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갔다. 금빛으로 익은 청보리가 우수수 쏟아지는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 같았다.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의 심장 소리는 아주 작고 작았지만, 몸을 겹치고 누워 있으면 그 작은 소리도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시더는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시선은 하늘 어딘가에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그의 가슴을 베고 누운 에스페란사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이따위로 불결한 곳에 몸을 누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괜찮았다. 그의 몸에 기대 엎드린 에스페란사의 존재만으로도, 다른 곳도 아니고 맨땅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싫지 않았다.
해가 짧은 가을이었다. 금빛 들판이 붉게 물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누리는 평화는 다음 가을이 없는 두 사람에게도 영원할 것 같았다.
뺨을 기댄 채 누워 있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 이게 뭐람. 갑자기 왜 고장이 나서는.”
“내 생각엔 이것 때문인 것 같아요.”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날개를 손으로 헤쳐 그 안에서 작은 나뭇가지를 꺼냈다. 한가운데를 틀어막았던 나뭇가지가 사라지자 삐걱거리던 톱니바퀴가 다시 멀쩡하게 돌아갔다.
“아, 다시 된다! 고장 난 게 아니라 다행이에요.”
“당신보단 나한테 더 다행이죠.”
“하긴, 밤을 새우는 건 내가 아니니까.”
“아뇨. 당신이 고장 냈으면 당신도 밤샘에 강제 동원할 거예요.”
“내가 옆에서 밤을 새워서 뭐 해요?”
에스페란사가 억울한 낯으로 벌떡 일어났다. 시더도 몸을 일으키며 태연히 대꾸했다.
“나이 든 귀부인들은 돈 주고 말동무를 고용하기도 하잖아요? 옆에 두면 뭐라도 시킬 일이 있겠죠.”
“나보단 오토마톤 쪽이 더 쓸 만할걸요.”
“그건, 부정하진 않겠어요.”
풀잎이 잔뜩 묻은 외투를 벗어 버린 시더는 에스페란사를 앞질러 가서 설치해 놓았던 마력판을 치웠다.
“사고도 있었으니, 오늘은 이만 철수하는 게 좋겠네요. 비행해 본 소감은 어때요? 개선할 점은?”
“어, 좀 많은데. 메모하면서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해도 잊어버리진 않아요.”
에스페란사는 이제 멀쩡하게 작동하는 날개를 끝에서부터 천천히 접으면서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일단 속도가 안 나요. 이게 제일 큰 문제점인데, 마력을 1만큼 부을 때랑 10만큼 부을 때 속도에 큰 차이가 없어요. 그리고 이착륙할 때 움직임이 뻑뻑해요. 방향 조절할 때 마력이 추가로 드는 것도 문제고. 아, 비행 중에 방향 조절하면서 무게 중심이 흔들리는데 이건 어떻게 고쳐야 할지 감이 안 오네요. 그리고 방향 바꿀 때 마력이 한쪽 날개에 더 들어가는데 기계 소리로 내가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알 수 있고요. 지금은 괜찮은데 전투 상황에선 치명적이겠죠. 음, 또…….”
한참을 얘기하고 나니 열 손가락을 다 쓰고도 모자랐다. 시더는 마력판을 양팔에 끼운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마침내 말을 끝낸 에스페란사가 불쑥 물었다.
“당신 이거 다 기억해요?”
“기억해요.”
“……나도 다 기억 못 하는데.”
비행할 때는 이것보다 더 많이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미 몇 개 까먹은 상태였다. 그대로 다시 말해 보라고 한다면 거기서 또 몇 개를 놓칠 것이다. 에스페란사가 말한 문제점만 스무 개가 넘어가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죠? 하나라도 빼먹으면 안 돼요.”
“그렇게 걱정돼요?”
“당연히 걱정되죠. 전투할 때 쓸 건데.”
