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3
13화
그는 어쩔 수 없이 불결한 곳에 발을 디뎠다. 고급 수제화와 마감이 잘 된 지팡이가 구정물과 포장 안 된 흙이 섞여 질척한 땅을 밟는다. 오만한 신사는 앞만 보고 걸었다. 뒷골목의 하류 인생들은 숙녀는 건드려도 신사는 건드리지 않는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럴 때는 뒷골목 놈들이 좋아하는 무력으로 상대해 줘야지. 동물 몸에도 박는 총알을 사람 몸에 박는 것이 어렵겠는가?
시더의 지팡이 끝이 벌어지며 둥근 총구가 밀려 나왔다.
“마법 권총이다.”
“귀족…….”
수군대는 소리가 마치 쥐새끼들이 찍찍거리는 것 같다. 시더는 불쾌한 낯을 감추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를 찾으면, 한 소리를 해 줘야겠다. 한마디, 딱 그 정도. 그리고 럭스 부인 앞에 던져 놓을 것이다. 그러면 잔소리는 럭스 부인이 알아서 하겠지.
딱, 딱, 지팡이 소리가 좁은 뒷골목에 울린다. 시더는 깊숙이 들어가면서 귀족 티를 숨기지도 않았다. 그가 이곳에 발걸음 하지 않은 이유는 불결하기 때문이지 두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리, 빵 한 조각만…… 사흘을 굶었어요.”
어린아이가 그의 바짓단을 붙들려 들자, 시더는 내려다보지도 않은 채 지팡이로 손을 떼어 냈다. 궐련을 비벼 끄듯 짓누르지는 않아도 충분히 매정했다. 그 틈을 타 그의 코트 주머니를 뒤져 보려던 소녀가 멈칫했다.
시더는 혀를 찼다. 쥐 떼처럼 모여든다. 이래서 오기가 싫었다. 마치 그가 어린아이는 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이. 시더는 보란 듯 총을 장전하고 소녀의 이마에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떨어진 곳에 댔다. 느리고 우아했다. 그들을 해치우는 데 조급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아이는 태세 전환이 빨랐다. 시더가 물었다.
“여기 어떤 숙녀분이 지나가지 않았니?”
“저쪽으로 갔어요! 돌아서…….”
생각보다 깊숙이 들어갔나 보다. 시더는 혀를 찼다. 장총을 겨누어도 눈도 깜짝 안 하던 배포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소녀가 가리킨 어둑한 길로 꺾는 순간, 시야가 휙 돌아갔다. 굴뚝의 재로 시커멓게 변한 불결한 벽에 등이 닿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느낀 것은 불거진 울대 위의 칼날이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예술에 가까운 움직임.
새까만 후드, 작은 키, 밀착된 몸. 여자다. 그의 목에 가는 검 두 자루를 겨눈 여자. 그러나 방심할 수 없는 속도와, 아무리 기습이었다지만 훨씬 작은 체구로도 그를 순식간에 밀어붙인 힘.
살기를 갈무리하지 않은 눈빛이 번뜩인다. 휘황한 보라색 눈. 씨실과 날실을 엮듯 시선이 얽혀 들었다. 전율이 일었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 팽팽한 긴장과 섬뜩한 희열. 시더는 이 여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손을 뒤로 뻗어 여자의 이마까지 내려온 후드를 젖혔다.
“……에스페란사.”
굳었던 근육이 풀어졌다. 찾았다는 안도감은 그다음에야 들었다. 시더는 퍼뜩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했다.
‘다친 데가 한 군데도 없나? 그 핑계로 피를 좀 더 뽑아갈 수 있을 텐데.’
에스페란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사냥을 앞둔 맹수의 눈처럼 번뜩이던 보랏빛 눈동자가 온순해졌다.
“로드 에이번데일? 대체 왜 여기에 들어온 거예요? 벌써 얘기가 끝났어요?”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여기 먼저 들어온 사람이 누군데? 에스페란사가 아니었다면 시더가 이 더러운 곳에 발 디딜 일이 있었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방금 밀쳐지면서 코트도 더러워졌을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조금 더 가라앉은 시더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가 할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잠자코 혼나기는 싫었다.
“나는 뭐. 아, 나 쫓기고 있어요. 얼른 나가요.”
시더는 할 말이 많았지만, 한 시도 더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으므로 얌전히 따라갔다. 빨리 이 더러운 코트도 벗어 버리고 싶었다. 연구실 외의 장소에서 연구 외의 목적으로 더러워지는 건 질색이었다.
어쨌든 피 묻은 검을 든 여자와 마력탄이 장전된 권총을 든 남자는 군침 도는 차림임에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곧 뒷골목을 벗어났다.
에스페란사는 세검과 후드를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시더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마법 가방이 아니었군요.”
“이건 못 줘요.”
“달라고 안 했어요.”
탐냈으면서!
“사죄의 표시로 준다면 받겠지만, 일단은 다른 걸 묻고 싶네요.”
역시 탐냈군.
“혼낼 건가요?”
“그건 럭스 부인이.”
