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시더가 책장을 넘기고 에스페란사가 받아 적었다. 마치 한 몸이 움직이듯 착착 맞아떨어졌다.
“DAN. 31페이지 네 번째.”
“녹색.”
해석된 문장은 이러했다. ‘빨간 머리 소녀에게는 녹색이 어울려요.’ 밑도 끝도 없는 소리다.
“그다음 문장은, 음, 여기서부턴 소제목이랑 암호가 안 맞는데요?”
“책을 바꿔야겠군요. 이 문장을 힌트로 본다면.”
골탕 먹이는 방법도 아주 치졸했다. 시더와 에스페란사처럼 제대로 된 책을 찾았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평이하게 풀 수 있는 암호였지만, 잘못된 책으로 시작하면 내용도 없이 계속 책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밀런에게 연락하죠.”
그리하여 책장을 넘기는 역할은 서재를 정리하던 가엾은 시종에게로 돌아갔다. 시더는 축음기처럼 생긴 기계와 선풍기에 가까워 보이는 마이크를 연결했다.
“밀런. 듣는 대로 책을 찾아와.”
―……예, 알겠습니다.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하기 싫은가 보군. 에스페란사는 나직이 혀를 찼다. 연구소와 글라일리 하우스의 거리 탓에, 그리고 밀런이 시더만큼 훌륭한 조수가 못 되었던 탓에, 다음 문장을 해석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다음 줄은 이러했다. ‘두 얼굴의 신사분, 그의 두 번째 얼굴은 아무도 모르죠.’
“아, 이거 그거다!”
또 다음 줄. 암호 자체는 허탈할 정도로 쉬웠다.
“하지만 이래서야…….”
암호는 중간을 건너뛸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앞 문장이 다음 문장의 열쇠였으니까. 문제는, 단지 열쇠일 뿐이란 것이다. 그 이상의 의미도, 정보도 없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쓸데없는 짓을?”
같은 암호를 열쇠에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읽어 낼 수 있게 한 것만 해도 대단히 섬세한 작업이었을 텐데, 그에 비해 내용이 너무 부실했다. 이러다가는 암호를 가로챈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다.
“계속해 보죠.”
시더는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스페란사도 잠자코 불러 주는 대로 받아적었다. 사실 꽤 즐거운 작업이기도 했다. 그렇게 몇 개의 책을 더 거쳤다. 대체로 10년에서 20년 정도 전에 출간된, 자산가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한 권쯤 갖춰 놓을 만한 유명한 문학 작품들이었다.
“음. 마지막 문장이네요. 설마 또 책이 나오는 건 아니겠죠?”
그새 요령이 붙었는지 밀런이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의.
“GEN. 3페이지 마흔다섯 번째 단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밀런이 더듬더듬 숫자를 셌다. 몇 번 잘못 센 적이 있었기에 에스페란사는 몸을 소파에 기대고 밀런이 이번에는 제대로 45를 셀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시더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진심은.
몇 번 더 그런 위기를 지난 끝에 그들은 완전한 문장을 얻어 냈다.
“나의 진심은 뜨거운 불꽃 아래에서 화상처럼 남을 겁니다.”
지금까지의 대체로 직설적인 암호의 흐름을 생각해 볼 때, 열렬한 연애편지 같은 이 문장의 뜻도 짐작할 만했다.
서로 다른 색의 눈이 마주쳤다. 시더가 품 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해 볼까요?”
불꽃을 피우고 편지에 가져다 대려던 순간, 에스페란사가 편지지를 쥔 손을 휙 치웠다.
“잠깐만요. 느낌이 좀 이상해서.”
뭔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종이를 유심히 살폈다. 마력도 없고, 그냥 평범한 종이인데. 아니. 종이의 문제가 아니다.
“잉크가…… 평범한 잉크가 아닌 것 같은데.”
“좀 볼까요?”
