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아나벨 세실리아 테이트는 주인에게서 받은 실크 리본으로 화려한 매듭을 만들고 있었다. 옛날 어느 귀부인의 시녀 노릇을 하며, 또 에이번데일 저택에서 전 백작 부인의 옷을 관리하면서 익힌 솜씨로 리본 아래에 레이스를 덧붙이면 그럴듯한 장신구가 될 것이다. 어떤 모자에 붙여도 예쁘게 잘 어울릴 테고.
나인 호더에서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며 주인의 평판을 올리고 자신에 대한 시기심을 억누르는 수완을 발휘했었지만 여기서는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안 그래도 아가씨의 직속 하녀, 사실상 시녀에 버금가는 신분이라는 이유로 애니는 묘하게 경원시되고 있었다. 옷차림도 자유로웠고, 험한 일에서 제외되었다. 봉급도 늘었다. 그런 것은 전부 좋지만, 친구가 없으면 외롭다.
그래서 애니는 요즘 에스페란사의 방 청소를 하는 샬롯이라는 하녀를 눈여겨봐 두었다. 에스페란사의 소파에 앉아 바느질하는 애니를 흘끔거리는 걸 보건대, 이걸 주면서 레이스 짜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 좋아할 것 같았다.
애니가 그런 생각을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였다. 주인이 없는 방문을 두드리는 단정한 소리가 났다.
“밀런 씨? 무슨 일이세요?”
밀런은 방 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물었다.
“테이트 양, 아가씨께서는 이미 나가셨습니까?”
“나가신 지 벌써 몇 시간이나 됐죠. 백작님께서 오늘은 나가 계시라고 하셨다면서요?”
“그게, 그렇기는 했습니다만.”
밀런이 말을 삼켰다. 당연히 에스페란사가 자기를 만나고 갈 거라고 생각했던 주인이, 정작 상대가 인사도 없이 휙 나가 버렸다는 걸 알면 뭐라고 할지 재 보았다.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밀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닫았다. 애니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리본에 레이스를 달았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그사이 아래층에는 백작이 달가워하지 않는 손님들이 오간 모양이었다. 점심시간, 티타임까지. 왁자지껄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애니는 훌륭한 하녀답게 에스페란사의 옷장과 장신구를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아무것도 없는 책상의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주방으로 내려가 주방장이 여분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두었는지 확인했다.
에스페란사는 하녀의 도움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주인이었기에, 그 외에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애니는 창문을 내려다보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까 왔던 손님들이 이제 돌아가는 모양이다. 이번 손님들은 점심 때 왔던 사람들보다는 좀 껄렁한 것 같았다.
이제 곧 저녁 시간인데, 더 늦으시나?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밀런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테이트 양, 에스페란사 아가씨께서는…….”
보시다시피. 애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아직 안 오셨어요.”
“저녁 시간인데 말입니다.”
“먼저 드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때 에스페란사의 옷을 가져다주러 온 잡일 하녀가 밀런을 보고 달려왔다. 하녀는 주근깨가 콕콕 박힌 뺨을 올리며 말했다.
“밀런 씨, 에스페란사 아가씨라면 아까 저녁 식사까지 전부 챙겨 가셨다고 하던데요?”
“예?”
하녀가 눈을 찡긋했다.
“주방일 하는 이디스한테 들었어요. 대단한 걸 챙겨 가신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과 나눠 먹으려는 게 아니라면 저녁까지 드시고 오시려는 것 같다고요.”
하녀는 ‘주방일 하는 이디스’가 아가씨와 백작님이 싸운 건 아니냐는 섣부른 추측을 내어놓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상급 고용인들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밀런이 고개를 까닥였다. 애니는 그 하녀가 애니에게 으스대는 눈짓을 보내는 걸 보고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별 같잖은 텃세를 다 본다.
“그럼 테이트 양, 아가씨께서 돌아오시면 부디 제게도 소식을 전해 주십시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하지만 에스페란사가 돌아오면 그 앞에서 온갖 아양을 떨어대느라 잊어버릴 것 같았다. 애니는 콧잔등을 가볍게 찡그렸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밀런 씨, 그런 것은 풋맨인 깁슨 씨가 더 잘 아실 텐데요?”
하녀가 불쑥 물었다. 밀런이 눈을 찡그렸다.
“예, 알겠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밀런은 애니에게 다시 한 번 당부하고 자리를 떴다.
하녀는 주인의 최측근인 직속 시종에게 무안을 당한 것이 애니의 탓인 것처럼 애니를 흘겨보다 나갔다. 애니는 다시 리본과 바늘을 집으며 코웃음 쳤다.
