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사람이, 진짜 많네요.”
숨을 푹 내쉬며 말에서 내린 에스페란사가 뒤늦게 말했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빨랐다. 얼른 쉬고 싶은 기색이 두 뺨 가득 드러났다.
“축제 준비 기간이니까요.”
“그렇긴 한데, 도시 규모에 비해서도 많지 않아요?”
“잘 모르겠네요. 입동 축제 준비를 볼 일이 잘 없어서.”
“무슨 준비할 게 그렇게들 많은지.”
정신을 차려 보니 휩쓸려서 한 바퀴를 돌았다. 볼 때는 재밌게 봤는데 끝나고 나니 몸보다도 정신이 더 피로했다. 광장에 사람은 왜 그리 많고, 그중 시더 클라이번에게 말 한마디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익숙하게 연구실 제일 안쪽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간 에스페란사는 연구실의 구조도가 있던 테이블 위에 성서를 쌓아 올렸다. 두꺼운 성서가 순식간에 눈높이까지 쌓였다.
이걸 언제 다 확인하지? 눈앞이 까마득했다.
“이렇게 놓고 확 불 질러 버리면 아까 보던 그거랑 똑같은데.”
입동 축제의 가장 큰 행사는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쌓은 장작에 불을 지르고 그 불을 나눠 가지는 것이다. 역사가 오래된 전통이지만 이 시대에는 집집마다 불씨를 나눠 줄 필요가 없으니 그저 분위기 띄우기용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유저들 사이에서는 편한 대로 할로윈이라고 불리긴 했지만 입동 축제와 할로윈은 성질이 전혀 달랐다. 할로윈이 보다 상업화되고 문명화된 축제라면 오스던의 입동 축제에는 마모되지 않은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남아 있었다.
여름이 끝나고 겨울을 맞이하는 밤. 새빨간 불꽃을 배경으로 위와 아래가 뒤집히고 신분과 질서가 혼동되는 그런 축제의 밤. 춤추고, 노래 부르고, 웃고, 떠들고, 먹고, 미친 것처럼 끝나지 않는 밤을 보내는 축제.
“연구실 안에서 불장난은 안 돼요.”
생각이 뚝 멎었다. 에스페란사는 손끝에 불꽃이 타닥타닥 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책 표지에서 손을 뗐다.
“안 해요, 안 해요.”
하지만 암호 해독이 끝나면 반드시 깡그리 모아 불 질러 버릴 테다.
굳게 일 자로 다물린 입술을 본 시더가 나직이 혀를 찼다. 실크해트를 문 옆의 코트 스탠드에 걸며 말했다.
“도와주고 싶지만, 연구가 밀려서요.”
“됐어요. 내가 할 수 있어요.”
어차피 이제 남은 건 하나하나 대조해 보는 지루한 반복 작업뿐이다.
“그럼 좀 이따 봐요.”
코트까지 마저 걸어 둔 시더는 미련 없이 서재를 나가 연구실 쪽으로 갔다.
잠시 후 황동빛 파이프에서 캐리어가 뚝 떨어졌다. 빈 종이에 성서의 발행 연도를 쓰고 있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들었다. 캐리어를 열어 보자, 작은 캔이 나왔다.
“뭐지?”
안에는 동그랗고 알록달록한 구슬이 잔뜩 들어 있었다. 캔을 기울여 구슬을 꺼내 본 에스페란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탕이다.
직접 줘도 될 걸, 꼭 이런 식이다. 이런 간지럽고 즐거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적절한 단어가 있을 법도 한데. 에스페란사는 사탕 하나를 입 안에 넣고 빈 종이를 꺼내 가볍게 한 줄을 흘려 쓰고 캐리어에 넣었다. 캐리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지쳐 있던 정신이 깨끗해졌다.
인벤토리를 뒤져 편지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서 겹쳐 접은 편지지 세 장이 나왔다. 잭의 편지, 코델리아의 편지, 그리고 공작의 암호. 맨 마지막 장을 펼치려던 에스페란사의 눈에 문득 뭔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1737년?”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실수한 것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태연하게 적은 서명을 바라보았다. 코델리아가 1837년을 1737년이라고 쓰고도 몰랐을까?
그게 말이 되나.
1836년이라고 썼어도 이상했을 것이다. 한 해의 반이 넘게 지나갔는데 아직도 연도를 틀린다는 건 이상하다. 하물며 세기를 틀리고도 수정하지 않고 보내다니. 코델리아답지도 않았고, 납득할 수도 없었다.
“1737년. 1737…….”
책 탑 아래쪽에서 낡은 성서를 꺼낸 에스페란사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책장을 열자 노란 먼지가 풀풀 날렸다.
한 단어, 한 단어, 암호를 해석해 보던 에스페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구실로 달려갔다.
“시더! 찾았어요!”
귀가 먹먹할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 장치 안에 반쯤 들어가 있던 시더가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만.”
기계에서 나온 그는 손에 묻은 먼지를 손수건으로 닦아 내고 쓰고 있던 외알 안경을 벗은 다음 기계를 껐다.
“어? 내 날개 고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맞아요. 하던 중에 필요한 게 생겨서. 음, 설명할까요?”
“아뇨.”
재빨리 대답한 에스페란사가 종이를 흔들었다.
“1737년 성서예요. 코델리아가 힌트를 줬더라고요.”
시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했을까요?”
그건 에스페란사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덕분에 문장이 깔끔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첫 문장만 해석해 봤어요. 뜻은 모르겠지만.”
종이를 받아 든 시더가 속삭이듯 문장을 읽었다.