시더가 나이프로 편지 한 귀퉁이의 글자를 잘라 내 불을 붙였다. 귀퉁이를 야금 베어 물었던 불이 화르륵 번져 순식간에 커다랗게 타올랐다. 에스페란사는 황급히 시더의 손을 쳐서 떨어뜨리고 불길을 밟았다. 쾅쾅, 아래층이 울리도록 밟아 주고 발을 떼어 내자, 그을린 자국만 남았다.
“증거 인멸용이네요.”
그랬다. 결국 저 문장을 믿고 편지에 불을 가져다 댔다면 편지는 사라졌을 것이다. 내용을 베껴 적었다고 해도 공작이 보낸 편지라는 증거 자체는 사라지는 것이다. 가로챈 자가 직접 증거를 태우게 만드는 교활한 수법이다. 다리아의 경계심은 살 대로 샀으니 이제 와 수단의 정도를 거리낄 것도 없다.
“상당히 치밀한데, 이걸 진짜로 셔버리 공작 부인이 만들었다고요?”
“레이디 퍼스에게 듣기로는요. 망명 공주였던 시절 공작 부인을 따돌리고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망신 줬다고 하더군요. 이런 초대장으로 잘못된 곳으로 유인한 다음 몇 시간이고 세워 둬서 웃음거리로 만드는 거죠.”
“그래 놓고 상대방이 따지면 왜 너 혼자 잘못된 열쇠로 암호를 풀어서 그러냐고 반박하고요?”
그런 머리를 쓸 줄 아는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눈치는 꽤 좋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약자 특유의 기민함이었다.
“남 괴롭히는 데는 재능이 있는 모양이에요. 당신도 당할 뻔했잖아요.”
손등을 톡톡 건드리며 하는 말에 에스페란사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런 일도 있었지. 실제로 곤욕을 치른 건 공작 부인 쪽이겠지만 말이다.
“뭐, 아무튼 흥미로운 암호였어요. 만드는 건 물론이고, 푸는 것도 앞으로는 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시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그는 꽤 즐긴 모양이었다. 에스페란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좋아요. 그럼 암호 문제도 해결됐으니, 당신은 날 좀 도와줘야겠어요.”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내 도움이 왜 필요한 거예요?”
한동안 앉아 있어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 에스페란사에게선 말투와 달리 들뜬 티가 났다. 지금까지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이 기계가 저 기계로 바뀌기만 하던 시더의 연구에서 드디어 에스페란사가 알아볼 수 있는 성과가 난 것이다.
“보면 알아요.”
뭐지?
시더가 방문을 열었다. 기계가 삼면을 채운 방 안에 부품이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커다란 금속제 날개를 받침대 위에 세워 두고 있었는데, 언제나 조금씩 빈 느낌이 있던 날개 아래의 공간이 기계 장치로 꽉 차 있었다.
“완성된 거예요?”
에스페란사가 날개 끝을 쥐어 보며 말했다.
“아뇨. 하지만 중요한 기술이 완성 직전 단계예요. 실험이 필요해서 불렀어요.”
“또 피 뽑아 가요?”
“그런 건 아니고.”
익숙하게 팔을 걷던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였다. 아니, 나는 달라고도 안 했는데 왜 주려고 했지?
“소매는 내리고, 한쪽만 해 볼래요?”
에스페란사는 자기 팔보다도 길고, 묵직한 기계 부품으로 가득한 날개 한쪽을 흘끔거렸다. 완성되기 전에도 어마어마하게 무거웠던 기억이 있다.
“차라리 둘 다 착용해 보는 게 낫지 않아요? 균형이 안 맞아서 넘어질 거 같은데.”
물론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시더가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좁아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벽에 기대서 해 볼게요.”
시더는 한쪽 날개를 들어 벽에 기댄 에스페란사의 어깨에 채웠다.
“마력을 불어넣어 봐요. 총에 넣던 것의 반 정도만, 천천히.”
