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1843년.
게임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지금은 1837년. 그때보다 무려 6년이나 이르다.
“숫자는 위조할 수 있어요.”
시더가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스페란사가 미래에서 온 것을 알고 그 사실을 이용해 압박하려는 수법이라면,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앉은 자리에서도 열 개는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을 보낸 자는 에스페란사의 동료였다던 미래의 사이러스인가? 그럼 그들은 새로운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가? 이 미지의 인물은 적인가, 아군인가?
“잠깐만. 이게 진짜 헌터증이라면.”
어깨를 바르르 떤 에스페란사가 손톱을 가운데에 끼워 넣었다.
“이거 원래 열려요. 안에는 별 내용 없지만.”
헌터증은 헌터의 신분증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부에는 작은 글씨로 ‘위 증서의 소유자에게 보장되는 권리와 요구되는 의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니 대부분은 열어 보지도 않았고, 열지 않은 채로 예닐곱 해 지나면 종이가 달라붙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사이러스의 헌터증은 한 번 인위적으로 봉한 흔적이 있을 뿐, 달라붙은 부분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온갖 작은 글씨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보란 듯이 굵고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통보였다.
“이 사람, 당신 연구소를 알고 있어요.”
에스페란사가 불안한 얼굴로 시더를 바라보았다.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시더의 연구를 노리는 상황에서 연구소의 존재를 안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위협이었다.
“지금부터 찾았으니 13년 후엔 당연히 알고 있겠죠. 그가 당신처럼 미래에서 온 사람이 맞다면.”
“……그러네요.”
명함을 내려놓은 에스페란사가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여전히 의심도 있었다. 정말 미래에서 온 것인지. 만약 맞다면 에스페란사가 이 시대로 오게 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대체 ‘황금 발톱’은 무엇이고 게임과 이 세계는 무슨 관련인지……. 물어야 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현재의 사이러스든 미래의 사이러스든 단독으로 벌이는 일이라면, 에스페란사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었다.
‘인질을 잡히진 않겠지?’
시더를 흘끔 바라보다가, 말없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시더는 놀란 눈으로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다치기만 해요. 가만 안 둘 거니까. 잡힐 거 같으면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서 셔터 내려 버려요.”
“아. 숙녀분을 두고?”
“내가 숙녀는 무슨.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요.”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쓸어내렸다. 입술 사이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요, 어리광쟁이지만 대단한 내 마법사죠.”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요?”
“당신이 대단한 어리광쟁이란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무슨 소리예요? 커다랗게 뜨인 눈이 그렇게 묻는 듯했다. 자부하건대, 에스페란사는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늘 독립적인 성인다운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항의의 눈빛을 못 본 척 코끝을 장난스레 건드린 시더가 물었다.
“숙녀분, 우리 중에 덥석덥석 껴안는 사람이 누구죠?”
아. 그 질문에 대해서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횟수로 보나, 돌발성으로 보나…….
“나네요.”
“그럼 누가 어리광쟁이죠?”
“아, 뭐야. 들켰잖아. 그럼 좀 더 안고 있을래요.”
방금까지의 심각한 고민들이 전부 씻겨 내려갔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까진 분명 꽤 대단한 어리광쟁이였던 것 같았다. 집안에서 가장 어리고 귀여운 생물로 20년을 살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끌어안고 부비적대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면 마벨우드에서 대뜸 시더를 끌어안았을 때, 에스페란사는 무의식적으로 시더를 꽤나 좋아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더 소중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휘어지는 눈매를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 형태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닿은 손끝이 녹아 버릴 것 같은 애틋함이 느껴졌다.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해야지. 다리아든, 사이러스든, 공작이든. 누구도 손끝 하나 못 대게 할 것이다. 그는 에스페란사가 돌아간 이후에도 살아서, 어쩌면 에스페란사와 있을 때보다도 더 행복하게 남은 기나긴 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13년을 건너온 시간 여행이 오직 그것 하나를 바꾸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먼 옛날의 사람들은 지금을 겨울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아직 단풍이 채 지지 않았고 눈이 올 날씨도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들은 아직 파란 저 하늘도 노을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애써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그들은 연구소 문을 닫았다. 저 멀리서부터 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할 필요 없어요.”
시더가 스위치 보드를 반대편 손으로 옮겨 쥐며 말했다.
“우린 최대한의 방비를 했어요.”
“그렇겠죠. 그래야 하는데.”
그가 정말 에스페란사의 동료 헌터인 사이러스라면, 에스페란사는 이번엔 정말로 그가 적이 아니길 바랐다.
“……그러는 당신은 너무 들떠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걸 진짜 쓸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요.”
어젯밤, 그들은 차가운 비를 뚫고 연구소로 향했다. 젖은 로브를 걸어 두고 시더의 옛 설계도들을 뒤져서 원격 조종 무기를 찍어 냈다. 시더가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 설계도만 만들어 본 무기들이었다. 시간도 재료도 부족해서 딱 세 대만 만들었지만, 개인에 대한 방비로는 차고 넘쳤다.