시더가 오만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렇다면 됐다. 말 한마디도 꼬투리를 잡지 않곤 못 넘어가는 시더 클라이번과는 달리 럭스 부인은 푸근하고 관대한 성정이었다. 오지랖이 좀 심하긴 하지만 이쪽에서 맞는 매보단 그쪽에서 맞는 매가 덜 아플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수확은 좀 있어요?”
“아뇨.”
“사고를 쳐 놓고 수확도 없고?”
“면목이 없네요.”
사실 그렇게 면목이 없지는 않았다. 뒷골목에 들어갔던 일은 수확이 없었지만 어쨌든 마법 용품점에서는 나름대로 발견해 낸 게 있었고, 적어도 조사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알게 됐다는 점에서 오늘의 외출은 목적한 것 이상을 이룬 셈이었다.
“수습하지 못할 일이면 모를까 당신은 근접 전투력도 상당한 것 같으니, 그건 됐어요. 그런데 그 검은 처음 보는 물건이던데?”
“보여드려요?”
“연구실에서요.”
“아, 네.”
사실 이 세검은 마도 공학적으로 특별한 물건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검이니까. 재질이 특이하고 그만큼 날카롭다는 점과, 장비를 착용하면 민첩도와 공격력이 상승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능력치가 높을 뿐이지 그런 옵션들은 웬만한 무기들에는 다 붙어 있으니까.
낫에는 없지만.
그 부분에 대한 죄책감은 피를 나눠 주면서 버렸기에 에스페란사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가죽은 사 왔어요.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나중에 설명해요.”
“나중에요?”
지금 해도 되는데?
그 의문에 시더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없을 테니까.”
때마침 마차가 멈추면서 증기를 뿜어냈다. 시더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리는 동안에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시더는 럭스 부인에게 더러워진 옷가지를 넘겨주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대체 마법 용품점에 다녀오신다는 분이 옷 꼴이 이게 뭐예요, 백작님이 아직도 열 살짜리 어린아이인가요?”
“어떤 아가씨가 뒷골목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그는 천연덕스럽게 에스페란사를 제물로 바쳤다. 럭스 부인의 얼굴이 야차처럼 변했다.
“아가씨는 교양 있는 분이니 늙은이의 잔소리가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가 어리석었군요. 에스페란사 아가씨, 숙녀는 뒷골목에 가지 않습니다.”
뒷목이 서늘해졌다. 허리에 손을 얹은 럭스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장 세 시간 동안 이어질 잔소리의 시작이었다.
* * *
오늘은 시간이 없을 거란 시더의 말은 사실이었다. 럭스 부인의 잔소리가 겨우 끝났을 때, 에스페란사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씻고 나오고 나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다. 한 끼쯤 굶어도 괜찮잖아.
럭스 부인은 정말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맞는 말이었다. 숙녀는 뒷골목에 가지 않는다는 것도, 에스페란사는 숙녀가 아니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럭저럭 이해할 만했다. 진짜 숙녀는 뒷골목에 가지 않겠지.
대 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에스페란사는 눈만 깜박거렸다.
‘그 망할 인간, 봐주는 듯하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리다니.’
그래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찾기 위해 뒷골목까지 직접 찾아왔기 때문이다. 질색하면서도 에스페란사를 염려해서 거기까지 왔는데, 실수였다곤 하나 검을 겨눈 데다 옷도 더럽혀 버렸으니 이 정도 심술은 당해 주는 게 맞다.
시더 역시 에스페란사가 미안하다고 쩔쩔매는 것보단 잠자코 자기 심술을 받아 주는 쪽을 선호할 거란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아니지, 그쪽이 선호하는 건……’
피라도 뽑아 줘야 하나? 저번 정도라면 아프지도 않고 상관없었다. 하지만 절대 마력 측정을 해 주진 않을 것이다.
시더의 몸을 매개체로 손끝에 닿은 부분만 측정했을 때도 따끔거렸는데 마력판에 직접 올라가면? 따끔한 수준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음. 솔직히 그렇게까지 고마운 건 아니었다.
“에스페란사 아가씨, 식사 안 하실 건가요?”
애니가 샌드위치를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 식사로 먹을 만한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듣자 하니, 이 댁 주인도 연구 중에는 이런 식으로 때운다고 하니까. 백작님이 드시는 음식에 손님이 토를 달 순 없는 노릇이다. 사실 배가 고프기도 했다. 에스페란사가 샌드위치를 집으려고 할 때, 애니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럭스 부인의 엄명이에요. 백작님께 가져다드리고, 두 분이 같이 접시를 비우실 때까진 나오지 못하신다고요.”
“럭스 부인이 이제 나 싫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피곤해 죽겠는데 그 갑갑한 서재로 등을 떠밀다니.
“그럴 리가 있겠어요? 럭스 부인은 그냥…….”
애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냥 백작님이 난생처음으로 숙녀분께 관심을 가지자 지나치게 들뜬 것뿐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어쩔 수 없지.”
뜨거운 물로 씻었기 때문인가, 막상 일어나려니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다. 애니가 서재까지 샌드위치 쟁반을 들어 주었다. 에스페란사가 극구 사양했음에도, ‘럭스 부인의 명령’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정말 신뢰를 잃은 모양이다.
서재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거리낌 없이 서재 안쪽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