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그가 13년 후의 세계에서 온 에스페란사의 동료라는 것은 자명하다. 퀘스트의 존재와 내용을 아는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사이러스에게 남의 상태 창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건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이러스라는 인물은 믿을 수 없다. 고작 게임 친구라는 이유로 신뢰하기에는 그의 행적이 너무 확실했다. 사이러스는 호소하듯 에스페란사를 바라보았지만, 에스페란사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에스페란사 님, 당신이 여기 계신 건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 부주의로 당신이 원하지 않았던 고난을 겪고 계시니, 저는 몇 번이든 사과드릴 수 있습니다.”
말로 때울 수 있는 사과 따위. 이제 와선 아무 의미 없다.
“증거 있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증거는 곧 제가 여기에 와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이러스는 허공에 손을 넣었다. 시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인벤토리’. 그는 가끔 마법사란 자들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 샅샅이 해부해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에스페란사에겐 그럴 수 없지만, 저 곰은 상관없지.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사이러스를 무시하던 시더조차도 그다음 순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커다랗고, 마치 짐승의 엄니나 발톱처럼 휜 물건이었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매끈한 몸체에서는 옅은 황금빛이 돌았다.
아주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황금 발톱입니다.”
“……그게?”
“예. 에스페란사 님.”
사이러스가 순종적으로 답했다. 사이러스가 황금 발톱을 얻었단 말인가? 다리아에게서 그걸 빼앗았다고? 그럼 저것만 있으면, 저걸 손에 쥐기만 하면 퀘스트의 완료 조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떨리는 시선이 가만히 시더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조금 창백했다. 에스페란사는 망설이다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차가운 손끝이 에스페란사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금 당장일 필요는 없다. 저것을 쥐어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이든, 귀환증을 써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든.
여전히 먼 발치에 우뚝 선 사이러스는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하자 황금 발톱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황금 발톱은 던전을 없앨 수 있는 물건이라고 설명해 왔지만, 사실은 던전을 만들 수 있는 물건입니다. 던전이 자연 발생적인 재난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그것도 충분한 설명은 아닙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금 발톱은…….”
사이러스가 한 발짝 다가왔다. 에스페란사가 총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라도 들고 쏘아 버릴 수 있게.
“시공간 기계입니다. 정확히는 그 부품일 뿐이지만요.”
그 말과 동시에 사이러스가 한 발짝 더 다가왔고,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시선은 황금 발톱의 몸체에 꽂혀 있었다. 마치 부숴 버릴 듯이.
“시공간 기계……. 그게 있으면 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안 돌아갔어?”
“에스페란사 님이 아직 이 시기에 계시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걸 이용해 돌아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3년 후, 1850년에서 가지고 온 황금 발톱입니다. 그리고 이건…….”
표정 없던 사이러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황금 발톱을 들어 올렸다. 에스페란사가 위협을 느끼지 않게 날이 선 쪽을 안으로 해서.
“고장 났습니다.”
아.
아…….
“거짓말이 아닙니다. 직접 보시겠습니까?”
사이러스가 천천히 한 발짝 더 다가오려던 순간 시더가 다급히 외쳤다.
“멈춰!”
그러나 사이러스는 그 한 발짝을 내디뎠고, 하필 그 자리는 에스페란사와 시더가 어젯밤 열심히 트랩을 설치해 둔 바로 그 위치였다. 충격이 가해지자 트랩은 마력을 방출했다.
미량이었다. 사람의 몸을 위협할 정도의 마력도 아니었다. 그저 이 위치에 침입자가 있다고 무기에 붙은 수신기에 알리는 역할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적은 마력에 황금 발톱이 반응했다.
“……이런.”
사이러스가 탄식을 내뱉었다. 황금 발톱은 제멋대로 진동하며 빛을 냈다. 공간이 북 갈라지며, 하늘에서 괴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발 늦게 에스페란사의 눈앞에도 창이 떴다.
[던전 발생!]유형: 숲
등급: B
위험도: A
헌터님, 행운을 빕니다!
“……던전이군요. 고장 났다는 게 작동을 안 한다는 말이 아니었어요.”
