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너무 멀리 갔어요.”
손수건을 꺼내 에스페란사의 손을 덮은 시더가 말했다.
“아, 이건 괜찮아요.”
시더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아 주는 동안 반대쪽 손으로 잔을 내려놓은 에스페란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도 머리가 멍하다.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그러나 덤덤한 시더의 얼굴이 에스페란사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왜 유언을……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진지한 질문에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이 되돌아왔다.
“에스페란사, 내가 죽는다고 말했던 건 당신이잖아요.”
처음 만났던 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였다. 반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왠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때, 시더 클라이번에게 그의 죽음을 선언했던 것은 에스페란사였다. 그랬다. 그랬었지…….
“내가, 그랬었죠. 당신이 죽는다고.”
“그래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더 클라이번은 도무지 죽을 운명을 알아버린 사람 같지 않았으며,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지만 그때 그건. 난 그냥, 내가 지켜 주면 되니까…….”
시더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운 말이지만, 숙녀분. 내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당신도 나도 몰라요. 당신이 언제나 내 옆에서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왜 못하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에스페란사도 잘 알고 있었다. 던전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게 얼마나 쉬웠던가? 그런 위협이 앞으로 또 없으리라고 장담할 순 없었다. 그리고 시더가 언제나 그 위험에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페란사는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의 확신을 담아서.
“……대비를 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당신은 안 죽어요.”
시더의 시선이 에스페란사의 뺨에 닿았다. 거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웠다. 조화를 꺾어 귓가에 꽂아 줬을 때처럼, 꿈결에 무심코 입을 맞출 뻔했던 때처럼. 혹은 황금빛 들판에 누워 서로를 바라보던 순간처럼.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확신해요?”
“확신해요.”
“좋아요. 그럼 당신을 믿고 유언장 내용은 바꿔야겠군요.”
곧게 뻗은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시더가 흘리듯 속삭였다.
“정말…… 곤란하게 됐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하지만 눈을 마주친 순간 에스페란사는 그가 대답해 주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시더는 읽던 책을 트레이에 올려 두고 잘 가지 않던 서가 구석에서 먼지 쌓인 두꺼운 책을 가지고 왔다. ‘마정석 제련 연구.’ 평소엔 눈길도 안 주던 분야였는데. 그것이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뜻으로 느껴졌다.
에스페란사도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열중했던 낚시 게임판을 들고 조금 멀리 떨어진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태엽을 마구 돌려 낚시판을 최고 속력으로 해 두고 멍하니 낚싯대를 내렸다.
분명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합의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전제 위에서 말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날 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걸까? 머리가 복잡했다.
게다가 시더의 죽음이라는, 그전까지는 계산에 넣지 않았던 문제가 생겼다. 물론 에스페란사가 지켜 줄 테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예상했던 것처럼 시더가 몬스터 사태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거라면 에스페란사가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져서 뒤통수가 깨지는 것까지 막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려면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도 죽을 수 있다.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에게 보여 주듯이.
시더 클라이번은 그렇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에스페란사도 때 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길어야 1년, 실상은 두어 달일 것이다. 1838년까지 몇 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니까. 그를 구하고, 그 이후에 돌아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그를 구할 것이라 단언했는데도.
‘뭐가 곤란하다는 거지?’
시더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마치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문제인 것처럼. 그처럼 젊고 유망하고 명예와 영광이 예정된 사람이 죽음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에스페란사가 봐 온 시더를 생각하면 어렴풋이,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더가 죽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삶을 제법 즐긴다. 그러나 직면한 죽음의 순간에 그것에서 도망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흥미도 즐거움도 열정도 느끼지만 그것을 내일을 반드시 살아가야 할 원동력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내면이 고요한 것은 휩쓸리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일까, 정 붙일 곳이 없기 때문일까.
‘그럼 나는, 정 붙일 곳 정도는 되나.’
에스페란사가 있으면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줄까? 그랬으면 좋겠다. 에스페란사는 조금의 수줍음을 담아서, 시더에게 그런 의미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에스페란사가 떠난 후엔 어떻게 될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는 결국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에스페란사가 떠나더라도 상관없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럼 지금은?
* * *
장난감 낚싯대를 드리우는 에스페란사의 얼굴이 퍽 심란했다. 시더는 탐독하던 책을 내려 두고 살짝 해쓱해 보이는 뺨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죽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생각해 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야.’
기계적으로 내리는 낚싯대에 자석 물고기가 줄줄이 엮여 올라왔다. 태엽을 마구 감아 놓아서 판이 아주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그랬다. 두어 번 만에 판이 텅 비었다. 그러면 하얀 손가락이 오토마톤처럼 척척 물고기를 다시 끼워 넣고 태엽을 돌리길 반복했다.
