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래 봬도 글라일리 하우스에서 사는 동안 시더 클라이번에게 제법 건강한 생활 습관을 심어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밤을 새겠다고요? 또? 아니, 당신이 잠을 자면 얼마나 잔다고……!”
날개를 다시 받침대 위에 올려 둔 시더가 대꾸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완성이 코앞인 이걸 두고 집에 간다고 해도 한숨도 못 잘걸요.”
죽는다고 해도 그게 오늘은 아닐 테고. 시더가 차마 못다 한 말을 숨겼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의 뻔뻔스러운 태도도 잘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어이 밤을 새우겠다고요? 그냥 내일 하면 안 돼요?”
“걱정은 고맙지만, 암호문을 떠올려 봐요. 우린 지금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시더가 하룻밤 푹 잘 여유조차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날개 밑의 기계 장치를 바라보는 시더의 표정을 보아하니 말릴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 그럴 바에는…….
“음, 그럼 나도 여기 남아 있을까요?”
“당신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어투라,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발끝을 모으며 쏘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내가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요. 기계가 일하는 동안 당신이 심심하지 않게 말동무 노릇이나 하죠. 왜, 나이 든 귀부인들은 말동무를 고용하기도 하잖아요. 할 일 없으면 훈련하고 있어도 되고.”
말을 해 놓고도 왠지 썩 설득력 있는 대답이 아닌 것 같긴 했다. 에스페란사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뺨이 화끈거렸다.
그래,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에스페란사가 있으나 없으나 이 남자는 밤새도록 기계 장치에 파묻혀서 한마디 나눌 정신도 없을 것이다.
“……싫으면 말고요.”
시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에스페란사의 뺨을 당겼다. 쏟아부을 듯 급하게 다가오던 입술이 손가락 한 마디 거리를 앞두고 멈추었다. 피하지 않고 파르르 떨리기만 하는 눈꺼풀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맙지만 당신은 집중에 방해돼요.”
아까보다는 조금 천천히, 이번엔 뺨에 가볍게 닿은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보다 더 깊게 얽힌 시선이 아쉬운 듯 서로의 눈가에서 헤맸다. 원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 그리고 말하지 않은 것은 가질 수 없다.
“내가 있을 때도 잘만 집중하면서.”
에스페란사가 뒤늦게 불평했다. 시더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비밀을 속삭이듯 말했다.
“에스페란사, 당신 옆에서 제대로 집중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 * *
“집중이 안 돼.”
암호 해석본을 들고 침대에 누운 에스페란사가 숨을 터뜨리듯이 말했다.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니는 이미 불을 끄고 창문을 닫아 준 다음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이 커다란 침실에는 에스페란사 혼자뿐이었으니까.
시더 클라이번이 에스페란사의 기동력을 확보해 주기 위해서 밤샘 연구를 하는 동안, 에스페란사도 이 암호에서 캐낼 수 있는 정보를 조금 더 고민해 보는 중이었다.
분명히 이맘때에 해적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게…….
“아, 파오룬 해적!”
그래!
거기까지 생각해 낸 건 좋았다. 그런데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기억이 안 났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게임이 오픈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고,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에스페란사가 알고 있다면 적어도 작은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기억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무릇 기억나지 않는 것을 떠올릴 때면 그 전후의 사건들을 상기하며 조금씩 퍼즐을 맞춰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작업은 조금도 성과가 없었다.
이게 다 시더 클라이번 때문이다. 시더가 에스페란사에게 키스했기 때문이다. 고작 뺨이었지만,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그 순간 그가 멈추지 않았다면 그대로 입을 맞췄을 테고, 에스페란사는 거부하지 않았으리란 걸. 알면서도 하지 않았고, 하지 않은 이유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입술을 뺨으로 미끄러뜨리던 순간의 미소를 떠올리자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에스페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시더는 연구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그는 연구를 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잠들지 못하는 것은 에스페란사도 마찬가지였다. 시더가 뭘 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에 손에 들린 암호문 따위엔 조금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보고 싶다니.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으면서.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고작 뺨에 입술을 눌러 붙인 것뿐인 키스였는데, 고작 그것뿐인 키스에 잠 못 이루는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보고 싶으면 당장 달려가서 봐도 되고, 같이 있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쫓아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어설픈 관계에서 한 발짝 더 나가려면, 물어야 할 질문이 있었다.
나는 당신이 아는 이 세상의 13년 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왔고, 그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걸 알고도 정말로 괜찮으냐고.
그리고 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게 된 계기는…….
게임이지.
그게 문제다. 차라리 신비한 이유로 차원을 넘어 이 세계에 떨어졌다가 타임슬립까지 하게 됐다는 이유였다면,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친구로 생각했던 순간에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란 건 유희고, 유희라는 건 허상이다. 그래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더가 모르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시더가 이미 알고 있는 부분에 있었다. 어디로 떠나든 에스페란사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더는 그 결말을 알고, 심지어 에스페란사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슬퍼질 뿐인데 왜 이 관계에 매듭을 지으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른 척하라는 시더의 말은 배려였지만 결국은 독이 됐다. 필사적으로 외면하느라 묻지도 못하고 휘청대는 사이 모른 척해도 소용없는 단계까지 밀려오고 말았다.