“여왕 폐하도 이런 대단한 호위를 받지는 못할 거예요. 황송하군요.”
“안 쓰는 게 제일 좋은 거라고요. 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안 좋은 거라니까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쓰고 싶은 것 같았다.
그들이 아웅다웅하고 있는 동안 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상대는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널따란 숲을 반대편에서부터 가로질러.
“애초에 여기 당신 사유지인데 왜 자기 멋대로 여기로 약속을…….”
투덜거리던 에스페란사가 입술을 일 자로 닫았다. 바람 소리와 함께 빗물 젖은 나뭇잎이 흔들렸다. 발소리가 완전히 근접했다. 에스페란사는 총을 들었다. 마력을 꽉 장전한 총에서 톱니바퀴 소리와 심장 소리가 얽혀서 정신없이 돌아갔다.
마지막 나뭇가지를 헤치는 손이 투박했다. 수풀 사이로 장신의 남자가 나타났다. 조금 앳되어 보였던 과거의 사이러스와 달리 에스페란사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진짜구나. 기쁘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 님, 오랜만입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연구소를 등지고 선 두 사람을 향해 한 발짝 더 내딛으려는 순간, 총구가 그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만! 거기 서.”
“……에스페란사 님. 절 못 믿으십니까?”
“나인 호더에서 내가 뭘 봤는지 알아?”
남자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압니다. 하지만 저는 ‘에스페란사 님이 아시는’ 사이러스입니다.”
“……왜 왔어?”
맥락 없이 던져진 질문이었고, 모든 것을 꿰뚫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사이러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사이러스는 왜 왔을까? 에이번데일에, 에스페란사 앞에, ‘13년 전’의 세계에.
“제가…….”
묵직한 숨을 들이켠 사이러스는 천천히 고해하듯 고했다. 함축적인 질문에 걸맞은 함축적인 대답을.
“제가 에스페란사 님을 이곳으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잠시 동안 숲은 작은 새 소리 하나하나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이 상황에서 사이러스에게 신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할 때 티가 난다. 게다가 그들과 접선하러 온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도덕적 부담을 지우는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총을 든 에스페란사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거칠었다.
이곳에서 에스페란사는 불행하지 않았다. 원래의 세계에 머물렀다고 해도 이곳에서 얻은 것만큼 많은 것을 얻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게 에스페란사를 강제로 이곳으로 보낸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 사실은 시더가 더 잘 알았다. 이 분노는 그들의 관계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이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달래듯이 쥐었다. 그러나 의지할 수 있는 체온이 닿자 눈이 젖어 들어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러면서 나더러 믿으라고? 내 적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 이미 내 의사를 거슬러서 이런 짓을 벌여 놓고, 내가 네 말을 안 들으면 그 다음엔 어디로 보낼 생각이야?”
사이러스의 발이 한 발짝 다가오려던 순간 에스페란사가 비명을 지르듯 총을 발사했다. 고의로 빗맞힌 것이지만, 조금만 가까웠다면 뺨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거기 서서 말해!”
그는 말 잘 듣는 오토마톤처럼 자리에 우뚝 섰다. 두 쌍의 눈동자에 담긴 적의가 그를 꿰뚫을 듯했다. 이런 것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원망을 받을 각오는 했지만, 이런 것은……. 그의 시선은 에스페란사의 어깨를 쥔 커다란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13년 후의 세계에서, 그 자리는 그의 것이었다. 에스페란사의 편, 신임할 수 있는 동료. 그저 게임일 뿐이었지만, 그 세계에서만은 그러했다.
“저는 무기가 없습니다. 에스페란사 님, 당신을 해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숨을 크게 내뱉었다. 에스페란사는 마치 그 숨이 불길이라도 될 것처럼 경계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방심해선 안 된다. 옛날 동료라고 해 봤자 게임에서나 가끔 만난 실낱같은 인연이다.
엇갈린 생각 가운데를 꿰뚫듯이 사이러스가 말했다.
“원래 당신의 ‘퀘스트’는 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로 이동할 사람도, ‘황금 발톱’을 찾으려 한 사람도 저였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의심해야지, 생각하면서도 그 가능성을 셈해 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퀘스트에 비해 유독 휑하던 설명란이나 진행률 란의 물음표 같은 것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아주 짧은 순간 시선이 시야 끄트머리, 이제는 없는 것처럼 의식하지 않은 지 오래된 퀘스트 창으로 향했다. 하지만 접혀 있는 창을 열어 보지는 않은 채 다시 사이러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에스페란사 님, 당신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제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사이러스가 허리를 숙였다. 에스페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 같던 이 세계가 그 말 한마디로 낡은 모래성처럼 보였다.
힘없이 총을 내린 에스페란사가 시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맞추고, 시더의 회색 눈동자에 있는 푸른 빛을 찾았다. 빛이 바랜 듯 보이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천천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바로 선 에스페란사가 냉랭하게 선언했다.
“못 믿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