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놈이 대장인 듯했다. 가장 커다랗고, 가장 빨랐다. 사나운 얼굴과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부리가 놈의 사냥 실력을 증명했다. 이 숲이 사람이 다니지 않는 숲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혹시…… 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에스페란사는 애써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던전이 나타나자마자 이 숲 전체를 수색해 봤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괜히 불길한 상상을 해 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폭발 소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몬스터들이 꿰뚫려 죽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총구로 겨누고 있는 괴조의 발톱과 날개를 휘감은 바람 소리만 선명했다. 살기 어린 노란 눈이 희번덕거렸다. 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맹금의 날개가 쇄도했다. 시야가 순식간에 날개에 뒤덮였다. 에스페란사는 중력에 몸을 맡기며 총구를 위로 향해 쏘았다. 깊이 젖혔던 허리가 바로 서자, 등 뒤로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확인하지는 않았다.
[전투 모드 ON]전투 불능 0
상태 이상 0
사망 35
확실히 이겼으니까.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을(를) 물리쳤습니다.]이름이 안 뜨네? 에스페란사는 알림 창에 뜬 낯선 물음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사이러스를 만나고 갑자기 오류가 났나?
“……에스페란사 님!”
때맞춰 들려오는 사이러스의 목소리가 위험을 알렸다. 그림자가 드리우자, 에스페란사는 솟구치며 아래를 저격했다. 윽, 하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버석버석한 낙엽 밭에 몸을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잘못 쏜 것은 아니었다.
“하나가 남아 있는 줄은 몰랐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꿈틀대며 일어나려는 드라우그의 목을 벤 것은 사이러스의 대검이었다.
“위험하셨습니다.”
“안 위험했어.”
사이러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이러스는 에스페란사가 아는 그대로였다. 때로 에스페란사가 뭘 우기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받아주었다. 다른 게임 친구들은 그걸 보고 ‘언니, 쟤 곰탱이 같아요.’ 하기도 했는데, 사실 그는 꽤 영민했다.
“왜 왔어?”
“여기가 숲 중앙입니다. 몬스터 무리를 쫓다 보니 중앙까지 와 버렸습니다.”
다친 데는 없냐는 질문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단 걸 피차 잘 알고 있었으므로. 에스페란사는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시더가 없는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있잖아. 내가 여기서 이 시기의 너를 봤거든. 네가 나랑 똑같이 게임을 하던 사람이면 게임 시작도 전 시점에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설명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숨길 수도 없겠지. 마력이 장총 내부의 기계를 쉴새 없이 돌렸다. 에스페란사는 총을 수풀 반대편으로 겨누며 다시 물었다.
“네가 13년 전에 여기 있었던 건 맞는 거지?”
“……맞습니다. 에스페란사 님이 보신 그 사람이 13년 전의 저입니다. 저와 다리아는 게임 시작 전에도 황금 발톱의 능력으로 이 세계를 드나들었습니다.”
‘이 세계’라는 표현을 보건대 그가 에스페란사와 같은 세계에서 온 건 맞는 모양이다.
“게임도 너희가 만들었어?”
“예.”
거대한 늑대 무리가 나타났다. 에스페란사의 등이 사이러스의 넓은 등에 닿았다가, 튕기듯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총구가 마력을 뿜을 때마다 질긴 털가죽의 늑대들이 쓰러졌다.
“다리아랑은 무슨 관계인데?”
“남매입니다.”
아, 남매끼리 대단한 식민지 건설의 꿈을 키우셨다. 코웃음을 친 에스페란사가 달아오른 총구로 늑대의 미간을 쏘았다. 아까 건 드라우그. 그럼 이건 펜리르인가?
힘이 센 늑대는 근접 공격으로 상대하는 게 아니다. 때문에 에스페란사는 늑대로부터 떨어져서 저격했고, 사이러스 역시 빈 왼손에 권총을 쥐었다.
두 명의 능숙한 헌터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늑대 무리를 끝장냈다. 하늘이 조금 더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펜리르 군단을 물리쳤습니다. 던전의 보스가 당신을 인식합니다.]아하.
곧 보스가 나타날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총을 내리며 말했다.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자.”
사이러스의 검이 늑대의 입 안을 벌렸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맨손으로 잡아 뜯어 인벤토리에 넣은 그가 대답했다.
“네.”
날개를 접은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와 같은 속도로 달렸다. 걸어서는 세 시간이 넘는 거리였지만 헌터들이 마력을 써서 달리면 길어 봐야 20분이었다. 땀에 젖은 목덜미를 시더가 쥐여 줬던 손수건으로 대충 닦은 에스페란사는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그래서, 왜 다시 13년 전으로 온 거야?”
“황금 발톱이 고장 났기 때문입니다.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습니다만, 전부 실패했습니다. 에스페란사 님, 저희는 지금껏 고심 끝에 꼭 필요한 자리에 던전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것은 요컨대 극복할 수 있는 재난입니다. 적당한 스릴과 위기는 있지만, 재난 자체가 세상의 명운을 뒤바꾸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의’ 세상을 좋아하니까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구태여 입 밖에 내서 말하지 않는 대전제.
굳게 다물린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이러스는 딱딱한 어투로 이어 말했다.
“하지만 저희가 던전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오스던은 빠르게 멸망하고 말 겁니다. 헌터들은 제때 던전에 도착해서 공략할 수 없을 테고, 문명은 무너질 겁니다. 그건 실패입니다.”
