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4
14화
철커덕. 철커덕. 황동으로 된 기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였다. 모눈 마력판 위에 그린 복잡한 설계도. 시더는 마력판을 올려놓은 책상에 앉아 회로를 바꿔 끼우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철커덕. 기계가 옆으로 움직이면 셔츠 소매를 걷은 팔에 힘줄이 바짝 선 채 따라가 뭔가를 고쳤다. 그 바쁜 와중에도 회로의 변화를 하나하나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분주한데도 고요하다. 공기가 느리게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 역시 피곤하기로는 마찬가지일 텐데, 물기가 남은 머리를 대강 늘어뜨린 채 연구에 몰두한 남자는 문 여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한 채였다.
어쩐지 방해하는 기분이 들어 가만히 서서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날렵하면서도 권태로운 옆태로,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들어와서 이것 좀 봐요.”
알고 있었나? 에스페란사는 머쓱해져 샌드위치 쟁반을 내려놓았다.
시더는 기계의 빈자리에 마정석 구슬을 넣었다. 차르르륵. 구슬이 기계에 자리를 잡았다. 톱니바퀴가 차례로 움직이며 그 철저하고 완벽하게 맞물린 부품들이 천천히 동작하기 시작한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기계가 맞물리는 소리를 감상했다.
‘식판 긁는 소리 같은데, 이게 그렇게 좋을까?’
“이건 무슨 기계예요?”
“보면 알아요.”
시더가 레버를 당기자, 기계가 열리면서 황동색 판이 나왔다. 그 위에 놓인 건 에스페란사도 잘 아는 것이었다.
“이건 내 낫이잖아요?”
“들어 봐요.”
단번에 느꼈다. 저번과는 달랐다. 이전에 시더의 앞에서 낫을 들었을 때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손잡이를 잡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가 낫을 개방했다.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방에서 종이가 들썩거렸다. 제법 멀찍이 앉은 시더의 금빛 머리칼도 바람결에 날렸다.
장비 속성 창을 눌러 보자 변화는 더 확실하게 보였다. 초급 단계에서 주는 하급 장비였던 낫이 중간 레벨 던전도 깰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주요 속성은 물론 부가 속성도 거의 두 배에 가깝게 올랐다.
설리번 박사를 비롯해서 다른 마도 공학자들도 장비 업그레이드는 할 줄 안다. 하다못해 대장장이들도. 몬스터 부산물을 모아서 가져다주면 장비 부품을 바꾸거나 최적화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초급 수준 장비를 중급으로 만든다고? 재료 하나하나를 바꿔 끼워서 새로 만들다시피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 시대엔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몬스터 부산물도 없다. 이 어마어마한 수치 상승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진짜 무슨 짓을 한 거지?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나?
“어떻게 장비 업그레이드를…….”
“난 돈이 많잖아요.”
그는 재수 없는 소리를 여상하게 했다. 에스페란사는 잠깐 낫을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봐요.”
다시 낫을 가져간 그는 기계 위에 낫을 올려놓았다. 레버를 당기자 톱니바퀴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리고 상단, 있는 줄도 몰랐던 세피아 빛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일종의 빔 프로젝터였다. 불빛을 받고 있는 것은 모눈 마력판 위의 도면이다. 시더는 거침없이 빨간 잉크가 든 만년필로 도면 위의 낫 손잡이에 선을 그었다.
“이 안에 든 부속품을 전부 마정석으로 교체했어요.”
“톱니바퀴랑, 나사랑, 그런 걸요? 아니, 왜요?”
왜 그런 돈지… 돈 낭비를?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랬더니 마력 투과율이 대폭 증가했죠. 뭐, 자세한 숫자는 봐도 모를 테니 넘어가고.”
저런 말을 하면서도 무시하는 것 같지 않게 들리는 게 용한 일이다. 무시해도 어쩔 수 없긴 하다. 진짜 모르니까. 에스페란사는 다소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교체한 게 있어요. 낫 안쪽을 싹 비우고 마력 효율을 높였거든요. 그랬더니 대부분의 항목에서 내 예상보다 더 높은 수치 증가가 보이더군요.”
헌터가 아닌 사람들은, 아무리 마도 공학자라도 지금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듣자마자 알았다. 속성 버프를 받았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몬스터 부산물 하나 없이 속성 버프를 넣었지?
“내가 뭘 했는지 궁금해요?”
그의 말에는 쇼맨십이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드물게 진심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남자가 씩 웃었다. 차가운 회색 눈동자에 푸른 빛이 번개처럼 스쳤다.
“내가 가진 것 중 단위당 마력 함유량이 가장 높은 물질을 통과시켰죠.”
그게 뭐냐고 묻기도 전이었다. 황동색의 기계 집게가 내려와 작은 유리병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에스페란사도 잘 아는 유리병이었다.
“설마, 설마……!”
“맞아요.”
생각도 못 했다. 설리번 박사를 위시한 13년 후의 그 어떤 마도 공학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간단한 사고의 전환인데.
“마법사의 피. 당신의 피를 연구해 본 결과가…… 어디 보자.”
이번엔 무슨 조작을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조작이 끝나자, 에스페란사의 뒤쪽에 있던 타자기가 제멋대로 눌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누르는 것처럼.
그러더니 갑자기 뚝 멈추었다. 시끄러운 기계음이 방 안을 울렸다.
삐삐삐삐!
