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루이즈 보일은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어머니가 하고 또 하는 이야기에 싫증을 내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하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보일 씨와 제임스 보일, 그리고 이 저택에 며칠 더 먼저 머물기 시작한 신사의 얼굴에도 같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손님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 그 백작이 직접 약혼녀라고 소개했단 말이십니까?”
“그랬다니까요! 루이즈, 얘, 너도 그 말을 들었지?”
“네, 네. 어머니.”
“거봐요. 음, 약혼녀라는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꽤 얌전하던걸. 식민지 출신이라는 얘기는 들었고, 예쁘장한 게 백작이 썩 좋아하는 것 같기는 했지요. 하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소개를 안 하는 걸 보면 뭔가 꺼림칙한 구석이 없지는 않아요. 아. 그래! 나인 호더에서 왔으니, 도먼 소위, 뭐 아는 얘기 없나요?”
이야기를 낚아채는 매처럼 눈을 빛내며 묻는 말에 제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장교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는 입을 열기 전에 이 자리의 유일한 미혼 숙녀인 루이즈에게 경박한 윙크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나인 호더에 있는 저택에 며칠 묵었는데, 나인 호더에선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어머나, 그럼 정말로 우리가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단 말이네요!”
보일 부인은 기분이 좋아져서 글라일리 하우스에 보낼까 말까 고민하던 무도회 초대장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봉투에 초대장을 넣으려던 찰나, 도먼 소위가 막 생각난 듯 박수를 치며 말했다.
“식민지 출신이라고 하니 말인데, 형님께 듣기로 에이번데일 백작에게 식민지 출신 피후견인이 있다고 하던걸요. 저는 부대에 있어서 못 봤지만요.”
“식민지 출신 피후견인? 숙녀라던가요?”
“그야 그랬겠지요. 형님이 신사와 춤을 추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데 마주쳤다. 정체불명의 신사를 제외하고. 그 피후견인과 약혼녀가 동일 인물일 것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관계가 달라진 것인지는 몰라도, 결혼 적령기의 신사 숙녀가 한 저택에서 머물다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다.
어머, 망측해라.
보일 부인이 입을 가린 손 안쪽으로 삐죽삐죽 웃었다. 하지만 보일 부인의 망측한 생각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그 숙녀의 신원 보증인은 에이번데일 백작 혼자란 말입니까?”
아무도 꺼내지 못하고 있던 말을 누군가 툭 뱉었다. 그 말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다음에 올 말이었다. 뒷말은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괴짜라고 해도 백작이고, 이 리튼 지역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드는 유지였으며 녹슨 검의 훈장 수훈자였다. 그런 인물의 명예를 혀끝에 두고 ‘에이번데일 백작이 숙녀의 신분을 조작했을 가능성’ 따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보통 담력으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사교계는 뭇 사람들의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긴 하지만, 나인 호더 사교계에 정식으로 소개되는 ‘숙녀’는 매우 까다로운 기준으로 정해진다. 명예로운 혈통이나 직업, 계층의 어린 숙녀가 여왕을 알현하고 사교계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절차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사교계의 보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사실 대부분의 숙녀들은 그 정식 절차를 거치지 못하고 결혼 시장에 나오지만, 그만큼 사교계에서 정해진 ‘숙녀’의 기준은 까다롭다.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는 침묵이 길어지던 가운데, 도먼 소위가 막 떠오른 듯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갈리스턴 공작 전하께서 선물을 보냈다는 에이번데일 저택의 아가씨가 그 숙녀분이었겠군요. 이후에는 여왕 폐하를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들었습니다.”
“어머.”
그 얘기를 왜 이제야 하는 거람! 간신히 숨 막히는 공기에서 벗어난 루이즈가 혀를 내두르며 근처에 앉은 남자를 힐끔거렸다. 쌀쌀한 날씨에도 옷을 껴입었다는 인상이 없이 말끔한 정복 차림의 남자는 가라앉은 눈으로 이야기를 흘려듣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저택에 머물게 된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사. 그는 기이한 물건들로 보일 씨와 제임스 보일의 혼을 쏙 빼 놓았고 멀끔한 외모와 부유한 차림, 어딘가 무심한 태도로 보일 부인을 안달 나게 했다.
루이즈가 보기에도 그는 흔치 않은 미남이었으며, 자신에 비해서 나이가 많긴 하지만 신분만 확실하다면 아주 훌륭한 신랑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기꺼이 축복해 줄 만한. 그래서 더 관심을 갖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는 듯한 그의 존재감에 시선이 끌려갔다.
“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루이즈가 있는 방향으로는 아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듯 말한 뒤 저택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머, 어머.”
“무슨 일이지?”
한참 ‘에이번데일 백작의 약혼녀’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신사는 대단히 빨랐다. 아직 그가 남긴 ‘……습니다’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는 벌써 정원에 나가 있었다.
그는 신기한 물건을 보여줄 때 으레 그랬듯 허공에서 불쑥 커다란 망원경을 꺼냈다. 황동빛 망원경이 철컥철컥 돌아갔다. 남자는 그것에 눈을 대고 한참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일 부인이 루이즈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어서 가 보렴.”
루이즈는 못 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교들이 내심 아쉬운 티를 냈으나, 루이즈의 발걸음은 차츰 빨라졌다.
“……씨!”
또 목이 막힌 것처럼 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루이즈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멈춰 섰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이러스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선선히 이름을 부르길 권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편의상 그런 티가 났다. 정작 그는 루이즈를 꼬박꼬박 ‘보일 양’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므로.
“저기, 뭘 보고 계시는지 궁금해서요.”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전에 찾는 것이 있어서 리튼으로 왔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네, 물론이지요. 찾았다고도 말씀하셨고요.”
