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31
131화
손끝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뼈마디를 세듯이 느리게. 그리고 허리 바로 위에서 멈췄다.
철컥. 기계가 맞물렸다.
“이건 어때요?”
“좀 빠듯해요. 그러니까, 막힌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럼 이렇게 하면?”
뭔가 더 조작을 하는 것 같더니 막힌 듯했던 마력 운용이 편해졌다. 굳었던 어깨를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시험 삼아 날개를 움직여 보자 차르르륵 매끄러운 소리를 내며 접혔다. 강철 날개는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런 건 확실히 시더 클라이번이 잘하는 부분이다.
“어, 오른쪽은 끝까지 안 닿는 것 같은데. 끝에 좀 뚫어 줘 봐요.”
“아까까진 괜찮았잖아요? 잠시만 기다려요.”
연구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서 시더의 연구실에 불려 올 일이 많아진 에스페란사는 제법 능숙하게 시더가 내미는 부품들을 받아 들었다. 다음에 필요한 부품이 뭔지 이유는 몰라도 눈치로 대충 알아맞힐 수 있었다.
“그거 말고, 3번으로 줘요.”
아직 확률은 반반이지만.
삐걱거리는 기계 장치를 다시 끼워 맞춘 시더가 반대편 날개로 옮겨 갔다. 에스페란사는 뼈마디가 전부 드러난 날개를 펼친 채로 마도 공학자의 손이 회로를 마저 조립할 때까지 기우뚱 서 있었다.
핀셋으로 작은 부품들까지 맞춘 시더가 몸을 일으켰다. 오른쪽 눈가에 걸쳐 놓았던 외알 안경을 벗은 그는 일지에 뭔가 빠르게 휘갈긴 후 내려놓았다.
“확인해 봐요.”
“이젠 괜찮아졌어요.”
“다른 부분은? 아니, 아예 처음부터 다시 한 번 확인할게요.”
그 지루한 검사를 첫 단계부터 끝까지 반복한 후에야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등에서 날개를 떼 주었다.
“아, 드디어 끝났다.”
“난 아직 멀었어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주저앉은 에스페란사가 울상을 하고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또? 시더는 두툼한 일지를 만년필 머리로 두드리며 말했다.
“다시 한 번 검토해 봐야겠어요. 아까 같은 오류가 하늘 위에서 발생하면 위험하잖아요.”
그건 그렇다. 내심 ‘죽기야 하겠어?’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날 여기 두고 갈 건가요?”
“그럼 내가 여기서 뭘 하겠어요.”
시더는 눈을 찡그렸지만 그도 에스페란사가 여기서 할 일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스페란사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뺨에 입을 맞추자 시더는 잠시 멈췄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곧 연구실 문이 열렸다.
서재로 돌아온 에스페란사는 헐렁해진 머리를 다시 묶고 책 더미를 뒤적거렸다. 오늘 아침에 콜먼의 손자라던 서점 주인에게서 주문한 소설책들이 도착한 참이었다.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적당히 자극적인 소설책 하나를 펼쳐 놓고 몇 장 넘겼다. 첫 문장부터 스산했다.
쨍한 햇빛이 서재 안으로 깊숙이 드리웠다. 종이가 환해지고 잉크는 반짝거렸다. 고딕 소설을 읽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이리저리 튀는 정신을 붙잡고 쓸데없는 생각을 좀 하다 보니 결국 오후의 볕에 이기지 못한 고개가 꾸벅꾸벅 넘어가기 시작했다.
머리가 앞뒤로 흔들리다가 퍼뜩 깨어난 에스페란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안 왔네…….”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면서 책을 내려놓았다. 뭘 얼마나 자세히 보길래 아직까지 나타나질 않는 거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복도 끄트머리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냉큼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한 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자니 시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피곤해 보이는 낯을 한 손으로 쓸어내린 그는 일지를 책상 한편에 올려놓고 에스페란사가 앉은 소파로 다가왔다.
“취향에 맞나 보죠?”
“이거요? 그럭저럭 나쁘진 않아요.”
“그런 것 치고는 진도가 느린데.”
알 만하다는 듯이 말끝이 늘어졌다. 왜 또 다 안다는 듯이 저러는 거람. 불만스레 입술을 둥글게 말던 에스페란사가 실토했다.
“……졸았어요.”
“그래요. 시간이 졸릴 때긴 하죠.”
오후 한 시 반. 시계를 뚫어져라 보던 에스페란사가 코웃음을 쳤다. 졸릴 때는 무슨. 자고 있을 때겠지.
“당신은 원래 이 시간에 침대에서 안 일어나잖아요.”
“내 침대 사정에 대해 너무 자세히 알고 있는 것 아닌가요?”
“……말을 해도 꼭.”
에스페란사는 눈을 흘기며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허리 뒤로 들어온 손이 반대편 팔꿈치를 쥐고 달래듯 쓸어내렸다. 시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눈을 깜박이기만 하던 에스페란사가 시선만 들어서 물었다.
“하던 일은 다 끝냈어요?”
“다 안 끝냈는데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믿을 건가요?”
“아뇨.”
그럴 줄 알았단 듯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에스페란사의 머리 위에 뺨을 기대며 말했다.
“확인 끝났어요. 그 일로 여쭤볼 게 있는데, 숙녀분.”
팔꿈치만 쥐었던 손이 어느새 몸을 통째로 끌어안고 있었다. 몸을 굳혔던 에스페란사는 팔을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에 힘을 풀었다.
“뭔데요?”
“내일 시간 있나요?”
그야 남는 게 시간이지. 에스페란사는 에이번데일에서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오죽 없었으면, 시더가 연구에 열중하고 있을 때면 몰래 연구소를 탈출해서 애니와 노닥거리거나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왜요?”
