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당당하게 편지를 보내지 못하고 코델리아의 편지 봉투 속에 숨겨야 할 만한 사정이라면 그것뿐이었다. 그다음에는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누가 무려 왕족인 공작의 편지를 뜯어보겠는가? 그리고 왜 공작은 그 무도한 자를 처리하는 대신 복잡한 암호를 보냈는가?
“다리아가 왕성을 장악했나 보네요.”
생각보다도 더 빠르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거침없다. 왕실의 사정은 알 바 아니지만 다리아가 힘을 얻는 것은 에스페란사의 퀘스트에도 방해였다.
곤란한데.
“그 말대로라면, 공작이 이런 편지를 다시 보내기는 어렵겠네요. 본인도 그걸 알 테니 이 편지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았겠죠. 그러니까 이건 절대로 그들 손에 들어가선 안 되는 편지인 것이고…….”
들어가더라도 그들이 내용을 해석할 수 없어야 한다. 거의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에스페란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의 사정 따위야 고려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일단 암호를 푸는 것부터 생각해야지.
“이 저택에도 티스비아어 성서가 있어요?”
“몇 가지는요.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 개정된 티스비아어 성서는 셀 수도 없지만 그 중 공인된 완역본은 열일곱 종이에요. 하지만 내가 공작이라면 누구나 들춰 볼 수 있는 최신판은 안 쓰겠어요.”
“너무 옛날 건 서로 구하기가 어려우니 암호 해독용으로는 어려울 테고, 아예 최신판은 구하기가 너무 쉬워서 안 썼을 테고. 공작의 예배실에 있었던 건요?”
“그건 오스던어였어요. 1831년 본.”
아, 당연한 일이다. 예배를 볼 때 굳이 외국어 성서를 쓸 이유가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판본과 언어까지 확인한 시더 클라이번을 징글징글하다는 듯이 흘겨본 에스페란사가 무릎을 접어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괸 채 말했다.
“열일곱 종. 그렇게 많지는 않네요. 차라리 다 사서 볼까요?”
“그렇게 무식한 짓을…… 할 수도 있겠죠.”
눈총을 받은 시더가 급히 말을 꺾었다. 무식한 짓이라니. 말 참 예쁘게 한다.
“무식한 짓이라도 지금은 방법이 없잖아요. 열일곱 종을 다 찾을 수 있느냐는 게 문제지.”
“으음. 이 서재에도 몇 개 있을 거예요. 알다시피 에이번데일 백작들은 수집가라서.”
대대로 그랬지. 에스페란사는 글라일리 하우스를 돌아보며 구경했던 옛 백작들의 수집품들을 떠올려 보았다. 티스비아어 성서도 있을 법했다. 게다가 이렇게 커다란 서재라면. 벽을 가득 메운 책장이 쏟아져 내릴 듯했다.
빽빽하게 꽂힌 책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에스페란사는 이 저택에 서고가 따로 있고, 책보다는 유물에 가까운 서적들을 관리하는 관리인도 고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역시 이 저택은 집이라기보다는 유적지나 박물관에 가까웠다.
잠시 후, 관리인이 티스비아어로 된 성서 열두 종을 찾아 가지고 왔다. 열일곱 종 중 열두 종이나 있다니, 정말 대단하긴 했다. 그중 몇 개는 금속 활자가 나오기도 전의 물건이었다. 문단의 첫 글자가 징그러울 정도로 장식적이고 중간중간 수도사들이 손수 그린 삽화가 들어가 있었다.
“진짜 유물이네.”
“조심히 다루셔야 합니다. 꼭 장갑을 끼고 보시고요.”
“알아서 할 테니 나가 보게.”
관리인은 불안한 얼굴로 흘끔거리며 서재 문을 닫고 나갔다. 소중한 유물이 처참하게 훼손되어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하지만 설령 백작이 성서를 찢어서 불쏘시개로 쓰더라도 관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신 완전히 악마 취급 받고 있네요.”
“내가 이렇다니까요. 주인 대접도 못 받고.”
방금 관리인을 매정하게 쫓아낸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에스페란사는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자, 그럼 볼까요?”
관리인은 열두 종의 성서를 출간 순서대로 정리해서 가져왔다. 시더는 공작의 편지를 위로 밀어 두고 새 종이를 가져와 음성 기호만 두문자로 바꿔 적었다. 딱 열 줄이었다.
“일단 열 개만 확인해 볼까요? 말이 안 되는 건 제외하면 되니까. 오늘 안에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성서 열두 종을 여섯 종씩 나눠 가졌다.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첫머리만 정리해 적어 둔 종이를, 시더는 원본을 보며 빈 종이에 암호를 풀기 시작했다. 중간에 시더가 두 권을 더 가져갔다.
어느덧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에스페란사가 만년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열 개나 볼 필요도 없었네요. 이쪽은 없어요.”
시더도 고개를 내저었다.
“남은 다섯 종 중에 있을까요?”
다행히 열성적인 성서 수집가였던 시더의 조상은 당시에 구할 수 있는 모든 판본을 구해 놓았으므로 그가 죽은 이후에 나온 다섯 종만 구하면 된다. 상대적으로 최근 판본이었다.
“1707년, 1737년, 1767년, 1797년, 1827년.”
“바로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아니, 우리가 왜 이렇게 고민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애초에 공작이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것 말고 제대로 된 암호를 만들었으면 됐을 일인데 말이다!