부품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에 진짜 날개가 돋아나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천천히 불어넣은 마력이 날개 끝까지 퍼지며 커다랗게 한 번 펄럭였다. 촘촘히 엮은 금속 깃털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방향 조절이나 속도 조절은 어떻게 해요? 원격 제어 장치가 따로 있어요?”
“마력으로 조절해 봐요.”
어, 설마? 에스페란사는 날개와 시더를 번갈아 보았다.
“어, 이거, 어어? 되네? 이게 어떻게 돼요?”
속도는 뭐, 그렇다 치고. 방향 조절까지도 가능하다고? 팔을 다른 방향으로 뻗듯이 마력 방향을 조금 바꿔 준 것뿐인데?
마치 팔다리를 움직이듯이, 마력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날개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신기술이죠.”
“쓸모없는 신기술이잖아요. 그러니까…….”
마정석에 저장된 마력을 기계 장치로 뽑아 쓰는 마도 공학의 관점에서는. 기술이 있어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니 이것은 단 하나뿐인 마법사를 위한 기술이다.
지금까지 시더가 만들어 주었던 모든 것들이 기본적으로 강한 마력을 지닌 에스페란사가 쉽게 쓸 수 있는 마도구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리에 마정석을 끼워 넣으면 다른 사람들도 사용할 수는 있었다. 던전에서 마법은커녕 마도 공학도 모르는 사람들이 에스페란사의 인벤토리에서 나온 마법 무기를 사용했듯이. 하지만 이것은 다르다. 이건 에스페란사만을 위한 것이었다.
한쪽 어깨에 강철 날개를 단 채로 벽에 기대선 에스페란사가 다시 한 번 천천히 날개를 움직여 보았다. 없던 날개가 돋아난 것 같았다.
상기된 뺨과 반짝이는 눈을 한참 바라보던 시더가 손뼉을 쳤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자, 숙녀분. 아직 완성된 게 아니란 말을 했던 것 같은데요. 확인할 게 있으니까 이제 그만 움직여요.”
아, 맞다. 그랬지.
에스페란사가 천천히 날개를 펼쳤다.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모양이 되자, 시더는 다른 기계들을 연결했다. 울리는 소리가 나자, 에스페란사가 이마를 찌푸렸다.
“몇 가지만 확인해 볼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커다란 스크린에 설계도가 떴다. 그 아래에 그려진 그래프를 뜯어 내자 빈 종이가 남았다.
“날개를 위쪽으로 들어 봐요. 그렇게.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마력만 넣어 봐요.”
기계 장치가 복잡하게 돌아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불쑥 말했다.
“당신, 마력 제어가 굉장히 섬세하군요?”
“어, 그런 편이죠?”
“좋아요. 그럼 이번엔 소리가 좀 클 텐데, 날개를 접어 봐요.”
“접으라고요?”
“새가 날개를 접듯이.”
“그치만 여기 다른 기계들이…… 망가질 텐데.”
“그건 걱정 말고.”
어차피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날개를 접듯이, 기계 장치 안쪽으로 넓게 편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날개에 연결된 기계들이 굉음을 냈다. 뭔가가 바쁘게 돌아가고, 부품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치과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불안한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소리였다. 에스페란사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다시 펴도 좋아요.”
“괜찮은 거예요?”
“아, 원래 오류가 있어서. 뭐가 문젠가 했는데 대충 알 것 같네요. 회로 몇 가지만 손 보면 끝날 거예요.”
“그러니까 저기 다 부서지는 소리 내던 기계 괜찮냐고요.”
시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부서지는 소리가 났으니 부서졌겠죠? 신경 쓰지 말아요. 부서질 거 알고 해 보라고 한 거니까.”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흘겨보았으나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에스페란사의 팔에서 날개를 떼어 내 주었다. 마력으로 들어서 좀 수월하긴 했지만, 무겁기는 정말 무거웠다. 모래주머니를 떼어 낸 것처럼 팔이 가볍게 느껴졌다.
“이제 다 된 거예요?”
“마무리만 하면요. 아무래도 오늘 밤엔 당신 혼자 들어가야겠네요.”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