시더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신이 없어 보여서, 에스페란사가 재빨리 그를 끌어당겼다.
“이거 꽤 큰 던전인데, 저택까지 던전 안에 들어가 있으면 어떡하죠? 거길 베이스캠프로 써야 하나? 하지만…….”
기다란 손가락이 잠을 깨우듯 뺨을 두드렸다. 멍하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아와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던전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이 물었다.
“이제 와서 새삼 안 들킬 생각을 하는 건가요?”
“아니, 마벨우드나 파인먼트 하우스 사람들은 나랑 다시 안 볼 사람들이었잖아요.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나랑 상관없으니까요.”
온전한 정답이 아니란 것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더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요, 아는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슬프겠죠.”
“일단 확인부터 해 볼게요.”
에스페란사는 하늘을 향해 총을 들고 마력을 길게 방출했다. 새파란 마력이 하늘을 꿰뚫었다. 저택에 닿기 전, 마력이 결계에 부딪힌 듯한 궤적을 남겼다.
“……다행이다.”
“반대편에는 민가가 있어요.”
“악, 그 말을 왜 이제 해요!”
튕기듯이 달려 나간 에스페란사가 반대 방향으로 마력을 방출했다. 다행히 던전의 규모는 큰 편이 아니었는지, 주택가로 넘어가지 않고 숲 언저리에서 멈추었다.
“살았다.”
“좋은 소식만은 아닙니다. 위험도가 A급인 던전이 이렇게 작다는 건, 나오는 몬스터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니까요.”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이러스가 말했다. 그의 손에는 어느덧 커다란 검이 들려 있었다. 에스페란사의 총이 통상적인 것에 비해 거대하듯이, 그의 검도 그랬다.
“에스페란사 님, 반대편은 제가 맡겠습니다.”
베이스캠프로 삼을 연구소는 숲 동쪽에 있다. 서쪽을 사이러스에게 맡기면 훨씬 수월해진다. 그는 이 커다란 숲의 반쪽을 충분히 혼자 감당할 수 있었다.
등급은 B급이라 해도 위험도가 A급인 던전은 에스페란사도 혼자 클리어하기 어렵다. 시더는 물론 전력이 되지만, 그래도 보스전은 혼자 해야 했을 테니까. 사이러스가 있어 난이도가 많이 낮아진 건 사실이었다. 없었으면 애초에 이 던전이 생기지도 않았겠지만!
“이 무기들을 이렇게 쓰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사이러스가 서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시더가 스위치보드를 눌렀다. 그러자 연구소의 맨 위층 창문이 일제히 열리고 대포처럼 생긴 무기가 세 대나 나타났다. 물론 위력은 대포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도 수색하고 올게요.”
“기다려요.”
에스페란사가 총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는 동안,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등에 날개를 채워 주었다. 처음보다 크기가 반 정도 줄어든 날개를 시험 삼아 움직여 보았다.
좋아.
펼쳐진 날개를 흘끔거린 에스페란사가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툭 뱉었다.
“당신은 걱정 안 해요.”
그 말에 시더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가요? 난 당신이 걱정되는데.”
“……절대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그냥 연구소 안에 들어가 있어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시간제한이 없는 던전이다. 사이러스가 반을 맡아 준다고 치더라도 예닐곱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 말은 혼자 했으면 최소 열네 시간…….’
이래서 던전 솔플은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지금까지 미친 짓을 해 왔던 거지. 하지만 그 미친 짓에서 희열을 느끼는 게 에스페란사였다. 한 손에 총을 들고, 나무 높이로 날아오른 얼굴에 어느덧 미소가 서려 있었다.
머리도 복잡했는데, 차라리 잘됐다. 사람도 없는 숲인데 차라리 마음껏 날뛰자. 그러다 보면 좀 정리되겠지.
* * *
팔 길이보다 조금 더 긴 날개는 헌터의 다리보다 빨랐다. 나무 위를 밟으며 순식간에 숲 반대편까지 주파했다.
“와, 진짜 빠르다.”
이렇게까지 속력을 내 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허공에 멈춰 선 에스페란사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떨어지듯이 몬스터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내렸다.