“근처 상점가의 서점 중에 티스비아 서적도 취급하는 곳이 있어요. 나인 호더 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데, 공작이 거기까지 고려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침 의뢰해야 할 부품도 있으니, 내일은 외출이라도 해 볼까요?”
처음 에이번데일로 내려왔을 때는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도시 구경을 하기로 했었다. 시더의 바쁜 연구 일정과 몰아치는 감정의 파도에 거의 잊어버렸던 계획이지만.
“음. 그래요. 여기 온 후로 저택 밖으로 나가 보는 건 처음이네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연구소와 저택만 오가는 생활을 하고 말았다. 시더는 빈 잔을 트레이 위에 올려 놓으며 대답했다.
“여긴 나인 호더와는 달라요. 소도시라, 귀찮은 일이 많을 거예요. 굳이 안 나가는 게 나을 테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으니.”
귀찮은 일?
“잠깐만, 설마 여기 처음 왔던 날 같은 그런 귀찮은 일이요?”
시더가 눈을 찡그려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
“숙녀분, 굽 낮은 구두를 신도록 해요. 여차하면 뛰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 정도라고? 에스페란사도 시더와 똑같이 눈을 찡그렸다. 외출은 좋지만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건 질색인데.
“그냥 나가지 말까…….”
시더가 낮게 웃었다. 에스페란사는 머쓱해져서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가 같이 웃었다. 시계를 힐끔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 당신이 사람들한테 깔릴 것 같으면 구해 주긴 할게요.”
* * *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들은 백작에게 관심이 없었다.
“당신, 별로 관심을 못 받는데요?”
처음 증기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어느 방향에서 사람이 몰려올까 시더의 팔을 꼭 붙잡고 좌우를 살피던 에스페란사는, 내린 지 10분 만에 경계를 풀었다. 몇몇 귀부인과 신사들이 살갑게 다가와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가볍게 물러났다.
“기차역에서 있었던 일 같은 게 매일 일어날 리가 있나요.”
“그러면 귀찮은 일이라는 건?”
“이를테면.”
시더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에스페란사는 ‘아하’ 하고 픽 웃었다.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거리며 따라오던 여자 하나가 빨갛게 익은 얼굴로 다가와서 향수를 뿌린 조화를 내밀고 후다닥 도망갔다. 시더는 거절 없이 꽃을 받았다.
‘이것 봐라?’
에스페란사는 혀를 차며 힘을 주어 말했다.
“인기가 많아 보이네요?”
“별건 아니에요.”
시더는 조화의 대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에스페란사의 귓가에 봉오리가 보이도록 꽂았다.
손끝이 귓바퀴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들은 한순간 같은 모자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꽃대를 덮자, 시더는 미련 없이 손을 뗐다.
에스페란사는 귓가에 꽂힌 꽃을 더듬어 만져 보았다. 꽃잎을 한 장 한 장 오려 만든 조화는 언뜻 만져 보기에도 화려했고 달콤한 향이 났다. 공들여 만든 티가 났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저 아가씨들은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남자들에겐 다 꽃을 주니까.”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손에 꽃이 많더라고요.”
“곧 있으면 축제 기간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벌써 가을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에이번데일로 오기 전에 맞춰 놓았던 가을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시기에 준비할 축제라면 10월의 입동 축제뿐이다. 시간이 빠르기도 하지.
“잠깐만. 이게 그 꽃이라고요? 그럼 그냥 주는 꽃은 아니지 않아요?”
오스던의 입동 축제는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기념하는 큰 축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관공서나 기업체들이 소소하게 기념행사나 상품을 기획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고, 무엇보다 젊은 층에서 인기가 좋았다.
기본적으로는 풍요로운 수확을 감사하는 축제에 여름의 마지막을 고하는 입동 축제가 결합된 형태였다. 거기에 마지막 날 젊은 남녀가 짝을 맞춰 밤새도록 춤을 추는, 고대 맞선의 흔적기관 같은 풍습이 있었다.
보통 그런 날에는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자유롭게 춤을 춘다. 맞선의 취지에 맞게. 하지만 파트너를 독점하고 싶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일종의 마킹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향수를 뿌린 조화를 내미는 행위란, 입동 축제에서의 독점을 원한다는 의미였다.
‘독점이라.’
에스페란사는 귓가의 꽃을 만지작거리며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축제를 즐기는 나인 호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들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축제 날이라고 던전이 쉬는 법은 없었지만, 사방이 축제 분위기일 때는 헌터들도 끼어 놀고 싶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들에게는 나인 호더, 더 크게는 오스던 자체가 놀이터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에스페란사는 세 해 정도 그렇게 끼어 놀다가 랭킹에 들고 얼굴이 알려진 이후에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 세 해 내내, 향수를 뿌린 조화가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이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당연히 에스페란사도 꽃을 받아 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좀 곤란한 상대도 있었지만.’
이 얘기는 안 하는 게 낫겠지.
“파트너 마킹용 꽃을 이렇게 뿌리고 다니다니.”
“리튼에선 그냥 많이 만들어서 많이 뿌려요. 물론 정말 아무한테나 주지는 않겠지만.”
요컨대 적당히 맘에 드는 상대에게 추파를 던지는 용도란 것이다.
“리튼 같이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 해도 하루 종일 한 사람과만 딱 붙어 춤을 추는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축제 때라고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간 금방 소문이 나 버리니까요.”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귓가에 꽂은 꽃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 의미를 새기고 있으라는 듯이.
“우리 나인 호더 사람들과는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