에스페란사는 일상에서는 그리 꼼꼼한 편이 아니었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철저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헌터와의 싸움이다. 상대는 두 명. 던전을 불러일으킨다면 전투가 무한정으로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런 상대와의 전투를 준비하면서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요. 그렇게 걱정된다면, 내기할래요?”
“내기?”
“내가 다 기억하면 당신이 내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해줘야 해요. 반대로 하나라도 잊어버린다면 나한테 뭐든 요구해도 좋아요.”
왠지 좀 위험하게 들리는데. 에스페란사는 문득 시더가 돌아가지 말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뭐든지 들어줘야 하는 소원을 말하는 거라면 그런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마치 자리를 맡아 놓은 것처럼 마부석에 올라타면서도 그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내기에서 이기면, 뭘 부탁할 건데요?”
마차를 출발시킨 시더가 노을 진 길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결혼하자고 할까.”
……뭐라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말한 사람은 다른 사람 얘기인 것처럼 태연하기 짝이 없다니.
“제정신이에요? 누가 결혼을 이런 내기에 걸어요!”
“자신 있으면 이기면 되잖아요?”
“지면요?”
“갈 때는 약혼녀, 돌아올 때는 백작 부인이 되겠죠. 대주교가 발행하는 특별 결혼 허가증이 얼마더라.”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저 빚은 듯 우아한 옆얼굴을 훔쳐보며 그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들여다본다고 이해할 것 같진 않지만!
“농담이죠?”
“농담이면 좋겠어요?”
‘하지만 난 못해도 1년 안에 돌아갈 텐데요.’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에스페란사는 애써 다른 말을 꺼냈다.
“누가 결혼을 내기로 해요?”
“이기면 되잖아요?”
그거야 그렇다. 이기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문제는 이기고 지는 것이 에스페란사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 진짜 다 기억해요?”
“네.”
“하나도 안 빼고?”
“하나도 안 빼고.”
“내가 스무 개도 넘게 말했는데?”
“정확히는 스물여섯 개였죠.”
어느덧 어두워진 길을 헤쳐가며 쉽게도 대꾸하는 말에 점점 불안해졌다.
……결혼이 싫은 건 아니다. 에스페란사는 자신이 결혼하기엔 어리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주 이례적으로 어린 것도 아니고,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신념도 없었다. 그러니 만약 돌아갈 방법 없이 이 세계에 남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이 멋없는 결혼 제안에 좋은 대답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기뻐할 수 있는 대답.
그건 진심이었다.
‘정말로, 당신과 이대로 함께 평생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상황이 달랐으므로, 대답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스페란사는 직접 거절의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린 손 위를 시더의 손이 덮었다.
“숙녀분, 내기는 운에 맡기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이겨야겠다면,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죠.”
이 내기에서 이기려면 시더가 에스페란사가 늘어놓았던, 스스로도 다 기억 못 하는 개선 사항들을 잊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잊어버리면 잊어버리는 대로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당신을 밀어서 떨어뜨릴 수도 없잖아요.”
그럼 확실히 까먹어 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시더는 살갗에 와 닿는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다른 방법도 있어요. 이를테면…….”
“이를테면?”
“내 생각엔, 당신의 내기 상대는 입맞춤 한 번에 하나씩 잊어 줄 것 같아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차가 길가에 멈춰 섰다. 노린 것처럼 정확히 나무 그늘 아래. 시더는 천연덕스럽게 운전대 위에 턱을 괴고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일부러 이러는 거죠?”
“글쎄요.”
얄밉기도 하지. 하지만 져 주겠다는데. 웃음을 되찾은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스물여섯 개라고 했죠?”
물론 하나만 잊어버려도 내기는 이기는 거지만, 이런 조건이라면 확신을 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짧은 입맞춤이 정확히 열아홉 번 이어졌다. 시더가 놀리듯 물었다.
“내기 조건에 비해 키스가 많은 것 같지 않나요?”