그는 정말 신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신으로 생각하는 자 특유의 광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지독하게 침착했다. 그리고 그가 이윽고 말했다.
“그런 게임은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 사실로 밝혀졌을 때,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이를테면 달리는 중이라 눈을 질끈 감지도, 완전히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는 상태라면.
에스페란사는 그 답을 알지 못해서 멈춰 섰다.
“게임, 그렇지. 게임이지. ……우리가 했던 게임이, 처음부터 진짜였다는 거지? 비슷한 가상 세계가 아니라?”
사이러스는 도리어 짐작하지 못했냐는 듯이 되물었다.
“게임 속 세계가 이 세계가 꼭 같은 정도로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전에도 이미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느꼈다. 이 시기의 다리아와 사이러스를 봤을 때부터 들었던 불길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원래 시기의 사이러스를 다시 만났을 때는 거의 확신했다. 그래서 더 외면하고 모른 척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 세계가 처음부터 실제였다면……?
‘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뒀던 거지?’
실제로 죽였던 사람은?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제발 없었으면……. 아니야.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도 던전 공략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여겨지면 사람의 목숨을 쉽게 포기하는 평범한 헌터였으므로.
나뭇등걸에 기대 선 에스페란사가 숨을 다잡았다. 고개를 떨군 채 표정을 가렸다.
“에스페란사 님?”
“그랬단 말이지. 우린 지금껏 이 세계를 게임으로 즐긴 거구나.”
죽이고, 무너뜨리고, 그 과정에서 폭력과 스릴을 즐겼다.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이 세계와 비슷한 모습의 게임을 만드는 것보다는 그게 더 쉬우니까요.”
‘황금 발톱’은 동시대의 다른 게임들보다 지나치게 세세했고 현실적이었다. 유저마다 만나는 NPC가 다른데 전부 생동감 있고 진짜 사람처럼 디자인되어 있어 인기를 끌었다. 전투 콘텐츠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세계관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셀링 포인트였다.
당연히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있는 세계니까. 진짜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짐작은 했다. 어렴풋이 그럴 거라고, 알고는 있었다. 새삼스레 충격받을 일이 아닌데, 확신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옆으로 치워 두고 외면했던 모든 과오가 한 번에 쏟아져 내렸다.
“진짜 식민지였네. 왜?”
“이렇게 말하면 에스페란사 님은 저를 경멸하시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아. 그래?”
“네. 그것뿐입니다.”
사이러스는 에스페란사를 잘 알았다. 아니, 누구라도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같은 반응을 보였겠지. 그래도 차갑게 타오르는 경멸은 아팠다.
애써 숨을 들이켠 에스페란사가 다시 물었다.
“난 네가, 게임에서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에스페란사 님, 전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닙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건, 기왕이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필요하면 죽이고?”
알 만하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맞잖아.”
사이러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침묵했고, 에스페란사는 돌아보지 않은 채 비틀비틀 앞서 나갔다.
연구소 앞 바닥이 푹푹 패여 있었다. 구덩이를 피해 앞서 나간 에스페란사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금방 뒤따라온 사이러스가 입구에서 망설였다.
“뭐 해. 들어와.”
냉랭한 말을 던진 뒤 시더를 찾아 서재로 향했다. 계단으로 달려갔다가 마침 계단을 내려오는 시더와 마주쳤다. 흔들리던 눈이 애써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시더는 미심쩍은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듯 마주 빙그레 웃었다.
“왔군요.”
“곧 보스전이 시작될 것 같아서, 그사이 잠깐 쉬려고요. 바깥은 어떻게 된 거예요?”
“공격이 있었어요. 별건 아니에요. 금방 해결했어요. 다친 데는?”
“그런 것 같네요. 멀쩡해 보이고. 나도 멀쩡해요.”
굴뚝도 막아 뒀고, 창문도 닫혀 있다. 잠깐 동안 쉬기에는 충분히 안전할 것이다. 에스페란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더 이상 얼굴을 보여 주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킬 것 같았다.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이 손에 얼마나 많은 피가 묻었는지, 시더는 몰랐으면 좋겠다.
안겨 오는 대로 무심코 마주 안고 머리를 쓸어내리던 시더가 계단 아래에서 사이러스를 발견했다. 그들은 눈이 마주친 채로, 잠시간 서로를 탐색했고, 이윽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시선을 돌렸다.
시더가 에스페란사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왜 그래요? 저 남자가 무슨 짓이라도 했어요?”
엉뚱한 소리에 에스페란사는 심각했던 것도 잠시 잊고 킥킥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짓을 했으면 내가 얌전히 이러고 있겠어요? 죽여 놨지. 옆에 당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이러스랑 둘뿐이었는데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시더가 이마를 찡그렸다. 이거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아, 내가 있었으면 인질이라도 됐을 거다?”
“아닐 것 같아요?”
“아니에요.”
“내기할래요?”
웃음기 서린 눈이 반짝거렸다. 시더는 기가 막힌 티를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아뇨.”
그럴 줄 알았다. 에스페란사는 다시 시더의 품에 코를 박고 키득거렸다. 필사적으로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숨기려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졌다. 거대한 총과 철로 된 날개보다 더 마법 같은 일이다.
계단을 내려와 사이러스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표정이 잠시 굳었지만, 침착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더가 사이러스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