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쿡쿡 찌르는 듯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편지를 뜯었다. 웃음기 어린 눈을 힐끔거리다 편지 봉투를 북 찢어 버렸다.
“……그만 좀 쳐다봐요.”
“왜요?”
“신경 쓰여요.”
시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드러운 빛을 띠던 눈동자에 한순간 이채가 서렸다.
“그런가요?”
“네.”
다 들킨 마당에, 애써 감추려 드는 것도 무의미했다. 그저 마지막 선을 지키면 된다. 결정이 설 때까지…….
아, 이거 정말 비겁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엉망진창으로 뜯은 편지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코델리아네.”
편지를 펼쳐 보았다. 잭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코델리아가 붙여 준 가정교사가 의욕이 과해서 자기를 도련님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불평과 음식이 맛있다는 반가운 이야기. 서툴게 휘갈긴 글씨는 가끔 알아보기 힘들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읽을 만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내려놓은 편지 봉투를 가져다 발신인을 보고는 이마를 찡그렸다.
“코델리아 마벨우드.”
“코델리아한테 악감정 있어요?”
“난 그다지요. 그쪽은 있는 모양이지만.”
“코델리아한테 뭘 했길래요?”
“왜 내가 뭘 했다고 생각해요?”
시더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아무렴. 콩깍지가 씌어도 사리 분별은 된다.
“한참 어린애한테. 나잇값 좀 해요.”
대답 대신 코웃음이 돌아왔다. 에스페란사가 눈을 흘기자, 시더는 혀를 차며 덧붙였다.
“그 아가씬 내가 당신을 독차지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에요.”
독차지하다니. 그때부터 그렇게 붙어 다니진 않았던 것 같은데.
숲. 마을. 사냥. 연구. 하나하나 짚어 보던 에스페란사가 탄성을 터뜨렸다. 엄청 붙어 다녔군. 그때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서로를 온전히 믿지도 못할 때인데 어떻게 그랬을까?
“당신이 날 더 좋아하는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지. 안 그래요?”
꼭 저렇게 말해야 했을까? 에스페란사는 편지에 코를 콕 박았다. 아예 질문을 못 들은 척.
시더는 편지 봉투를 탁자에 툭 던져 두고 다시 턱을 괴었다. 그의 시선이 굽슬굽슬한 머리칼 사이의 달아오른 귓바퀴에 닿았다가, 아무것도 못 본 척 미끄러졌다. 그는 다 식은 찻잔을 들어 호선을 그린 입술을 가렸다.
편지는 총 세 장이었다. 한 장은 잭의 편지, 다른 한 장은 코델리아의 편지.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두 페이지를 다 읽은 에스페란사가 종이를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는, 편지가 아니었다.
“이거. 이거 봐요.”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손등을 두드렸다.
“내가 봐도 되는 건가요?”
찻잔을 내려놓은 시더가 몸을 기울였다. 그는 뒤집어진 글자를 읽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에스페란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처럼 시더의 무릎맡에 주저앉았다.
“이거 보라고요.”
“바닥에 앉지 말아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눈이 마주쳤고,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양보할 생각이 없음을 깨달았다. 백작은 신사답게 숙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섰다. 뒤늦게 네 사람이 앉아도 여유로운 크기의 소파가 보였지만 저리로 자리를 옮기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앉았으니까 이제 됐죠? 자, 빨리 이거 봐요.”
“이건…….”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한 움큼 쥐고 어깨 뒤로 넘겨 주던 시더가 종이를 가득 메운 숫자의 나열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타자기로 인쇄한 듯 깔끔한 이름들과 뜬금없는 숫자들. 긴 단면이 울퉁불퉁해서 마치 전화번호부 한 장을 잘라 낸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주소 같기도 하고. 같은 이름이 몇 번 반복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잭이 장난을 쳤나? 처음에는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 가정은 폐기했다.
타자기는 비싼 물건이다. 마벨우드 남작가 정도 되는 집안에는 있을 법도 하지만 코델리아가 자기 손으로도 글을 제대로 못 쓰는 아이에게 타자기 쓰는 법을 가르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코델리아 본인이 넣은 것이라 하기에는, 종이의 색과 질감이 앞의 것들과 조금 달랐다. 정말 사전이나 전화번호부를 뜯어 낸 것처럼 얇고 반들반들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공작이 보낸 암호로군요.”
“풀 줄 알아요?”
“글쎄요.”
갈리스턴 공작, 암호를 보내려면 적어도 상대방이 암호를 알고 있는지는 확인을 해서 보냈어야지.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둥글게 말고 투덜거렸다. 공작은 사람이 철저하고 계산적인 것 같으면서 꼭 이상한 부분에서 빈틈이 있었다. 아니면 이게 빈틈이 아닌가?
“적어도 군대에서 쓰는 본격적인 종류는 아닌 것 같네요. 규칙을 알면 제일 좋지만 몰라도 하루 이틀 고생하면 답이 나올 것 같기는 해요.”
“규칙을 동봉했을 가능성은…….”
“공작이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길 바라야죠.”
다행히 공작은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편지지와 봉투를 샅샅이 뒤져도 규칙을 적어 놓은 종이 같은 것은 없었다.
“이틀 정도면 충분히 풀 수 있단 말이죠?”
“그럴 시간이 있느냐고 먼저 물어봐 주는 게 어때요?”
아, 그렇지. 암호 놀이에 낭비하기에 시더 클라이번의 시간은 너무 귀했다. 게다가 벌써 이틀을 통으로 낭비한 상황이니.
“그런데 애초에 공작이 왜 당신에게 이런 걸 보냈을까요? 에스페란사, 나한테 설명하지 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에스페란사는 잠시 망설였다.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더는 진심으로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쨌든 상대방 앞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에스페란사도 마찬가지였으므로.