“‘그날 쏘아 죽인 주인에게 다음 수수께끼의 답이 있다.’”
그 말은, 기껏 성서를 잔뜩 사 왔더니 한 문장 해석하고 끝이란 뜻이다. 김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실망감에 늘어뜨린 어깨를 애써 바로 세우며 말했다.
“‘그 날’이라면, 던전이 터진 날일 거고요. 내가 ‘쏘아 죽인 주인’…… 내가 그날 죽인 게 한두 개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주인이라고 할 만한 건.”
“만티코어 하나죠. 던전 보스. 그럼 만티코어라는 책에서 다음 문장을 찾으라는 건가?”
세상이 책이 그렇게 많은데, 제목이 만티코어인 책이 하나도 없을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한두 권이 아닐 것 같아 문제였지.
“도서관에라도 가 봐야겠어요. 아직 닫을 시간 아니니까, 얼른 가서 빌려 봐야겠…….”
“잠깐만요. 에스페란사.”
한구석의 탁자에서 만년필을 찾아 든 시더가 빠르게 휘갈겼다.
“그 날, 보스는 만티코어였지만 ‘쏘아서 죽인 것’은 따로 있었어요. 기억해요?”
아. 그랬다. 왜냐하면, 던전 보스가 깃들어 있던 것은.
“성서였죠.”
연결이 된다.
“오스던어 성서, 1831년 본.”
“다리아와 사이러스는 모르겠죠.”
그들 세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는 정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보다 확실한 열쇠는 없었다. 하지만……. 시더가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성서의 판본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상정한다면, 만티코어 쪽이 더 합리적일 거예요.”
결국 둘 다 확인해 보란 말이었다. 일이 두 배가 됐다. 시더는 탁자 서랍에서 도장을 꺼내 찍었다.
“급하게 쓴 거긴 하지만 위임장이에요. 내 이름으로 빌려요. 성서는 저택에 있으니 만티코어 쪽부터. 늦은 시간이니 저택으로 바로 와요.”
“도서관 닫기 전에 급하게 다녀와야겠네요.”
에스페란사의 발밑에 흰 바람이 맴돌았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보이는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몸을 던지는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시더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의 할 일로 돌아갔다. 완벽한 것을 더 완벽하게 빚는 일로.
* * *
멀뚱멀뚱 건초를 헤집던 말 위로 배려 없이 올라탄 에스페란사는 전속력으로 숲을 가로질렀다. 영문도 모르고 달리는 말이 시더의 말이라는 걸 알아챈 건 숲을 다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도서관이 문을 닫는 시간은 아홉 시. 사서가 책을 찾는 시간을 고려해 넉넉잡아 여덟 시 반까지는 도착해야 한다. 숲속 외진 길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상점가에 도착하자마자 말을 대충 매어 놓고 달렸다.
도서관 앞, 라이딩 후드가 넓게 펄럭였다. 반대편의 시계탑을 보니, 여유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잠시 고민하던 에스페란사는 곧 근처의 가게로 들어갔다.
잠시 후, 빈손으로 에이번데일 시립 도서관 문 앞으로 돌아온 에스페란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위임장을 받은 사서는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책 제목을 듣고는 얼굴을 요상하게 일그러뜨렸다.
“백작님이……?”
만티코어라는 제목이 들어간 책은 많았지만 그 자체가 제목인 책은 딱 한 권이었다. 책을 받아들자 에스페란사의 얼굴도 요상해졌다. 공작이 이런 책을 코드북으로 썼다고?
“이거, 진짜인가…….”
사서가 동감의 눈빛을 보냈다. 에스페란사가 황급히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 백작님이 연구에 미쳐서 드디어 악마 소환이라도, 네?”
“아니에요.”
별로 믿는 것 같진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떨떠름한 얼굴로 책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두웠다. 에스페란사는 글라일리 하우스에서 가장 커다란 방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입가에 스치듯 미소를 지었다. 찬 가을바람에 저번 달보다 두꺼워진 커튼이 휘날렸다.
다음 순간, 커튼이 옆으로 젖혀졌다. 훈기가 도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 두터운 종이 파일을 넘기던 시더가 고개를 젖혔다.
“왔군요.”
“인사가 너무 성의 없단 생각 안 들어요?”
“그래요? 아마 당신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시더는 에스페란사를 지나쳐 열려 있던 창문을 닫으며 대답했다. 자연스레 후드 안쪽으로 들어온 단단한 손이 차가워진 뺨을 쥐었다 놓았다.
후드를 벗은 에스페란사가 뺨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손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움켜쥔 시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꽃다발이었다. 짙고 넓은 잎 사이로 연한 색 작약이 반쯤 피어 있었다. 꽃은 화려하지만 꽃다발 자체는 작았다.
“……나 주는 건가요?”
“지나가다 보이길래요.”
그 말에 시더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꽃 선물이라니, 이런 건 받아 본 적도 없을뿐더러 받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당연한 일이다. 사교계의 예절에서 꽃다발은 신사가 구애하는 숙녀에게 선물하는 것이었으므로.
널찍한 방 안이 꽃향기로 가득찼다. 순간 ‘인벤토리 안에서는 꽃향기도 퍼지지 않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시더는 그 의문을 머리 한쪽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역시 이런 건 별로인가요?”
“아뇨. 좋아요.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에스페란사에게는 처음 받은 선물이다. 시더가 빈 화병을 찾아오자, 에스페란사가 그 안에 물을 채웠다. 포장을 벗긴 꽃을 화병에 넣던 시더가 멈칫했다.
“왜 그래요?”
그는 대답 대신 한층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꽃봉오리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뒤늦게, 천천히 귓가가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