“참, 나.”
에이번데일 저택에서 온 세 사람은 알고 있었다. 애니의 말괄량이 아가씨는 정문을 이용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개인적인 외출일 때는. 그걸 모르는 건 내내 글라일리 하우스에서만 일했던 저 하녀의 탓이 아니지만, 낄 데 안 낄 데를 구분 못 하는 건 잘못이다.
‘자기가 뭘 안다고.’
애니는 그 사소한 비밀을 매들린과도 나누지 않았다. 정말 별것 아닌데도, 남들과 나누어 비밀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어린애같이. 애니는 킥킥 웃으며 바느질을 마저 시작했다.
마치 숙녀의 머리칼을 가린 베일처럼 리본 뒤로 꼼꼼히 짠 레이스가 풍성하게 드리웠을 무렵이었다.
탁.
발코니 위로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발코니 위에서 짧게 점프한 것처럼. 등잔에 불을 켜고 있던 애니가 반색하며 커튼을 활짝 열었다.
검은 후드를 벗자 머리칼이 팔과 등 위로 구불거리며 떨어졌다. 남들은 몇 시간 동안 인두로 머리를 지져야 겨우 만들 수 있는 예쁜 곱슬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에스페란사가 애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이거 가지실래요?”
애니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다 하루를 꼬박 써서 만든 리본을 내밀었다.
“응? 예쁜 걸 만들었네.”
“뇌물로 쓰려고 만든 건데, 그냥 아가씨 하세요.”
“뇌물로 쓰려고 만든 거면 뇌물로 써야지. 힘들게 만들어 놓고. 난 나중에 하나 만들어 줘.”
에스페란사는 익숙하게 대꾸하며 욕실로 향했다. 자기가 선물을 주는 처지면서도 아쉬운 티를 숨기지 못한 애니가 부리나케 따라가 목욕물을 받았다. 온수가 나오는 레버를 당기려던 에스페란사가 머쓱해하며 손을 떼어 냈다.
“아가씨, 주방에 아이스크림 충분히 있대요. 이따가 제가 가서 가지고 올게요.”
“내가 갈게. 피크닉 가방도 가져다줘야 하고. 그거 무거워.”
금세 씻을 준비를 마친 에스페란사는 따뜻하게 받은 물에 들어가 몸을 늘어뜨렸다. 덩달아 나른해진 목소리가 왠지 시무룩하게 들렸다.
“아가씨, 힘든 일 있으셨어요?”
애니가 욕실의 증기를 빼며 조심스레 묻자, 에스페란사는 욕조에 팔을 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네가 보기에 로드 에이번데일은 어때?”
애니는 잠시 ‘아가씨도 알고 나도 아는데 굳이 그 불편한 호칭을 고수하는 이유는 뭐냐’는 얼굴을 했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어떤 의미에서요? 주인으로서요? 아니면, 아가씨의 남편감으로서요?”
뜨거운 물방울이 치마폭에 튀었다. 늘어져 있던 등이 바짝 섰다.
“남편감…… 그런 얘기가 아니고!”
“네에.”
그런 이야기였구나. 애니는 져 주듯이 방실방실 웃었다. 애니의 에스페란사 아가씨는 저택의 주인이자 애니의 고용주인 에이번데일 백작에게 마음이 있는 게 확실했다. 전부터 분명 그래 보였지만, 그때와는 또 달랐다. 지금은 자기 자신도 그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공기부터 달랐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로.
장미 꽃잎처럼 붉은 물이 든 에스페란사의 뺨을 흘끔거리며 애니가 천천히 말문을 뗐다.
“평판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아가씨가 더 잘 아시겠죠. 하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은 적고 돈은 많이 주는데 모시기 편한 주인이시라 백만 년쯤 저를 고용해 주셨음 좋겠고요.”
에스페란사가 키득거렸다.
“처음엔 악덕 주인일 줄 알았어.”
“그렇게 보이시는 면이 없지 않죠. 하지만 밀런 씨 정도의 측근이라면 모를까 저희 같은 하녀들한테는 그만한 주인이 없어요. 젊은 남자 주인이 혼자 사는 집이라 하면 점잖은 하녀들은 기피하는 직장인데, 에이번데일 저택은 공고가 나자마자 마감된다니까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
“일단 돈도 많이 주고요.”
두 사람이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돈 중요하지.”
