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에스페란사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에 참석한 미혼 숙녀는 같은 사람과 연속해서 춤을 추면 안 된다는 암묵적 법칙이 있다. 비교적 개방적인 나인 호더에서는 격식 있는 몇몇 연회를 제외한 보통의 무도회에서까지 그런 법칙을 까다롭게 적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규칙에 더 엄격한 법이었다.
시더가 눈짓으로 삼삼오오 앉은 귀부인들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즉, 가뜩이나 좁은 도시에서 사고라도 날까 봐 귀부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말이죠.”
축제의 밤, 한껏 들뜨고 풀어진 젊은이들이 책임질 수 없는 사고를 치기 딱 좋은 날이다.
“나인 호더에선 전혀 그런 느낌의 축제는 아니었는데.”
“원래 이런 축제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구경이라도 하고 싶어요?”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는 별로…….”
“좋은 생각이에요. 재미없어요.”
자기 지역의 축제를 폄하하는 목소리가 사뭇 단호했다. 에스페란사는 킥킥 웃었다.
그들은 3층 정도 되는 낮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를 가로질러 시계탑이 있는 광장 반대편으로 향했다. 증기 승합 마차가 다니는 소도시는 에스페란사가 초보 헌터일 때 지냈던 도시와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거기도 이 근처였던가. 사실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이쪽이에요.”
벽돌색 프레임에 글자는 금색으로 적힌 간판. 노란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 안쪽에는 책이 빽빽했다. 시더가 문을 열자, 문에 달린 종이 맑은 소리를 냈다. 젊은 남자가 안경을 벗으며 눈을 깜박였다.
“아, 아. 로드 에이번데일.”
“티스비아어 성서도 취급하나?”
“예에. 물론이지요. 어떤 판본을 찾으십니까?”
“있는 건 전부 다.”
“그것참…….”
혀를 찬 남자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아이고, 들으란 듯이 허리를 두드리면서. 에스페란사는 문 근처에 멀뚱히 서 있다가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 훑어보기 시작했다. 시더는 가게 주인이 쓰던 노란 가스등을 가까이 끌어당겨 놓았다.
“좀 늦는데.”
에스페란사의 어깨너머로 책을 같이 훑어보던 시더가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으아악!”
우당탕 소리와 함께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
비명 소리와 거의 동시에 전투 태세를 갖춘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두드린 시더가 말했다.
“저 사람, 원래 저래요.”
“……아.”
에스페란사가 머쓱한 얼굴로 총을 집어넣었다. 시더는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빈손에 쥐여 주었다.
“좀 오래 걸립니다! 아이구야. 이걸 언제 다 치워.”
“분수에 맞지 않는 수집욕이 불러온 참사죠.”
“로드 에이번데일! 다 들립니다!”
당연히 들리라고 한 말이었다. 시더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책장 깊은 곳에서 책 더미에 파묻혀 있는 서점 주인에게는 닿을 리 없는 대답이었다.
“오래 걸린다고 했으니까, 그사이에 부품 의뢰도 하고 오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까지 시간을 쪼개 쓸 생각은 하지 않았던 시더가 잠시 고민했다.
“같이 갈 건가요?”
에스페란사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미심쩍은 반응에 시더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려는 걸 손끝으로 붙잡으며 대답했다.
“……고맙지만 됐어요. 난 대장장이들이랑은 잘 안 맞더라고요.”
시더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귓가를 가볍게 두드렸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손등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거나 마저 읽으면서 기다릴게요.”
“좋을 대로 해요.”
차임벨이 울리고, 규칙적인 지팡이 소리와 함께 시더가 밖으로 나갔다. 에스페란사는 다시 책을 펼쳤다.
‘분명 누가 보고 있어.’
시선이 느껴졌다. 시더가 나간 지 시간이 꽤 지나도 이쪽에 붙어 있는 걸 보니 상대가 노리는 건 에스페란사 쪽이었다.
하지만 적의는 없었다. 관찰하듯 집요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에스페란사는 책을 덮고 서가로 들어가는 척하며 곁눈질로 창문 밖을 살폈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암살자인가? 공작이 보낸 정보원? 아니면 ‘그들’이 지리적 이점을 포기하고 에이번데일에서 에스페란사를 상대하기로 마음먹었나?
에스페란사는 책장에 기댄 채로 마지막 가능성을 지워 냈다. 인벤토리에서 떨어진 검은 로브가 몸을 가렸다. 존재감도 그만큼 낮아졌다. 에스페란사는 그대로 서가 반대편으로 돌아 나왔다.
이 작은 서점엔 문이 하나뿐이었다. 감시자는 그 문만 지키고 있으면 에스페란사를 감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판단은 옳았다. 일단은.
책장 뒤쪽으로 몸을 숨긴 에스페란사는 책장과 벽 사이의 작은 틈을 사용해 창문 바깥을 확인했다.
일단 정면에 보이는 사람 중에는 없다. 오른쪽, 아니고. 왼쪽…… 마차?
마차 안에서 보고 있었군.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감시자의 위치를 찾아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서점 문을 열고 나가면 감시자는 바로 마차를 출발시킬 것이다. 감시자가 유유히 도망가는 동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쫓아가자면 쫓아갈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건 에스페란사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어쩐담.
