한 문제들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참 기가 막힐 일이다.
죽은 백작도 지금의 백작도 그의 주인이긴 매한가지인데 죽은 백작은 살아생전 만든 사슴 박제까지 고이 가져다 닦을 정도로 귀히 여기면서 시더에게는 원망을 하느니 어쩌니 하는 데다가 마귀 같은 짓을 한다며 욕이나 하고. 사람이 이렇게 차별적일 수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괜히 자기가 더 서러워져서 속으로 콜먼을 마구 욕했다. 한참 그러다가,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생각은 그만하는 게 낫겠다.
하지만 생각을 안 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떠오른다. 에스페란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수련장으로 향했다.
불이 꺼진 연구소 셔터를 올리고 비밀번호를 누르자 얽혀 있던 황동빛 잠금장치가 똬리 틀고 있던 뱀처럼 스르르 물러났다. 에스페란사는 1층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레버를 당겨 문을 열자 널찍한 수련장이 드러났다.
에스페란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이걸 드디어 써 보네.’
힘들어 죽기 직전까지 움직이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 할 체력도 없겠지.
벽을 따라 서 있는 기계들을 하나씩 켰다. 처음 써 보는 기계들이지만 어떻게 쓰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빨간 레버가 전원이겠지, 뭐. 그리고 이 친절한 기계들은 전원만 켜면 대충 알아서 움직였다.
확실히 마법은 마법이다. 어렴풋이 마도 공학을 현실의 기계 공학 내지는 전기 공학 정도로 생각했었지만 보면 볼수록 전혀 다른 기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리의 문제고, 사람이 쓰기에 편리한 디자인은 비슷하기 마련이라, 에스페란사는 무리 없이 오토마톤을 쓸 수 있었다.
벽 저편의 과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스페란사는 거대한 장총을 꺼내 과녁을 겨누었다. 맞춰야 할 점은 아주 작았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고요하게 내쉬었다.
미처 방음재를 덧바를 시간이 없었던 탓에 굳게 닫힌 문 사이로 굉음이 새어 나왔다. 소리에는 간격이 없었다. 하지만 새 나가는 것은 마력탄이 터져 나가고 과녁을 맞추는 소리뿐, 사람이 있다면 으레 들릴 법한 숨소리나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은 굉음이 없을 때조차 전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그 문 너머에 서 있었다면 그 모든 게 오토마톤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마력탄 터지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다음에는 뭔가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났다. 꼬박 몇 시간 동안 소리는 종류를 달리했을 뿐 멈추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마치 자라나는 생각을 뿌리 뽑듯이 던지고 휘두르고 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땅에 뿌리박힌 것처럼 도무지 사라지지가 않는다. 의식할수록 자라나는 것 같았다.
턱에서 땀이 비 오듯 떨어졌다. 자리에 멈춰 서자, 커다란 수레바퀴가 달린 오토마톤이 수건을 등에 싣고 와서 발치에 멈춰 섰다. 에스페란사는 동그란 강아지 눈처럼 생긴 센서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게 생겨 가지고.”
디자인이 어떻다 훈수를 둔 걸 마음에 담아 뒀는지 이렇게 깜찍하게 생긴 걸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이런 걸 좋아하나?’
괴기스럽긴 해도 브론즈 시리즈도 나름대로 토끼 인형인 듯하고. 마벨우드의 비 오는 숲에서 만들었던 강아지 오토마톤도 그렇고.
문득 생각이 나서 인벤토리에서 꺼내 보았다. 애니가 없을 때만 잠깐잠깐 꺼내서 굴려 보고 집어넣길 반복해서 얼마 안 되는 마력으로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뒤뚱거리는 강아지는 대충 만든 것답게 허술했다. 그때는 그래도 숲속에서도 나름대로 잘 움직였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워낙 대단한 기계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어설픈 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어차피 쓸데도 없고, 귀엽기만 하면 됐지. 에스페란사는 뒤뚱뒤뚱 걸어갔다가 수확도 없이 돌아오는 강아지 오토마톤을 끌어안고 바닥에 누웠다.
에이번데일의 상쾌한 숲을 걷고 난 후라 그런가. 마벨우드의 비 오는 숲이 오래전 일처럼 까마득하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비에 젖어 올라온 흙냄새와 좁은 돗자리 안에 팔이 닿도록 가까이 앉은 상대의 체향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천장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한바탕 몸을 움직이고 나면 머릿속이 깨끗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잊었나 싶으면 불쑥불쑥 생각나는 게 대단히 중증이었다. 콜먼의 혼잣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전부터 내내 그랬으니까. 오늘 하루를 통째로…….
하지만, 그래서 뭘 어쩌려고? 에스페란사는 돌아가야 한다. 집으로, 원래의 세계로. 스물일곱 해 뿌리 박고 자란 곳으로.