갑옷을 입은 괴물들이 에스페란사를 에워쌌다. 거죽밖에 없는 얼굴이 누른 이를 드러냈다. 앙상한 팔다리와 삭은 검을 든 괴물 병사들은 아주 재빠르고 힘이 억척스러웠다. 상처를 입어도 끄떡없었다.
‘이런 걸 드라우그라고 했던가.’
자주 만나 본 몬스터는 아니었다. 게다가 수적으로 열세인 에스페란사는 금방 수세에 몰렸다.
총으로는 절대 안 되겠군.
거대한 장총이 들려 있던 손에 얇은 쌍검이 나타났다. 검을 쥐는 것과 거의 동시에 뒤의 괴물을 걷어차고, 그 반동으로 몸을 공중에서 굴려 목을 베었다. 이런 류의 몬스터는 단숨에 목숨을 끊는 것이 유일한 제압법이었다. 공략법이 비슷한 히드라 정도는 종종 잡아 본 적이 있었으므로, 에스페란사는 금세 능숙하게 움직였다.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3
상태 이상 0
사망 0
사망이 아니라 전투 불능.
‘태워야지.’
베어 낸 머리마다 불꽃을 떨어뜨렸다.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창백한 얼굴을 밟고 공중에 붕 뜬 에스페란사는 쌍검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고 다시 총을 꺼냈다.
공중이라는 위치는 전투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드라우그들의 검은 사정거리가 짧고, 에스페란사의 총은 아주 먼 곳의 적도 꿰뚫어 버릴 수 있었다.
총이 길게 마력을 쏘았다. 펑, 소리와 함께 줄기가 터진 나무가 무너지고, 드라우그의 목이 꿰뚫렸다.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17
상태 이상 0
사망 3
파괴 행위가 머릿속의 복잡한 고민들도 함께 꿰뚫어 버리는 것 같았다. 드라우그의 사체가 전부 탈 때까지 불을 질러 둔 에스페란사는 숨을 후, 내쉬며 하늘 높이 날았다.
하늘이 안전했던 건 아주 잠시였다. 공간이 찢어지며 괴조들이 부리를 딱딱거리며 몰려들었다. 맹수의 것처럼 날카로운 이에 벌써부터 피가 뚝뚝 흘렀다. 마치 포식 중에 넘어온 것처럼.
“으으, 저것들은 또 뭐야?”
7년이나 이 게임을 해 온 에스페란사로서도 처음 보는 놈들이다. 그래 봐야 B급 던전, 대단히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겠지만.
아직 공중전에 익숙하지 않은 에스페란사는 나무를 기지 삼아 몸을 숨기고 하늘로 총을 쏘아 올렸다.
탕, 탕. 마력에 꿰뚫린 새들이 가아악,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매의 날개를 단 괴조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밑의 동물들을 순식간에 낚아채 그 앙상한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피 묻은 부리가 섬뜩했다. 에스페란사는 이마를 찡그리며 벌어진 부리 안쪽으로 마력을 길게 쏘았다. 마력이 새를 꿰뚫자, 새가 삐걱거리며 추락했다.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2
상태 이상 0
사망 23
목을 베어도 징글징글하게 살아 있던 드라우그의 머리를 마저 불에 태웠다. 건조한 숲에 불이 번지지 않게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그사이 괴조가 몇 번이나 머리를 노렸다. 에스페란사는 총구를 배트처럼 휘둘러 괴조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까아아악!
산 채로 타들어 가는 비명 소리가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에스페란사는 본격적으로 괴조와 상대하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하는 전투는 지상에서의 전투와 달랐다. 기본적으로 앞뒤, 양옆만 고려하면 되는 지상전과 달리 공중전에선 위아래까지 신경 써야 했다. 위에서 쏟아지는 발톱을 쳐 내고 아래에서 치닫는 부리를 밟아 떨어뜨리며 전후좌우의 새들을 저격했다.
정신없었지만, 딱 그만큼 즐거웠다. 뒤를 걱정할 필요 없는 전투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에스페란사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서렸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마지막 괴조와의 대치를 즐겼다.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0
상태 이상 0
사망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