그 말 한마디에 뒤늦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에스페란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시끄러워요. 빨리 출발이나 해요.”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간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했다. 시더가 간혹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고 에스페란사는 그의 손등을 꼬집었다. 날은 어느덧 완전히 기울었다. 에스페란사는 결코 그것이 열아홉 번의 키스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흰 증기를 뿜어낸 마차가 저택 대문을 지나쳤다. 거대한 대문이 닫히는 순간, 저 멀리서 커다란 불길이 치솟았다. 어렴풋이 함성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불이 난 것은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그제야 오늘이 어떤 날이었는지 기억해 냈다.
하늘 끝까지 닿는 불길은 입동 축제의 시작을 의미했다.
“축제가 시작됐네요.”
“그러네요. 이제부턴 겨울이군요.”
겨울.
에스페란사는 마부석을 밟고 일어나서 마차 너머로 짙은 밤하늘 한 귀퉁이가 붉게 물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먼발치에서 보는 불길은 마치 입을 벌린 괴물처럼 사납게 보였다.
먼 옛날, 사람들은 1년을 여름과 겨울로만 구분했다. 풍요로운 여름의 종막,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여서 광장에 불을 피우고 불씨를 나눠 가졌다. 비록 이제는 흔적밖에 남지 않은 축제라 할지라도 그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주 평화로운 날이었다. 장난과 애정과 시행착오와 성공이 있었고, 부드러운 바람과 황금빛 청보리 밭, 증기 마차와 기계 날개가 있었고, 언제나와 같이 시더가 있었다.
하늘 한구석을 밝히는 불길이 평화롭고 따스한 날들에 종막을 고하고 혹독한 새 계절의 시작을 선언했다. 기나긴 겨울의 시작.
“아…….”
마부석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에스페란사는 불길이 하늘을 야금야금 잡아먹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겨울의 시작. 무언가 뒷머리를 당기듯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를 달래듯 시더의 손을 붙잡았지만 그 불안감은 마음 한편에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았다.
* * *
보일가의 오후는 평화로웠다. 남자들은 시가를 피우고 돌아와 응접실 한쪽을 차지하고 당구를 쳤고, 여자들은 반대편에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랬단 말이죠. 아무튼 한 번 더 보내 볼 생각이에요.”
“확실히 다른 곳에서는 들어 본 일이 없어요. 에이번데일 백작에게 약혼녀라니! 리튼 사교계가 완전히 불타오르겠어요!”
“사실 이미 한 번 그랬죠. 당사자들이 얼굴을 보이지 않으니 금방 수그러들었지만.”
보일 부인이 뻐기듯이 말했다.
“아무튼 그 약혼녀란 아가씨와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 본 건 이 리튼에서 우리뿐이라는 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백작이 제정신이라면 백작 부인이 될 인물을 사교계에 선도 한번 보이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 말이죠.”
“에이번데일이 제정신이 아니란 건 온 오스던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 아니었나요?”
여자들이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상당히 큰 돈을 걸고 시작한 당구 게임에서 젊은 장교들에게 완전히 지고 있던 보일 씨가 냉큼 기회를 잡아챘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들 웃나?”
“에이번데일 말이에요!”
보일 부인이 눈치 좋게 보일 씨를 구해 냈다. 돈 많고 자존심 높고 실력은 부족한 중년 남자를 내기로 털어먹을 계획이었던 젊은 장교들이 혀를 찼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파장이나 다름없었고, 그들도 천재 마도 공학자 에이번데일의 스캔들이 궁금했다.
다른 방에 있는 의자를 더 끌어와 남자들까지 빙 둘러앉았다.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 도취된 보일 부인이 흥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건 리튼에서 우리만 아는 이야기예요. 아주 고급 정보를 특별히 알려드리는 거랍니다.”
보일 부인은 저 말을 각각 다른 상대에게, 횟수로 따지면 정확히 스물다섯 번째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