그건 경중을 논할 필요조차 없는 이야기였다. 에스페란사가 살아온 곳, 앞으로 살아갈 곳이었으니까. 그저 당연한 명제였고, 황금 발톱이니 퀘스트니 하는 것들은 그저 그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거기에 감정이 끼어든다.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애교 살 위로 드리웠다. 생각은 결론 없이 질문 위로만 뱅뱅 맴돌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시더는 그 나름 대로의 계산으로 결론을 내려 둔 듯했으나, 차마 그걸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걸 묻는다는 건 감정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덧 인정과 부정의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외면조차도 무의미해졌다. 심장이 정신없이 뛰는 게 격한 훈련 때문만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지?”
불가항력이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세상에서 유일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서,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스며들어 버려서 피할 틈도 없었다. 어쩌면 빗속의 그 숲에서 무릎을 안고 그의 내면을 훔쳐보던 그 날에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짐작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책장 사이에 끼워 뒀던 장미 꽃잎이 어느 날 발등 위로 떨어지듯이,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돌연히, 막을 틈도 없이.
……길게 잡아야 1년이다.
적어도 에스페란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리아에게서 그 황금 발톱이란 것을 빼앗아 퀘스트를 마치고 귀환증을 얻으면, 아마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퀘스트의 진행률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 분명히.
만약 그게 아니라면? 돌아갈 방법이 없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 그땐 여기에서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 할 테고, 지금의 고뇌도 무의미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더 클라이번의 성격상 그런 식으로 떠밀리듯 그를 선택하길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역시 에스페란사가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알고 있다. 그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그가 스스로 그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는 것도.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눈으로 볼 수가 있지?’
아니, 반대로다. 어떻게 그런 눈으로 보면서 에스페란사가 돌아가는 걸 도와줄 수가 있지? 그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더라도 후유증은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되고 잊히더라도, 그때까지의 고통과 그리움은 남을 것이다. 그런데 관계를 정의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지금 이대로도 좋잖아. 이대로 쭉 모른 척한다면. 이미 모른 척하는 건 글렀지만 모른 척하는 척이라도 한다면, 이 관계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긴장감과 편안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밟으며, 결코 그 선을 넘지는 않으면서.
너무 이기적인가? 하지만,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이야?
아마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다시는 게임 따윈 쳐다보지도 못할 것이다. 게임 속 도시를 둘러볼 때마다 생각날 테니까.
그런데 이 이상 정을 주면, 이 이상으로 얽혀 버리면 떠날 때는 얼마나 괴로울까? 고작 게임기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그 모든 일이 없던 것이 된다면 얼마나 허망할까? 너무 슬픈 나머지 다시 이곳으로 오고 싶어지지는 않을까?
이미 기분 좋게 나들이 왔다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최후의 선을 넘는 것이 두려웠다. 그는 어떻게 괜찮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더가 괜찮다면, 에스페란사도 괜찮을 수 있지 않을까?
불쑥 그런 생각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꿀 발라 구운 사과처럼 달콤하고 해로운 생각. 안 되는 이유를 백만 가지쯤 쌓아 놓아도 푹 찢고 들어온다.
“웃기다, 진짜.”
툭 던져 놓고 나니 더 우스웠다. 스스로의 꼴을 인식하자 뒤늦게 열이 올랐다. 에스페란사는 짜증스레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어차피 결론이 없는 문제다. 결국 또 혼자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자학하듯 최악의 경우를 되새기며 마음속의 벽을 높게 세워 놓고는, 정작 시더와 다시 만나면 시답잖은 농담이나 주고받다가 헤실헤실 녹아 버릴 게 뻔했다. 답도 없는 멍청이.
‘나도 몰라, 이젠.’
별 효과가 없는 게 아까 증명되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을 털어 내기에는 몸을 움직이는 것만 한 방법이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다시 기계를 켜고 총을 어깨 위에 얹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점을 보는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총을 끌어안고 주저앉은 에스페란사가 멍하니 숨을 내쉬었다. 중앙에서 약간 비껴간 곳에 마력탄 흔적이 남은 과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비틀어 외면했다.
‘딴생각 좀 하고 싶다.’
대체 몇 시간째 똑같은 사람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시더 클라이번이 오늘 연구소에 함께 오지 않아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이런 꼴을 보였다면 에스페란사가 숨길 틈도 없이 시더가 먼저 눈치채 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하지만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위해 만들어 준 수련장에서, 그가 직접 설계한 기계들에 둘러싸여서 다른 생각을 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시더 클라이번의 연구실에서 벗어나 봤자 갈 데라곤 시더 클라이번의 저택밖에 없지만, 그래도.
몸을 벌떡 일으킨 에스페란사는 머리칼을 고쳐 묶고 수련장을 정리했다. 청소용 오토마톤을 돌리고 과녁과 남은 기계들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타자기가 빼곡히 기록한 수치와 그래프를 받아서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말끔해진 수련장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