“그걸 보고 있었습니다.”
루이즈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찾는 것이 허공에 있었다고? 하지만 저번엔 분명 상점가에서 찾았다고 하지 않았나? 허공에 있다니, 새인가? 희귀한 새라도 찾으러 다니는 건가?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제 개인적인 일이니 보일 양이 이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을 긋는 말이 조금 서운하기는 했지만 루이즈는 남이 그어 놓은 선을 억지로 넘는 성격은 되지 못했다.
“……그렇군요.”
사이러스는 시무룩해하는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렌즈 안에서 하늘이 시야를 뒤덮었다.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에 새처럼 허공에 뜬 여자가 있었다. 아직 조금 서툴지만 날개 쓰는 법을 익혀 가는 듯 1초가 다르게 능숙해졌다. 그는 홀린 듯이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에이번데일이 만들어 준 건가? 그렇다면 약혼이란 것도…….’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에스페란사는 아주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계에 떨어졌을 텐데도. 모든 것이 바르게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나은 성과가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이러스가 망원경을 내려놓은 것은 기민한 청력에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어린 하인이 보일 부인의 초대장을 들고 저택을 나오는 중이었다. 하인은 현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이러스를 발견하고 냉큼 다가왔다. 그러나 사이러스가 망원경을 내리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주눅 든 얼굴로 발만 꼼지락거렸다.
“이번에도 부탁한다.”
사이러스는 소년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며 동전 대여섯 개를 손에 떨어뜨려 주었다. 소년이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걱정 마세요!”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이즈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신사는 그저 가만히 검지를 입술 위에 올렸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루이즈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어 바보처럼 고개만 마구 끄덕였다.
* * *
시더 클라이번은 스물여섯 개의 개선 사항 중 정확히 일곱 개를 맞춘 다음 침묵을 지켰다. 명예로운 패배였다. 물론 날개를 고칠 때는 스물여섯 개의 개선 사항을 모두 반영했다. 덕분에 다음 날부터 에스페란사는 본격적인 전투 훈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을 빼면.
에스페란사는 하늘 가득 메운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눈이 반, 비가 반. 날씨는 끔찍했다. 이런 날은 연구소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저택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지만 연구소에 있을 때와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재에 편한 대로 앉은 두 사람은 하루 종일 탁자에 뜨거운 우유를 두고 각자 독서와 보드게임에 빠져 있었다. 문득 책 너머로 눈을 들어 올린 시더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의 소원은 뭔가요?”
소원? 아, 내기. 에스페란사는 뒤늦게 내기의 조건을 떠올리고 손뼉을 쳤다. 억지를 쓰긴 했지만 이긴 건 이긴 거니까. 게다가 이 남자에겐 아무 생각 없던 사람도 절로 발끈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내가 뭘 부탁할 줄 알고 그렇게 태연해요? 엄청 부담스럽고 어려운 걸 시킬 수도 있잖아요.”
그의 대답은 사뭇 명쾌했다.
“내가 당신이 하는 부탁 안 들어준 적 있나요?”
……없었나?
그럼 뭘 부탁하지? 그의 말마따나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부탁하는 건 모두 들어주었다. 순순히 들어주든 뭔가 재수 없는 말을 잔뜩 늘어놓고 들어주든 결과적으로는 같았다. 그러니 이 소원이라는 것은 에스페란사에게 별로 의미 없는 상품이었다.
“내가 말을 해도 안 듣는 게 뭐가 있더라.”
“나처럼 말 잘 듣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아, 네.”
일단 저건 헛소리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던 에스페란사가 발을 탁탁 굴렀다.
“당신이 절대 내 말 안 듣는 거. 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아.”
“식사 때 챙기기?”
“대단하군요.”
시더가 있는 힘껏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도 알 것이다. 생각보다 지키기 힘들다는 걸. 어쩌면 그걸 알아서 더 이러는 걸지도 모르지.
에스페란사가 지그시 노려보자, 그는 모른 체 고개를 돌렸다.
“뭐, 노력은 해 볼게요.”
“지켜볼게요.”
책을 완전히 덮은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내일은 약속을 지킬 수 있겠네요.”
“내일도 비 온대요?”
이 시대에는 일기예보 비슷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저택에는 콜먼 집사와 덴버 부인이라는 믿을 만한 기상예보관이 있었다. 콜먼 집사의 허리 통증과 덴버 부인의 놀라운 후각은 21세기의 일기예보와 정확도가 얼추 비슷했다.
“모르죠. 하지만 연구소엔 안 갈 거예요. 변호사가 오기로 했거든요.”
웬 변호사? 에스페란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스페란사가 이 세계에서 만나 본 변호사는 딱 하나였는데, 바로 시더 클라이번이 만든 황동 토끼 오토마톤이었다. 변호사 브론즈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듯 선했다.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신의 놀라운 변호사 브론즈한테 시키지, 왜 사람 변호사를 구해요?”
머그 잔을 입술에 붙인 에스페란사를 흘기듯 바라본 시더가 말했다.
“최신 판례를 구하기 귀찮아서 갱신을 전혀 안 해 둔 게 첫 번째 이유고.”
하긴, 시더는 변호사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거지 실제로 오토마톤 변호사를 쓰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의 발명 대부분이 그런 식이었다. 만드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의적으로 실용성을 파괴한 발명품을 만들었다.
“두 번째는, 변호사의 능력이 아니라 자격이 필요한 일이라서요.”
“뭐 하는데요?”
시더는 사뭇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유언 공증이요.”
머그 잔이 손에서 덜그럭거렸다. 손에 우유가 튀었다. 뜨거운데도 뜨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유언?
멍하니 그 말을 되뇌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유언이라고?
“당신, 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