애니는 자기 같은 하녀와 돈 문제로 진지하게 공감하는 아가씨가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저택 주인의 가장 좋은 점은 하녀들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귀한 숙녀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전에 머물던 저택에서 모시던 귀부인의 아들이 애니에게 추근대는 바람에 소개장을 받아 나왔다는 것도. 운이 나쁘면 소개장을 받는 대신 매질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도.
그런 그림자는 전부 미소 뒤에 숨기며, 애니는 밝게 말했다. 진심을 담아.
“무관심한 주인이 제일 좋은 주인이죠.”
“그 말도 맞는 말이네.”
에스페란사는 목욕 후의 강아지마냥 젖은 머리칼을 털어 냈다. 대충 말린 머리를 늘어뜨린 채 욕조에서 소파로 옮겨 간 에스페란사가 쿠션 위에 턱을 괴고 엎드렸다. 기세를 탄 애니가 열성적으로 말했다.
“공수표만 뿌리는 남자들이 널리고 널린 세상이잖아요! 적어도 백작님은 아가씨에게 지극하시고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는 법도 없는 분이시니까, 그것만으로도 믿을 만하지 않은가요?”
애니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구구절절 속내를 늘어놓는 대신 쿠션 위에 입술을 묻고 웅얼거렸다.
“난 그냥,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
열성적인 옹호자가 입을 조가비처럼 다물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거야 물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요.”
그건 그렇지. 결국은 돌고 돌아 원점이다. 계속 고민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답도 없는 질문에 시간을 낭비할 바에야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낫지.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피크닉 바구니 반납하러.”
“아가씨, 그럼 이거 걸치고 가세요!”
애니는 이제 바구니를 반납하러 간다는 에스페란사의 손이 비어 있는 것보다도,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어깨가 다 드러나는 여름 드레스를 입은 것을 더 신경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숄을 걸쳐 준 애니가 나인 호더에서 맞춰 온 가을 드레스가 잔뜩 있으니 슬슬 갈아입어 보자고 속삭거렸다. 어깨를 으쓱인 에스페란사는 애니가 해 주는 대로 숄을 두르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안 그래도 애니가 아가씨 드실 아이스크림이 있는지 확인하더라고요.”
마침 주방장과 이야기하던 덴버 부인이 에스페란사를 보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했다. 애니의 당부가 우스웠는지 아이스크림을 트레이에 올리면서도 그 이야기만 끝도 없었다.
“제가 어려운 티를 풀풀 내면서도 굳이 확인을 하는 게 참 지극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잖아도 백작님이 하루에 한 번은 꼭 챙겨 드리라고 당부해 두셨지만요.”
시더는 또 왜…….
에스페란사는 그렇게까지 아이스크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냥 있으면 좋아할 뿐이지. 다들 무슨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덴버 부인이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트레이를 넘겨주니 도리가 없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백작님이 저녁을 안 드셔서요.”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줘?”
“백작님께 가시는 것 아니셨나요?”
“아니었는데.”
“늘 이 시간이면 같이 계셨잖아요?”
덴버 부인이 평온한 어투로 정곡을 찔렀다.
……그랬다. 매일, 거의 매일 매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인 호더에서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에이번데일에서는 떨어져야 할 이유가 없으면 정말 내내 붙어 있었다. 이상한 점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채.
그게 문제였다. 한순간도 시더와 단둘이 있는 그 공간이 불편하거나 지루해지지 않았다. 둘이 좋았다. 부족함도 가득 참도 느끼지 못한 채, 맞는 조각을 찾은 것처럼.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덴버 부인, 놀라지 않았어요?”
“뭐가요?”
“시더가 사람들에게 날 약혼녀라고 소개했을 때 말이에요. 분명 처음엔 피후견인이라고 했다가 말을 바꿨잖아요.”
덴버 부인은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에스페란사는 고용인들의 저런 얼굴을 퀘스트 진행 중에 몇 번 보았다. 하인들이 주인의 대단찮은 치부를 말할 때 꼭 저런 얼굴을 했다.
“누가 봐도 후견인 쪽이 거짓말이었으니까요.”
“아, 누가 봐도 그랬던 거군요.”
그 말은, 시더뿐만 아니라 에스페란사도 상당히 티를 내고 있었다는 말이다. 눈치 빠른 시더 클라이번이 여태껏 그걸 몰랐을 리 없다. 두 배로 창피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얼굴이…….”
“괜찮아요. 이만 가 볼게요.”
얼굴이 좀 화끈거리는 것 말고는 괜찮았다. 에스페란사는 트레이를 쥐고 주방을 나왔다.
그래서, 뭐 때문에 저러시는 거지? 덴버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