마차 바퀴를 망가뜨려 볼까? 바퀴가 부서져서 마차가 중심을 잃으면 안에 있는 사람이 내다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말이라도 걸어 보면 어떨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좋아. 문을 열고, 마차가 출발하면 그와 동시에 가벼운 마법으로 공기를 쏘아서 마차 바퀴를 부숴 버리는 거다.
하나. 둘.
“찾았습니다아! 어, 어라? 어디 가셨지?”
셋을 세기도 전에 서점 주인이 후다닥 뛰어나왔다.
칫. 에스페란사는 혀를 찼다. 마차가 출발해 버렸다.
“뭐, 마음에 드시는 책이라도?”
“아니요.”
“어, 그러시군요. 아. 성서는 여기 있습니다. 최근 100년간의 판본들은 다 있는데 1707년 판본은 못 찾았습니다.”
떨떠름한 얼굴로 책 네 권을 받아 든 에스페란사는 하나하나 다시 열어서 책 앞부분을 살폈다. 정말로 1707년 판본을 제외하면 전부 다 있었다.
“고생했어요.”
책을 들고 돌아서려고 하자, 서점 주인이 황급히 붙잡았다.
“아닙니다. 백작님께서 안 오셨는데 먼저 가십니까? 무거우실 텐데요. 저택으로 보내드릴까요?”
“그럴 필요 없어. 왔으니까.”
때마침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시더가 서점 주인의 발 앞에 지팡이를 짚었다. 그리고 정작 서점 주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에스페란사를 향해 물었다.
“찾았어요?”
“아뇨.”
서점 주인은 ‘그럼 이건 뭐냐’는 듯이 책을 에스페란사 앞으로 밀어 주었다. 시더가 책을 받아 들며 고개를 까닥였다.
“어쩌다가?”
“나가 보려고 했는데 그때 딱 책을 다 찾았다고 하는 바람에.”
“저런.”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한 건가? 서점 주인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자네 잘못 아니니 신경 꺼, 콜먼.”
“콜먼?”
“집사의…… 손자였던가.”
그러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에스페란사는 서점 문을 열면서 말했다.
“마차 안에 있었어요. 혹시 마차 모양을 보고 사람을 찾는다든지 하는 건?”
“불가능하죠.”
역시나.
“증기 마차는 아니고 그냥 마차였단 말이죠?”
“네. 그냥 마차요. 까만색 사륜마차고, 평범했어요. 문이 열린 적도 없고요.”
“목적이 있다면 다시 나타나겠죠.”
“그럼 그냥 좀 더 돌아다녀 봐야겠어요.”
모자 밑에서 시더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좋은 생각이에요. 축제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던데, 구경하러 갈까요?”
검은 장갑에 감싸진 긴 손가락이 에스페란사의 손을 가볍게 쥐어 그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 에스페란사가 흠칫 손가락을 오므리자, 시더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새삼 의식하는 거죠?”
“……의식 안 했어요.”
에스페란사가 힘을 주어 말했다. 말끝이 살짝 떨렸다. 보란 듯이 펼친 손끝이 정장 소매 위의 단추를 꾹 눌렀다.
“퍽이나.”
* * *
검은 마차 안.
“괜찮으세요?”
“……아. 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보일 부인, 미스 보일.”
보일 부인은 입가를 가리며 미소 지었다. 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보이지 않게 툭 치면서. 신사는 그 모습을 뻔히 봤으면서도 애써 못 본 척했다.
“아니에요. 그보다, 뭘 보셨길래 갑자기 마차까지 멈춰 세우신 건가요?”
신사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골랐다. 그러나 꺼낸 말은 두 숙녀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머. 리튼에 연고가 없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보일 부인의 목소리가 불안해졌다. 얼마 전, 우연찮게 만난 이 젊은 신사는 수려한 외모와 고급스러운 차림으로 보일 가문 사람들의 호감을 얻어 냈다. 지금 보일 저택에서 머물고 있는 그는 비밀스러운 점이 많았지만, 보이는 점만 조합해 봐도 어마어마한 부자인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오만한 태도.
‘물론 조사가 필요하겠지만서도.’
세상에는 공작처럼 보이는 사기꾼도 있기 마련. 그러나 무심결에 보이는 눈빛과 태도는 속이기 쉽지 않다.
눈앞의 신사가 뭐 하는 인물인지는 모르겠으나, 리튼 같은 곳에서 저 정도로 부유한 젊은 신사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파티에 나간 적이 없으니 루이즈를 라비니아 윌컷과 비교할 일도 없고.’
비사교적인 성향조차도 장점으로 보였다. 보일 부인의 눈이 번뜩였다.
“예. 리튼에는 연고가 없습니다만,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찾는 사람이요? 혹시 저희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옆구리에 멍이 들 것 같은 기분에 루이즈 보일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리튼 사교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어떤 분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도와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남자는 시선을 돌려 마차 창문을 바라보았다. 시계탑 아래에 차분한 가을 드레스를 입은, 날렵한 체구의 여자가 보였다. 뒷모습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처음으로 보는 미소에 루이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