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알아봤다. 분명했다. 저건 알아본 사람의 웃음이다. 에스페란사는 재빨리 눈을 돌렸다.
“그럼, 나 이제 가 볼…….”
도망치는 숙녀를 이만 보내 주는 것이 도리겠지만, 시더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시더는 못 들은 체 말을 돌렸다.
“책은 있던가요?”
“……한 권 있긴 했어요.”
도망을 포기한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동그랗게 만 채로 인벤토리를 뒤져 책을 꺼냈다. 표지를 본 시더가 나직이 혀를 찼다. 표지부터 눈길을 끄는 게,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벌써부터 예상이 갔다. 똑같은 생각을 떠올린 에스페란사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연구에 미쳐 버린 백작이 급기야 악마 소환에 손댄다는 소문이 나더라도 내 탓은 아니에요.”
“구체적이네요.”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구체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편견이죠.”
에스페란사는 찡그리듯 웃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더 클라이번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연구에 미쳐있다든지, 자기 연구 성과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전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기는 무슨.
“사실에 기반한 편견이잖아요.”
“가혹하네요. 뭐, 좋아요.”
사실 시더가 그런 뒷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둘 다 알고 있었다. 오히려 신경 쓰는 성격이었다면 이런 말을 못 했겠지.
탁자에는 시더가 밀런을 시켜 가져다 놓은 오스던어 성서도 있었다. 모두 에스페란사가 내일 열심히 파고들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 책도 ‘만티코어’와 함께 인벤토리에 집어넣어 버린 에스페란사는 우유가 가득 든 머그잔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이거 나 주려고 남겨 둔 거죠?”
“누가 너무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식어 버렸지만요. 대체 뭘 하다 늦은 거죠? 아는 사람도 없으면서.”
에스페란사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살 때는 실실 웃으면서 마치 대단한 장난이라도 준비한 듯 들떠 있었는데, 막상 주고 나니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눈을 피할 때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꽃병을 가리켰다.
“그거야, 그거 말고 뭐 있겠어요.”
“직접 골랐어요?”
보란 듯이 화병을 탁자 위에 올려 둔 시더가 꽃봉오리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사교계의 비밀 언어를 알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냥 예뻐서 산 거예요. 그 얘긴 이제 그만하고, 이거 데우게 기계 좀 꺼내 줘요.”
“흐음. 그런 걸로 해요.”
탁자 아래에서 기계를 꺼내, 이 김에 보고 배우란 듯이 천천히 조작한 뒤 머그를 올려 둔 시더는 데운 우유에 김이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에스페란사와 눈을 맞췄다. 웃음기 없이 사뭇 서늘하던 눈이 천천히, 보란 듯이 가늘어졌다.
에스페란사는 좀처럼 그 시선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확신 없는 눈빛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불쑥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내리누른 에스페란사가 심란한 한숨을 내쉬었다.
* * *
“저런, 잠을 못 잤나 보네요.”
마른 눈가를 비비는 에스페란사와 복도에서 맞닥뜨린 시더가 혀를 찼다.
“못 잔 건 아니고.”
“고민이 많아서 뒤척였다?”
“넘겨짚지 말아요.”
시더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에스페란사의 고민을 다 안다는 듯이.
뭘 다 안다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에스페란사는 자기 생각에 지레 놀라 그렇게 투덜거렸다.
“오늘도 당신이 먼저 가 있어야겠어요. 급한 방문객이 오는 모양이라. 한 명을 받아 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니까요.”
“평소엔 그냥 없는 척했잖아요? 누가 오길래 연락도 없이 쳐들어온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예요?”
“리튼 후작의 대리인요. 별로 중요한 용건은 아닐 테니 두어 시간 상대해 주면 돼요.”
별일 아니란 듯한 말과 달리 벌써 지친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스페란사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자, 시더는 반사적으로 눈을 접어 웃었다.
“뭐, 귀찮은 참견이나 하겠죠. 아, 그리고 연구소에 밀런을 보내 놨으니 너무 놀라지 말고.”
“나 말고 밀런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나을걸요.”
“그래요. 너무 놀란 나머지 내 하인 뼈를 부러뜨리지는 말고.”
시더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아까보다는 기분이 좀 더 나아 보였다. 그의 손이 에스페란사의 머리칼 끝을 쥐고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보는 물건을 만지듯이 어루만졌다.
충동적으로,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셔츠 소매를 쥐었다. 소매 안쪽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할 말 있나요?”
그때 계단 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풋맨과 콜먼의 목소리가 낯선 남자의 목소리와 섞였다. 손님이 온 모양이었다.
“아뇨. 나중에.”
“그래요, 나중에.”
시더는 여전히 그의 소매를 쥐고 있는 에스페란사의 손을 붙잡아 떼어 냈다. 그 손을 그대로 쥐고 손가락 마디에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뗐다. 산뜻하게 인사를 마친 그는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곧은 등이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한 번을 안 돌아보네.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가까운 방문을 열고 들어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오늘도 창문으로 뛰어내리셨군요.”