하지만 속이는 것보다는 낫겠지.
“헨리 베이먼의 목숨값이에요.”
공작의 수석 시종이 괴물의 아귀에 끌려 들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에스페란사는 그의 목숨을 두고 거래를 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 파인먼트 하우스의 던전에서 헨리 베이먼을 구해 주는 대가로 공작의 정보망을 이용하기로 했어요. 정식으로.”
“잘했어요.”
“그렇게 말할 줄은 알았어요.”
에스페란사는 입을 삐죽였다.
“근데 이게 뭐예요. 정보를 달라 했지 누가 자기랑 암호 놀이라도 하고 싶댔냐고요.”
뚱한 눈으로 공작을 향한 적의를 불태우는 에스페란사의 뺨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던 시더가 손에서 편지지를 빼앗아 갔다.
“일단 시도는 해 볼게요. 아주 복잡한 암호로는 보이지 않으니 규칙만 찾으면 금방 끝날 거예요.”
“규칙을 찾고 나면요?”
“미안하지만 수기로 해석해야 해요. 내 해석 기관은 정보 처리 속도는 빠르지만 축적된 정보량이 많은 건 아니라서.”
“그걸 내가 해요?”
시더는 잠시 고민했다.
“밀런을 부를까요?”
“……내가 할게요.”
싫어한다뿐이지 펜 붙잡고 하루 종일 끄적이는 일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에스페란사의 눈이 어릴 적 본 전화번호부처럼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힌 암호문을 노려보았다. 뭐 저리 글이 많아?
“어때요, 뭔가 알겠어요?”
“나 지금 이거 보기 시작한 지 5분도 안 됐어요.”
“천재 박사님, 5분 만에 답이 안 나와요?”
시더가 눈을 흘기고는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서 간식이나 먹고 계세요, 숙녀분.”
“내 간식 아니라 당신 저녁이에요. 잠깐만, 그러고 보니 당신 굶었잖아? 이리 내요, 그거. 이거 다 먹을 때까지 종이엔 손도 못 댈 줄 알아요.”
에스페란사가 냉큼 시더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았다. 시더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에스페란사와 자신의 빈손을 번갈아 보다가 혀를 찼다. 그러나 두 번 말을 하게 하지는 않았다.
시더가 식기 움직이는 소리도 나지 않도록 조용히 식사를 하는 동안 에스페란사는 다시 한 번 종이를 읽어 내렸다.
이 종이의 특징은 이러하다.
1. 이름이 엄청나게 많다.
2. 이름 옆에 숫자가 있다.
3. 공작이 보낸 암호다. 즉, 풀라고 만든 것이다.
4. 좀 길다.
이름과 숫자를 한 단위로 묶어서 볼 때 대략 100개 정도가 있었다. 충분한 내용을 전하려면 한 묶음당 하나의 단어를 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흠. 흐으으으음. 종이를 뚫어지도록 바라보던 에스페란사가 결론을 내렸다.
“전혀 모르겠다.”
“음성 기호예요.”
시더가 말했다. 그새 식사를 마쳤는지 식은 찻주전자를 데우고 있었다. 작은 마법 난로를 눌러 켜느라 이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였다.
“뭐라고 했어요?”
“음성 기호. 쉽게 말하면, 그 이름들의 두문자만 읽으면 된다는 말이에요.”
아하. 생각보다 쉬운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게 첫머리만 떼어 읽어 보아도, 특별히 단어가 되지는 않았다. 일단, 너무 짧았다. 세상의 꽤 많은 단어는 서너 글자로 이루어지지만, 정보 전달의 역할을 하는 문장이 전부 그런 단어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래도 단어가 안 되는데요?”
시더는 찻잔 두 개를 꺼내 닦으며 말했다.
“약칭이겠죠. 그 자체가 단어가 아니라 일종의 좌표 역할을 한다고 봐야 할 거예요.”
“좌표. 좌표라고 하면…….”
에스페란사는 천천히 종이 위 이름들의 첫 글자를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두 개의 숫자가 나란히 붙은 모습을 보며 약칭을 되뇌다 보니 머릿속에 희미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성서네요!”
“티스비아어 판본이겠죠. 그래서 음성 기호도 티스비아어를 쓴 걸 테고.”
그럼 못 읽잖아.
“할 줄 알아요?”
“어떨 것 같아요?”
새로 꺼낸 찻잎에서 맑은 찻물이 우러났다. 금박을 입힌 화려한 찻잔 두 잔에 홍차가 가득 찼다. 에스페란사는 찻잔을 받아 들며 대답했다.
“할 줄 알 것 같아요.”
“잘하는 건 아니지만, 교양 수준은 돼요.”
외국어도 아주 능숙할 줄 알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스페란사는 연구소의 작품들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만들고 있었는데 남의 나라 언어를 제대로 배울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럼 이제 다 푼 거 아니에요?”
왜 모르는 것처럼 굴었지?
“문제가 있어요.”
“뭔데요?”
“티스비아어 성서 판본은 내가 아는 것만 열일곱 개예요. 그리고 이건 좌표니까, 정확한 판본을 모르면 못 푸는 암호고요.”
그따위 게 어딨어.
“공작 이 인간이 또 얄팍한 속임수를…….”
쓸 이유가 없었다. 발끈하려던 에스페란사가 곰곰이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애초에 왜 암호로 보냈을까요? 그것도 음습하게 숙녀의 편지에 빌붙어서. 저번에 몸 좀 사리란 편지는 그냥 평어로 보냈는데 말이에요.”
“상황이 변했나 보네요.”
“아주 안 좋아진 거겠죠. 누가 자기 편지를 뜯어볼 거라고 예상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