시더가 낭패라는 듯 탄식했다. 뭐지?
“잘못 눌렀어요.”
에스페란사는 타자기에서 인쇄되다 만 종이를 뽑았다. 그 사이 시더가 다이얼을 돌렸다. 기계음이 멎었다.
종이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것 아니란 듯이.
“보다시피 마력 과다라 측정이 안 돼서, 희석해서 측정했어요. 기다려 봐요.”
다시 타자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에스페란사는 뻔히 아닌 걸 알면서도 눌리는 자판 위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시더가 더 해 보란 듯이 웃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나왔다.
복잡한 숫자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에스페란사는 어디부터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더는 그 종이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건 그냥 재미로 보여 준 거고, 거기 나온 측정치에 약간의 산수를 더하면, 당신 몸에 있는 마력은 무려 3천만 토트 정도라는 결론이 나와요. 약 30 메가토트.”
나인 호더 상공을 하루에 두 번 도는 공기 청정 비행선을 한 달 돌리는 데 드는 마력이 3 메가토트다.
“아, 그거. 알고 있어요.”
“……알고 있었다고요? 당신 마력량을?”
“정확히는 3047만, 어디 보자, 1998 토트네요.”
프로필에 나온 마력량을 읽느라 조금 더듬거린 에스페란사가 말했다.
의심이 싹을 틔웠다. 그 구체적인 수치를, 마치 어디선가 보고 읽는 것처럼 말하는 에스페란사.
마력량은 혈압 같은 것이다. 날에 따라, 컨디션에 따라 조금씩 유동적으로 변한다. 그런데 저 수치는 그의 추정치와 거의 일치했을 뿐 아니라 아무 숫자나 얼버무린 것 같지도 않았다. 자기 몸 상태를 수치화시켜서 알 수 있는 건가?
뭐, 이건 나중에 추궁하도록 하고.
“좀 김빠지네요. 여하간, 당신의 피는 현재까지 발견된 어떤 물질보다도 마력 함유량이 높고 심지어 마력 투과율도 높아요. 이런 걸 마정석 광산처럼 개발해서 캘 수 있다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사겠어요.”
“매혈 안 해요!”
에스페란사가 기겁하며 말했다. 미친 거 아냐?
“아무튼.”
그 부분엔 답 없이 넘어간 시더는 낫의 향상된 성능을 마치 영업 사원처럼 자랑했다. 어쨌든 대단한 건 사실이다. 장난처럼 말하지만, 족히 수십 년을 앞서간 연구였다.
“혹시 다른 사람 피도 가능할까 해서 실험해 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마법사의 피라 특별한 것 같아요.”
시더의 셔츠 소매 안쪽에 붉은 기가 비쳤다. 여러 번 스스로 찔러 피를 낸 것 같았다. 좀 기가 질렸다.
“이, 이, 매드 사이언티스트…….”
“응? 뭐라고 했어요?”
“자기 몸을 찌른 거예요?”
“이건 별것도 아니에요. 내 피로만 실험한 것도 아니고.”
그게 더 끔찍하게 들렸다. 그럼 누구 피를 또 썼는데? 갑자기 에이번데일 저택의 고용인들 얼굴이 스쳐 지나가면서…… 장르가 공포로…….
“합법적으로 했어요.”
오해는 불쾌하다는 듯이 시더가 잘라 말했다. 이제 와서 오해나 진실이나 다를 게 뭔가 싶다.
“낫은 당신 가져가요. 해 볼 수 있는 만큼 했으니까. 당신이 가진 총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하던데, 당분간은 남은 피를 연구해야 하니까 나중에 빌릴게요.”
에스페란사는 자기 피가 흐르는, 그래서 좀 꺼림칙해진 낫을 손에 쥐었다. 이제 보니 희귀 버프까지 걸려 있다. 거의 무기의 본질을 바꾸는 수준으로 속성을 올린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0.03%의 확률로 뜨는 희귀 버프까지. 그것도 공격 속성으로 제대로.
이런 걸 천재는 그냥 뚫어 버리는구나. 아이템 파밍하러 다니던 나날들이 무색하다.
시더 클라이번은 방해되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파이프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또렷한 얼굴선과 깊은 눈매가 시야에 들어왔다. 길고 단단한 목덜미와 셔츠 위로도 근육의 윤곽이 불거진 팔뚝. 그는 젊고, 총명하고, 시대의 한계를 부수는 천재다.
이 남자가 1년 후에 죽는다는 설정이 없었더라면 ‘황금 발톱’ 세계관에서 헌터 같은 건 애초에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13년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걸 만들어 낼 수 있었겠는가? 무기에도 관심이 있는 듯했으니 몬스터 사태 이후, 몬스터 부산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 그는 일반인이나 훈련된 군인들이 쓸 수 있는 무기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최대한 마력 효율을 높여서.
특별한 인간, ‘플레이어’는 필요하지 않다. 시더 클라이번이 있는 세상에서는.
‘그러니까 죽은 사람으로 설정했겠지만.’
“당신, 황금 발톱을 찾을 필요가 있어요? 그냥 타임머신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글쎄요. 난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만 해요.”
대답이 사뭇 단호했다. 당연히 지금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타임머신을 만들지 못한다고 할 줄이야.
“마도 공학자가 아닌 당신에게 설명하는 건 어려울 테니, 설명은 생략하겠어요.”
“아, 네에.”
안 되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