시더는 애써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곧 죽을 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같은 에스페란사의 반응이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새로 시작할 연구는, 그로서는 드물게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연구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운에 맡겨야 하는 부분이 크다. 에스페란사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좋아할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에스페란사.”
막 낚싯대로 자석 물고기 다섯 개를 낚아 올린 에스페란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쪽으로 오지 않을래요?”
에스페란사는 잠깐 망설이다가 낚시판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책은 더 안 읽어요?”
“당신 하는 거나 구경할래요.”
“뭐, 맘대로 해요.”
순식간에 게임 두 판이 훌쩍 지나갔다. 낚싯대를 내릴 때마다 물고기가 줄줄 걸리는데, 이런 게임에 관심이 없는 시더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 정말 잘하는군요.”
“몸으로 하는 건 다 잘 하는 편이에요.”
“……아, 그래요?”
눈이 마주쳤다. 시더가 빙긋 웃었다. 손끝을 쥐었던 커다란 손이 손등을 타고 올라 소매 안에 엄지를 넣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시선을 얽은 채로.
예민하게 선 침묵을 깨뜨린 것은 느닷없는 노크 소리였다. 똑, 똑. 두 번에 팽팽했던 긴장이 맥없이 늘어졌다. 에스페란사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시더도 혀를 찼다.
“보나 마나 밀런이겠죠. 당신 애인처럼 구는 하녀거나.”
“애니가 애인은 무슨. 밖에 누구예요?”
“백작님, 아가씨. 콜먼입니다.”
집사가 웬일로?
“그럼 시답잖은 초대장이겠군요.”
시더는 속삭이듯이 투덜거리고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들어와.”
예상대로 콜먼은 은쟁반 위에 초대장을 쌓아 가지고 왔다. 이 점은 나인 호더 저택의 하워드 집사와 똑같았다. 쟁반을 내려놓은 콜먼은 시더가 미처 묻기도 전에 말했다.
“지금까지 저택에 다녀가신 분들의 명함도 제가 보관 중이고, 백작님의 행실이야 전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제가 대신 거절 답신을 써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결례는 결례입니다만.”
전국에 소문난 괴짜의 좋은 점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이 초대장은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콜먼이 시더에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시더가 에스페란사 쪽으로 초대장을 기울여 주었다.
“보일 가문의 무도회 초대장이네요. 이거 이미 여러 번 왔던 것 아닌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아가씨.”
집사는 우등생을 보듯 에스페란사를 한 번 바라보고, 이번엔 대단한 열등생을 보듯 시더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셔야 할 것은 뒷면에 부착된 명함입니다.”
“……누가 명함을 초대장 뒤에 붙이지?”
그것도 이렇게 조잡하게.
“그러잖아도 의심스러워 초대장을 가지고 온 하인을 추궁해 보니, 그 댁에 머물고 있는 손님이 같이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릴까 봐 자기가 붙였다고 하더군요.”
“내 하인이었으면 쫓아냈을 것 같은데.”
“예. 해고당해 마땅하지요.”
에스페란사만이 ‘그렇게까지 큰 잘못인가’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상류층의 예절이 복잡하다 못해 까탈스럽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세세한 것까지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다.
“여하간, 그 명함에 에스페란사 아가씨의 성함이 적혀 있더군요.”
“내 이름?”
에스페란사가 초대장을 쥐고 있는 시더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였다. 콜먼이 대단히 충격받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봐 봐요.”
시더가 명함을 떼어 내 내밀었다. 라고 적힌 뒷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스페란사 헌터’가 아니다. ‘헌터 에스페란사’라고 적혀 있었고, 성과 이름을 도치시킬 때 흔히 쓰는 쉼표도 없었다. 에스페란사 헌터 양이 아니라 헌터인 에스페란사를 지칭하듯이.
천천히 명함을 뒤집었다. 손끝이 떨렸다. 시더는 턱짓으로 콜먼을 내보내고, 에스페란사의 옆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무릎을 감싸자,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에스페란사가 파들거리는 입술을 앞니로 짓눌렀다.
“진정해요.”
“명함이 아니에요.”
두 사람의 말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명함이 아니라고요?”
금테를 두른 빳빳한 종이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이러스.’ 성 없이 이름만. 거기까지는 다소 졸부 같기는 해도 그럭저럭 명함의 기준에 맞았다. 하지만 아래에 적힌 ‘헌터증’이라는 낯선 표현은 그렇지 않았다.
시더는 말없이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다. 에스페란사의 뺨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머리가 아프기로는 시더보다 에스페란사가 더했다.
이 시점에 벌써 헌터증의 디자인까지 완성되어 있는 건가? 생각보다 모든 것이 준비되는 시간이 더 빨랐던 건가? 그러나 그다음 순간에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발급 날짜였다.
“184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