“시험 비행을 해 볼까 해요.”
아. 그렇지. 지금까지는 방 안에서 날개를 접고 펴는 것만 해 왔지만 언젠가 그걸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진짜 날 수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 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내일 바로?”
“더 늦으면 추워질 테고, 사람들 눈을 피하려면 입동 축제 날 시도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하긴 저녁만 되면 다들 술 들이붓느라 정신이 없겠네요.”
그 말에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에 고개를 묻은 채 숨죽여 웃었다. 목덜미가 간지러워 몸을 움츠리면서도 에스페란사는 제법 성실하게 고민했다.
“나야 시간은 많죠. 근데 이 주변에 비행을 할 만한 곳이 있어요? 이 숲은 좁기도 하고, 들킬 것 같은데.”
나무가 제법 빽빽한 숲이라 저 커다란 날개를 크게 펼치기에도 여의치 않고 무엇보다도 근처에 저택이 있었다.
시더 클라이번이야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괴짜지만 이 경우에 날개를 달고 있는 꼴이 들키는 건 에스페란사 쪽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와 같은 급의 괴짜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여긴 아니고. 다른 곳으로 가야죠. 여름 모자는 쓸 기회를 놓쳐 버렸지만 얼마 전에 새로 산 가을용 흰색 나들이 모자는 아직 쓸 만하잖아요?”
아, 그랬지. 계절이 돌아와도 그 여름 모자를 쓸 기회는 없겠지만……. 에스페란사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을 애써 지워 버리고 좀 더 가벼운 질문을 꺼냈다.
“소풍이라도 가려고요?”
그러니까, ‘입동 축제’를 하는 날에? 얼어 죽을 일 있나?
항의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시더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비슷해요.”
“비슷한 거 말고 확실한 걸 말하란 말이에요. 뭔데요?”
“시험 비행 하는 김에 경치 좋고 한적한 곳에서 노닥거리기?”
“그럴 만한 데가 있어요?”
“있어요.”
그렇다면야.
마침내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마주치자 시더는 빙그레 웃으며 맨손으로 에스페란사의 뺨을 쥐었다. 서로만 이해할 수 있는 소리 없는 대화 후에, 그는 어쩔 줄 모르고 도망가는 시선을 붙잡듯이 입을 맞추었다.
헤매던 에스페란사의 손끝이 시더의 셔츠를 붙잡자 팔꿈치를 끌어당겼던 손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맞닿은 입술처럼 서로 다른 크기의 손가락이 얽혀 들었다. 끄트머리부터 천천히, 그리고 쓸어내리듯 손가락을 타고 뿌리까지 감쌌다. 손끝에서부터 번개가 치듯 전율이 일었다.
해가 기울수록 그림자가 차츰 길어졌다. 서재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더는 말없이 몸을 떼어 냈다. 나무라는 듯한 시선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에스페란사가 흐트러진 호흡을 정리하는 동안 시더의 손이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책은 계속 읽을 건가요?”
“결말이 궁금해서요.”
사실은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지만 에스페란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장을 넘겼다. 시더는 그 옆에 기대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시더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변했다.
잠들었나?
슬그머니 책을 덮고 반듯이 앉은 채 잠든 얼굴을 훔쳐보았다. 뺨에 길게 드리운 속눈썹 그림자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약간 몽롱하고, 가슴 한구석이 노곤했다.
“머리가 길었네.”
잠든 남자의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한참 머리를 만지작거리는데도 시더는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말을 해서 소용이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는데, 시더 클라이번의 연구에 대한 집념은 대체로 후자였다. 이번 연구를 완성시키느라 그는 며칠 밤을 꼬박 새웠다. 그것만은 몇 번을 말려도 소용없어서 에스페란사는 결국 포기하고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길을 택했었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여전히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분명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완벽한 공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 * *
“……증기 마차를 타고 간다고요?”
“네.”
“마부도 없이?”
“네.”
글라일리 하우스의 현관 앞에 위풍당당하게 선 증기 마차가 굴뚝에서 흰 증기를 뿜어냈다.
“굳이 왜요?”
“뭘 믿고 다른 사람을 데려가겠어요.”
“그럼 그냥 말을 타고 가면 되잖아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당신이 하늘을 날면 말이 놀라지 않겠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동물을 위했다고.”
그런 반박에는 할 말이 없었으므로 시더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갑자기 사람이 날아오르면 말이 놀라기는 하겠지. 두 사람 다 승마를 잘하는 것과 별개로 말을 잘 돌보는 것은 아니니까, 백번 양보해서 이해한다 치고.
“다 좋아요. 다 좋은데, 마차는 누가 몰아요?”
“그건 아마…….”
“아마?”
시더는 눈살을 찌푸린 채 텅 빈 마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깐의 고민 뒤, 영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해야겠죠.”
그래서 꼴이 아주 우습게 되었다.
증기 마차는 화물 운송차와 대형 승합차의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부유층의 전유물이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마부석과 마차 내부가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말이 끄는 마차가 그러했듯이. 증기 마차의 경우에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도 그랬다. 증기 마차를 구매하는 고객들이 그 부분을 구태여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일 것이다.
검은 마차가 굽이굽이 난 길을 따라 비탈을 올랐다. 에스페란사는 마차 창문 밖으로 몸을 비스듬히 내밀었다. 상체가 거의 다 빠져나오자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길게 휘날렸다. 흰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한 손으로 쥔 에스페란사가 마부석을 향해 소리를 높여 물었다.
“거기 불편하지 않아요?”
시더도 목소리를 키워서 대답했다.
“당신이 위험하게 구는 만큼 불편하진 않은 것 같네요.”
와, 안 들린다. 에스페란사는 그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