베레모를 쓴 우편 배달부가 치맛자락에 튄 흙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더와 지나갈 때는 좀처럼 볼 일이 없었지만 혼자 아침 일찍 나오면 종종 마주치는 관찰력 좋은 소년이었다.
“사립 탐정이라도 하게?”
“이 조그만 도시에 무슨 사건이 있겠어요. 돈을 모아서 나인 호더로 가면 생각해 볼래요.”
“그래, 그것도 괜찮지.”
우편 배달부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의 경쾌한 휘파람 소리도 대문 옆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가고일 석상을 지나치며 점점 작아졌다.
작은 도시인데, 참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머리칼을 한 손으로 쥐어 묶은 에스페란사는 익숙하게 마구간지기와 인사하고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게으른 말을 한 마리 붙잡아 탔다.
익숙한 길을 따라 연구소에 들어가니, 밀런이 돌려 놓은 기계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고개를 꾸벅 숙인 밀런은 뭔가 착실히 적고 있었다.
“뭐 해?”
“백작님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아가씨께서도 하실 일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가서 네 일이나 하라고? 그 맹랑한 말에 어깨를 으쓱인 에스페란사는 이제 자기 자리가 된 것 같은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밀런은 곧 일어나 방을 옮겼다.
연구실 지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성서를 펼치던 에스페란사가 눈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불이 들어온 위치는 시더가 보여 주었던 방들 중 하나.
아, 에스페란사의 날개가 있는 방이었다. 거기에 밀런이 드나들어도 되나? 밀런에게도 에스페란사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했나?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그들 둘만의 비밀이고, 에스페란사만큼이나 시더도 그 비밀을 각별히 여기고 있으니까.
고개를 갸웃거려 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에스페란사는 그냥 다시 성서로 시선을 돌렸다.
짧게 잡은 만년필이 성실하게 검은 궤적을 그렸다. 왼손은 바삐 성서를 뒤지고, 오른손을 글자를 베껴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암호를 참고하느라 고개가 연신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규칙적이던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멎고 말소리가 나기 시작했으나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다 풀었다!”
한참 뒤 만년필을 내려놓은 에스페란사가 뻐근한 손목을 주물렀다.
연구소 지도를 확인하니 에스페란사의 날개를 둔 곳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시더가 도착한 게 틀림없었다. 때마침 괘종시계가 열세 번 울렸다.
이런. 벌써 점심시간을 넘겼다. 배도 고프지 않을 정도로 집중했던 모양이다. 에스페란사는 종이와 성서를 들고 시더가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아. 마침 잘 왔어요. 당신이 확인해 줄 게 있는데……. 풀었군요?”
“네, 그 얘기를 하러 왔는데.”
“그럼, 그 얘기부터 할까요.”
기계에 파묻혀 있다시피 하던 시더가 몸을 일으켰다. 오토마톤들이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내 날개에 뭐가 엄청 많이 붙었네요.”
“반절은 떼어 낼 거예요.”
그것참 다행이다. 저걸 짊어지고는 한 걸음도 못 움직일 것 같으니까.
서재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시더가 차를 끓였다.
“밀런은요?”
충분히 우러난 차를 한 모금 마신 에스페란사가 물었다.
“돌려보냈어요. 내가 온 지도 두 시간이 지났는데, 전혀 몰랐군요?”
“그러게요. 시간 가는 줄 몰랐네.”
“무슨 내용이었길래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몰랐는지 들어나 볼까요.”
아. 맞다. 에스페란사는 성심성의껏 눌러쓴 종이를 펼쳤다. 띄어쓰기가 넓게 된 것을 빼면 마치 에스페란사가 쓴 편지 같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성서의 시대적 배경 때문에 몇몇 단어들이 대체되고 문장이 어색하기는 해도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이 말은, 공작이고 여왕이고 할 것 없이 궁전에 갇혀서 다리아와 사이러스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말이네요. 그래서 정보도 이런 식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아주 신이 나서 건물도 올리고 세력을 늘리는 모양인데.”
“그리고 날 노리고 있고요.”
시더가 턱을 괴고 빙그레 웃었다. 공작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적 없는 그였지만 이 귀찮은 암호의 내용이 썩 만족스러웠던 게 틀림없다.
저러니까 대답해 주기 싫다. 에스페란사는 눈을 슬쩍 피했다.
“아, 네. 당신 연구를 노리는 모양이네요. 이건 예상했던 거니까.”
할 말은 그게 끝이냐는 듯한 시선에 에스페란사는 마주 눈을 흘겼다.
“아무튼! 생각 외로 내용이 많지는 않네요. 답장을 보낼 필요도 없고. 두 번이나 꼬아 보낸 것치고는 좀 싱거워요.”
시더는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그리고 에스페란사가 침묵이 불편해 뒤척거릴 때쯤에야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