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난 중상모략에는 약한 편이지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도 의회에서 몇 년 졸다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죠. 이를테면 ‘해적’이라는 표현은 강력한 해군으로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는 오스던의 영향력에 큰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한다든지.”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했다. 다리아의 오스던에 대한 통제력이 적어도 게임 오픈 시점 수준에 이르지 않은 이상 벌써부터 식민지에 눈을 돌릴 리가 없었다. 상태 창에 보이는 ‘황금 발톱’의 맵도 아직 오스던 본토를 벗어나지 않았다.
“다른 가정은 없어요?”
“글쎄요. 확실한 건, 다리아가 군사력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네요. 개인으로도 충분히 강하면서, 왜일까요?”
나 때문인가?
그게 합리적인 추측이다. 하지만 정말로 군대를 끌고 올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도 해적을. 다른 쓸모가 있겠지.
“군사력을 어디다 쓰려는 건진 몰라도 이 암호문에 따르면 나인 호더에는 어느 정도 작업이 끝났다고 봐야겠죠. 그 말은 수도로 돌아가는 게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더 위험해지리라는 뜻이고.”
‘빼앗은 땅에 많은 건물을 짓고 있다.’라는 말은 그들이 헌터 협회를 짓고 ‘헌터’들을 맞아들일 준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건물을 짓고 사람을 고용하고 헌터가 필요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짐작하건대 적어도 5년 정도는. 하지만 ‘황금 발톱’의 시작 시기를 고려해 보면 이 시점에 이미 밑 작업은 끝난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왜 시더의 연구를 노리는 걸까? 이미 필요한 건 다 갖춘 것 같은데.
설리번 박사가 정보상에게 물어봤다는 시공간 기계. 그걸 찾고 있는 건가? 하지만 시더의 발명품 중에 그런 건 없었다. 있다면 ‘황금 발톱’에 필적할 만한 발명일 텐데. 아니면 그걸 만들어 주길 바라는 건가? 그래서 마도 공학자들을…….
어느 쪽이든, 그들과 대적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직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지만.
이 편지로 알아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나인 호더에 갈 수 없는 이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정보이기는 했지만 당장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공작이 편지도 보낼 수 없을 만큼 감시당하고 있다는 건 예상외네요.”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시더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게 왜요?”
“공작의 거처인 파인먼트 하우스는 어거스텀보다도 더 오래된 궁전이고, 고용인들도 대대로 왕실을 모셨던 명예로운 출신이죠. 그런데 공작이 편지 하나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감시받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들이 공작의 눈치는 안 봐도 아직 사회의 시선은 신경 써야 할 텐데요.”
“그치만 저번에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다치기도 많이 다쳤고. 부족한 일손을 충당할 때 자기 사람을 밀어 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일이 기회가 되었다 해도, 그렇게 제대로 검증도 안 된 인물을 공작의 측근으로…… 아, 그래요. 그 부분은 문제가 없겠군요. 공작만 협박하면 되니까.”
공작은 스스로 자기 측근에 다리아의 수족을 감시자로 심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암호를, 코델리아를 통해서 보냈고요. 그건 어떻게 한 거지?”
감시자가 공작이 코델리아를 만나는 걸 두고 봤을 것 같진 않다. 접점 없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만날 방법도 없고, 접점을 만들 구실이 있다고 해도 감시자의 눈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짐작 가는 구석이 있는데, 어쩌면 이 암호도 공작이 만든 게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누가? 이런 상황에서 공작이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한 명 있죠.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한 명 있다. 다리아도, 사이러스도, 어쩌면 여왕조차 상상도 못 했을 사람. 그래서 감시하지 않았을 테고, 코델리아와 마주치더라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건 갈리스턴은 그 사람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 자신보다도 더 잘 활용하는 사람이니까요.”
시더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페란사의 탁자에서 두꺼운 책을 가져왔다. 회색 눈동자가 탐구심으로 번뜩였다. 에스페란사가 픽 웃으며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 증명을 위해, 한번 잘못된 열쇠로 암호를 풀어 볼까요?”
* * *
글라일리 하우스에 공작의 암호가 도착한 날로부터 닷새 전. 던전의 피해를 이겨 내고 새 단장을 시작한 파인먼트 하우스는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천한 것들이 어딜 손대는 거야! 비키지 못해?”
신경질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쏟아졌다. 갈리스턴 공작 에드먼드는 눈짓으로 도청기의 위치를 확인했다.
알렉산드라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유용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전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아픈 조카를 보겠다는데 네까짓 놈들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말이야?”
공작의 새 시종은 어깨와 머리로 쏟아지는 공작 부인의 부채 세례를 그대로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드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감히 공작의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따박따박 명령을 읊던 다리아의 사람이 얌전히 얻어맞고 있다는 것이 어쩔 도리 없이 즐거웠다.
“에드먼드!”
두꺼운 이불에 감싸여 누운 갈리스턴 공작을 발견한 셔버리 공작 부인이 방 안으로 뛰다시피 들어왔다. 혹시라도 시종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쾅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가 아프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더구나!”
공작 부인이 커다랗게 소리쳤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아니기는! 열다섯 살 이후로 이렇게 앓는 꼴은 처음 봤어. 그때 내가 널 제법 열심히 간호했지. 넌 은혜도 모르는 꼬마였지만.”
