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계단을 올라가던 에스페란사는 투덜거리며 내려오는 딜런 셔스비와 마주쳤다. 딜런이 모자를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셔스비 씨, 이제야 가시네요.”
“백작님께서 쌓아 두신 일이 오죽 많아야죠.”
“이제 다 끝났나 봐요.”
“그런 셈입니다. 어휴, 이렇게 지랄맞을 줄 알았으면 그냥 지주들한테 끌려다니는 게 나았을…….”
말문이 터진 딜런이 불만을 쏟아 내다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겨우 기억해 낸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못 들은 척했지만, 기분이 조금 상하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랄맞다가 뭐야, 지랄맞다가.’
“뭐,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미스…….”
딜런이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헌터요.”
“미스 헌터의 탓도 없잖아 있고요. 그러게 왜 인사도 없이 외출을 하셔 가지고는.”
“그건 또 무슨 말이죠?”
“미스 헌터가 말도 없이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백작님의 짜증이 여기서, 여기까지 확 치솟았다고요. 게다가 기별도 없이 저녁 식사까지 하고 들어오셨다면서요? 세상에, 전 백작님이 그 시종을 잡아먹는 줄 알았습니다.”
셔스비의 말에는 습관적인 과장이 들어 있었다. 바람을 좀 꺼뜨려 보면…… 적어도 시더가 에스페란사가 인사도 없이 외출한 것과, 그 외출이 길어진 데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밀런이 그로 인해 곤란을 겪은 모양이지만, 에스페란사보다 시더에 대해 더 잘 아는 게 밀런이니 어지간히 알아서 처신했을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픽 웃었다. 짜증을 냈다는데 왜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그렇군요. 알았어요, 기회가 있으면 다음에 뵐게요.”
눈을 끔벅거리는 딜런 셔스비를 지나쳐 올라간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서재 앞에 도달했다. 나가기 전과 달리 커다랗고 묵직한 문이 벽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트레이를 한 손으로 옮겨 쥐고 노크도 하지 않은 채 조심히 문을 열었다. 놀래 주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었다.
시더는 잠들어 있었다.
서재 전체에 내려앉은 노을빛이 붉었다. 반 뼘 열린 창문 위로 커튼이 부풀었다. 나무 냄새, 책 냄새, 잉크 냄새. 창백한 향기. 기계 장치라고는 없는 고전적인 서재에서 황동과 마정석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마치 그의 연구소에서처럼.
사냥 오두막의 가죽 냄새는 그의 아버지의 향이다. 그리고 이 서재의 향은 시더 클라이번의 것이었다. 그의 뺨과, 목덜미와 손목에 체향처럼 스며 있는 것. 우아하지만 어딘가 조금 비틀어진 듯한 것.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시더는 일이 끝나고 자리를 옮겼는지 찻잔 하나를 벗 삼아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쥔 만년필 아래에는 여러 번 고친 흔적이 남은 복잡한 수식이 적혀 있었는데, 장부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협탁 위에는 가는 선으로 그린 정교한 구조도가 있었다. 에스페란사도 며칠 내내 보아서 잘 아는 구조도였다.
하루 종일 일을 했을 텐데, 일이 끝나자마자 또 연구 거리를 붙잡은 것이다. 피곤하지도 않은가.
‘피곤하니까 잠들었겠지.’
에스페란사는 탁자에 트레이를 올려놓고, 숨을 죽인 채 다가갔다. 무릎맡에 기대앉아서 시더의 잠든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남이 숨겨 둔 보물을 몰래 꺼내 보는 기분이 든다.
반짝이는 속눈썹이 그린 것처럼 긴 음영을 드리웠다. 굳게 다문 입술과 매끄러운 뺨. 노을의 붉은 빛이 서린 채 각진 어깨 위를 장식한 금빛 머리칼.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자는 얼굴은 처음 본다. 손에서 살살 만년필을 빼서 내려놓았다. 깊이 잠들었는지 이마를 살짝 찡그릴 뿐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든 시더는 편안하고 고요했다. 마벨우드 숲에서 엿보았던 그 얼굴이다. 파문 없는 수면. 그리고 그 위를 씌운 한 꺼풀의 다정함을 닮은 붉은 노을빛.
‘이 얼굴을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밀런이나 하워드 집사? 럭스 부인?
마벨우드에서 봤던 그 정도는 그들도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겹 애정이 덧씌워지는 순간의 얼굴은? 그것도 알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에스페란사를 아는 것이 시더 혼자뿐이듯이 그의 그런 얼굴을 아는 사람도 에스페란사뿐이다.
에스페란사는 조용히 감긴 눈 아래의 음영과 평행하게 다물린 입술을 응시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그 고요를 깨뜨려 흔들고 싶은 마음 반. 망설이던 에스페란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손끝이 이마에 스치지 않게 조심조심 머리칼을 걷어 냈다. 고작 머리카락 넘겨 주는 일인데 이상하게 입술이 바짝 말랐다.
깨우지 않는 데 열중하느라 도리어 코끝이 닿을 만치 가까워졌다는 사실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백사장의 모래처럼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머리칼 몇 가닥이 가리고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차.
에스페란사가 몸을 물리려고 한 순간 시더가 눈을 떴다. 졸음기가 가시지 않아 흐린 눈동자가 에스페란사를 응시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팔걸이에 걸쳐 놓은 손목이 붙잡혔다.