“그러니까, 정말로. 왜?”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이 결국 터져 나왔다. 에스페란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끝까지 모른 척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수밖에 없다.
암호문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주방으로 달려 내려갔다. 두꺼운 숄에 덮인 잠옷 자락이 다리를 감았다.
빈 주방에서 우유를 데우고, 찬장에서 과자를 꺼내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되지 않았다. 우유에 꿀 한 스푼을 풀어서 인벤토리에 넣은 에스페란사는 여느 때와 같이 창문을 넘어 내려와서는 마치 해가 뜨길 기다리듯 걷다가,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숲에 도달했을 때는 발밑에 마력을 휘감은 채였다.
깊은 숲 안의 연구소는 어둠에 잠겨 고요했다. 시더가 타고 온 말이 마구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2층의 서재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흘러나왔다.
저기로군.
튀어나온 벽돌을 밟고 벽을 타고 올랐다. 발밑에서 벽돌 끄트머리가 조각나 굴러떨어졌다.
창틀에 올라앉으니 커튼 사이로 시더의 뒷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날개를 세워 둔 받침대 앞에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은 그는 부품을 바꾸는 중인 것 같았다. 흰 셔츠에 감싸인 넓고 곧은 등이 천천히 일어났다.
들킨 줄 알았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에스페란사는 숨을 죽이고 시더를 지켜보았다. 그는 책상으로 향해 노트에 뭔가를 휘갈겨 적고는 다시 기계 앞으로 돌아왔다.
뒷모습뿐이지만 강렬한 몰입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생각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자기 자신조차 안중에 없는 몰입. 에스페란사가 전투에서 느끼는 바로 그것. 얼핏 드러난 옆얼굴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집중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더가 연구에 몰입한 만큼 그를 지켜보는 데 몰입했다. 질문 따윈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중요한 질문이라도, 물어볼 것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늦은 밤에 이 외진 숲속의 연구소까지 한달음에 달려오게 되지는 않는다. 낮에 입술이 닿았던 뺨을 한 손으로 감싼 채 쓴웃음을 지었다.
기계는 불꽃이 튀다가 덜그럭 멈추기 일쑤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더는 할 일을 멈추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그저 완벽하게 뻗은 몸이 불평 한 번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에 실험 결과로 보이는 숫자를 메모하고 새로운 부품을 끼워 넣길 반복하는 모습을 멀뚱히 구경해야만 했다.
시더는 그 무수한 실패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철저히 집중을 유지했다. 에스페란사가 조용히 우유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창틀로 돌아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 듯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갔다. 종이와 먼지, 잉크, 희미한 금속 냄새가 섞인 방 안의 공기는 증기 때문에 약간 습했다. 규칙적인 기계 소리에 맞춰 숨을 조심히 내쉬었다. 창문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맑아졌다. 언뜻 기계 소리가 멈추면 에스페란사도 함께 숨을 참으며 무릎으로 입을 막았다.
여기까지 왔을 땐 그냥 지켜보기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한참 동안 숨어서 지켜봤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잠시 멎었던 기계가 곧 다시 차르륵, 톱니바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에스페란사는 참았던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한 마디 정도 열린 창문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역시 있었군요.”
밤에는 더욱 선명한 빛을 띠는 회색 눈동자가 웃음기를 띠며 가늘어졌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방금 알았어요.”
하긴, 진작 알았다면 에스페란사가 먼저 눈치를 챘을 것이다.
“들어오지 그랬어요.”
“……집중하고 있길래요.”
시더는 콧등을 살짝 찡그리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야 그렇지만.”
할 말이 없어진 에스페란사가 입을 다물었다.
“언제 왔어요?”
“얼마 안 됐어요.”
사실 얼마나 됐는지는 전혀 모른다. 숨죽인 채 시더가 연구에 몰입한 모습을 지켜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까. 이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지만.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모양인지, 시더는 믿어 주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잠이 안 왔나 보죠? 말동무라도 필요했어요?”
시더는 ‘왜 왔냐’고 묻는 대신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긴장한 줄도 몰랐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무릎을 모아 앉은 에스페란사도 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나 봐요.”
에스페란사의 뺨에 웃음기가 돌아오자, 시더도 마주 빙긋 웃었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당신이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부를 수가 없었어요.”
“안 풀리는 게 있어서요. 실마리를 잡았으니 오늘 새벽에는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 같아요.”
에스페란사가 본 것은 시더가 기계를 망가뜨리고 터뜨리는 모습뿐이었지만,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서, 당신을 밤늦게 여기까지 달려오게 한 용건은?”
당신이 보고 싶어서요.
“할, 말이 있어서요.”
시더의 입술이 비스듬한 선을 그렸다. 짐짓 교만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뜬 그가 다시 물었다.
“그것뿐인가요?”
“……일단은요.”
“그래서 들어오지 않는 건가요?”
“비슷해요.”
부끄러워서라고는 말하지 말아야지. 그 말을 하는 게 더 부끄러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