재잘거리던 셔버리 공작 부인이 말을 뚝 멎고 눈치를 살폈다. 공작이 나무라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공작 부인은 잔소리를 좀 더 해도 되겠다 싶었는지 허리에 손을 얹고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날 또 간병인으로 부려먹으려는 거니? 내가 그런 험한 일을 못 하는 걸 알면서 그러는구나. 그냥 불쌍한 네 숙모를 괴롭히고 싶은 거지.”
“숙모님 같은 간병인을 고용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낭비는 하지 않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간단한 수신호를 알아본 공작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조금 더 친밀했었던 때에, 말로 하는 언어 대신에 쓰던 것이다. 따돌림당하는 망명 공주와 아버지의 그림자에 짓눌린 소년이었을 때에.
에드먼드가 아직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 누그러진 공작 부인이 부채를 탁탁 두드렸다.
“흥, 흥.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니.”
“무슨 일을 시켜도 제대로 하는 법이 없으시니 말입니다.”
“그래서 내게 주던 품위 유지비도 깎았잖니, 응? 덕분에 내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 알면서 그래.”
식사를 굶거나 해진 옷을 고쳐 입고 다닌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석을 모으고 자랑하는 것은 공작 부인의 유일한 낙이자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그것이 없는 삶은 비참했다. 에드먼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달부터는 원래대로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숙모님께서 저를 다시 실망시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숙모님께 무슨 일을 맡기겠냐마는. ……이왕 오셨으니 차나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테이블 위에 붉은 찻물이 글자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숙모님의 악취미가 떠오르는군요. 적을 많이 만드셨죠.”
“뭐, 뭐. 또 날 나무라려고 그러는 거니? 요즘 내가 얼마나 조용하게 살고 있는데.”
“글쎄요. 왕성 출입 금지 조치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는데 무도회장에 자주 드나든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이번엔 얌전히 파티만 즐기다 나왔어. 정말이야, 누구한테든 물어봐도 좋아!”
공작이 들으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수건으로 찻물을 닦은 그는 손끝을 잔에 담가서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공작 부인이 읽을 수 있게 천천히.
“10년 전에 숙모님이 그 무도회의 호스티스를 단단히 망신 주신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그땐 나도 어렸잖니! 이제는 안 그래. 그러니까 품위 유지비는…….”
사교계의 무법자, 알렉산드라 공주. 에드먼드는 그 자자하던 악명을 떠올리며 실소했다. 따돌림당해도, 망명자 신분이라 가난하기 짝이 없어도 공주는 공주. 알렉산드라는 선왕이 귀애하던 철부지 막내아들과의 혼담으로 일약 오스던 왕족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왕실의 비호를 무기로 자신을 경시하던 사교계 아가씨들에게 단단히 복수했다.
그때 사용한 것이 암호였다. 골탕 먹이고 싶은 숙녀에게 암호로 쓴 초대장을 보내고, 잘못된 열쇠로 암호를 풀게 해서 엉뚱한 답을 도출시키는 것이다. 교묘하고 악질적인 괴롭힘이었지만 공개적으로 문제 삼을 수도 없었다. 상대는 직전까지 그들이 따돌리던 망명 공주였으며, 이제는 공작 부인이었으므로.
“다시 한 번 문제를 일으킬 시에는 제 선에서 넘어가 드릴 수 없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럼! ……네, 네가 얼마나 관대하게 봐주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단다. 응, 그렇지.”
공작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셔버리 공작 부인을 올려다보았다가, 천천히, 커다랗게 썼다.
“잘하실 거라 믿겠습니다.”
“……잘한다니까. 나는 늘 네 말을 잘 들었잖니.”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수건을 꺼내 흔적이 남지 않게 차를 닦아 냈다.
“어머!”
공작 부인이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그 위로 차를 부었다. 그리고 찻잔을 던지다시피 하며 벌떡 일어났다.
“나, 나는 그만 가 봐야겠다! 에드먼드, 실수였어, 정말이야! 밖에 누구 없니? 와서 이것 좀 닦아!”
허둥지둥 나가는 공작 부인은 정말로 두려워 보였다. 공작은 소매가 흥건히 젖은 셔츠를 보며 천천히 혀를 찼다.
‘알렉산드라는 대체로 쓸모없지만…….’
그래도 사교계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갈고닦은 눈치와 얄팍한 중상모략은 제법 괜찮았다. 그의 편지는 무사히 글라일리 하우스에 도착할 것이다.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사교계와 우체국에 세력을 충분히 심어 두지 못했다면 말이다. 그걸 확인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공작 전하, 손님을 들이는 일은 자제해 주십시오.”
겨우 공작 부인을 보내고 돌아온 감시인이 딱딱하게 말했다.
“주의하도록 하지.”
에드먼드 새턴은 다색으로 물든 셔츠 소매를 이미 젖은 손수건으로 닦아 내며 답했다. 그러나 찻물이 스며든 셔츠는 갈수록 눅눅해지기만 했다.
아주 조금 숨통이 트이는가 했더니 벌써 다시 답답해졌다. 이 답답함이 해소되는 일은 한동안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