너무 가깝다.
그 사실을 인지한 찰나, 시더는 고개를 기울이며 남은 손으로 에스페란사의 뺨을 쥐었다. 코끝이 스쳤다. 에스페란사는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래도 되는 건지, 뒷감당은 어떻게 할 건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린 짐승을 달래듯 코끝이 스쳐 닿았다가 반쯤 벌어진 입술 새로 숨이 섞였다.
그 순간 흐려졌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아.”
깨달았다는 듯이 탄성을 터뜨린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못다 쉰 숨을 몰아쉰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였다.
“……꿈인 줄 알았어요.”
반쯤 잠긴 목소리로 속삭인 말에 방금까지 피부에 선명하게 닿았던 현실이 꿈처럼 몽롱해졌다. 에스페란사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상대의 눈동자 속에서 자기 모습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뺨에 올라온 손도 그대로였다.
문득 시더의 눈이 탐색하듯 가늘어졌다.
각진 손이 작은 턱을 받쳐 들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내렸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밀어내야 하나? 머릿속을 누군가 휘젓고 지나간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와중에 누구 것인지도 모를 심장 박동은 또 어떠하고.
……굳이 밀어내야 할까?
웃음기 없는 입술이 가까워졌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발끝이 말려들었다. 내리뜬 회청색 눈동자에 장밋빛 입술이 비쳐 어른거렸다. 에스페란사의 이름을 달게 부르던 목소리가 현혹하듯 속삭였다.
“입 맞춰도 될까요? 구애의 의미로.”
시더의 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승낙하든, 거절하든, 그것이 관계 자체를 뒤흔들 결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의 손끝이 시더의 셔츠 소매를 쥐었다, 힘이 빠졌다 다시 고쳐 쥐기를 반복했다. 최대한 시선을 피하고자 눈을 내리뜬 채.
시더의 눈을 피하자 다른 것들이 보였다.
약간 붉어진 귓바퀴와, 긴장에 오르내리는 목울대. 에스페란사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부드럽게 쥐고 몸을 숙인 시더가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입술 근처에서 고개를 비틀어 뺨에 입 맞췄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작 뺨일 뿐인데도.
아니면 고작 뺨이어서?
손에 힘이 풀렸다. 심장이 정신없이 뛰는 탓에 숨이 조금 가빴다.
시더는 뺨에 묻은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떼어 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솜털이 곤두선 목덜미로 미끄러뜨렸다. 실크 셔츠로 감싸인 팔뚝에 뭉툭한 손톱이 파고들었다.
턱을 쥐었던 왼손 엄지가 에스페란사의 입술을 얕게 눌렀다. 여기는, 하고 입을 뗀 시더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입 맞춰 달라고 할 때까진 안 할 거예요.”
목소리가 두 사람분의 심장 소리와 뒤섞였다. 혼미하게 젖어 있던 정신이 그제야 조금 또렷해졌다. 참았던 숨을 몰아쉰 에스페란사가 눈을 흘겼다.
“……누가 그런 말을 한다고.”
반박에는 힘이 없었다. 시더는 짧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눈을 치켜떠 보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우스울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고작 뺨에 입을 맞춘 것뿐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하루에 몇 번씩도 해 주는 그런 입맞춤이다. 이까짓 걸로 동요하는 게 더 우스운 일이야. 에스페란사는 애써 덜컹거리는 속을 다잡았다.
“이리 와요. 바닥에 앉지 말고.”
시더가 시키는 대로 쿠션이 쌓여 있는 소파에 몸을 앉히자, 별안간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 망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정말로 조금도 들킬 계획이 없었는데. 그것도 이런 식으로는.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시더는 소파 팔걸이를 덮은 에스페란사의 손등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다가, 가로로 길게 그었다. 에이번데일로 내려온 이후에는 쓸 일이 없었던 암호였지만, 오래 배운 글처럼 바로 이해했다.
“당신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 이건 배려였다. 그에게는 좋을 것 없는.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요.”
“하지만.”
“에스페란사. 난 어중간한 건 필요 없어요.”
이어진 뒷말은 단호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쪽이든 확실한 답을 낼 수 있을 만큼 상황이 확실했다면.
당신은 정말로 괜찮으냐고 묻고 싶었다. 시한부로 맺는 관계라도 좋은지, 그 후의 상실감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지. 그러나 생각했던 말은 전부 삼켜 버린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13년 전의 세상에 연고도 없이 뚝 떨어진 에스페란사가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말 그대로 연고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러날 곳도 잃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잃을 것’을 눈앞에 둔 지금은 입술이 아교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았다.
에스페란사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 텐데, 시더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턱을 괴고 앉아 눈을 내리떴다. 이따금 의미 없는 미소를 보내면서.
그는 무엇이든,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듣지 못한 척할 생각인 것이다. 고약한 배려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자, 시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부가 쌓여 있는 책상 위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가지고 왔다.
“생각은 끝났나요? 당신 앞으로 온 편지가 있어요.”
이번에도, 배려는 배려였다. 손끝에 묻어난 심술이 편지를 받는 손바닥을 무심히 긋고 지나갔다. 손을 움츠리며 고개를 들자 시더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모른 척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