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날개를 맡아 달라는 말에 뒤늦은 깨달음이 머리를 쳤다. 에스페란사는 지금 공중전이 가능한 상태다.
니드호그가 처음 나온 SS급 던전의 보스였던 이유가 있었다. 놈은 입과 발톱과 날개와 꼬리가 전부 무기였다. 게다가 높은 곳에서 불꽃을 쏘아대는데, 전투에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거대한 용이 하늘을 뒤덮으며 강철 비늘로 병장기를 튕겨내는 모습은 마치 세상을 멸망시키려 온 듯했다.
하지만 용이 날기 전이라면?
SS급 던전의 흑룡은 하늘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이놈은 여기서 잠들어 있으니, 에스페란사가 먼저 날아서 놈이 날개를 펼친 순간 그 날개를 부수면…… 두 명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리고 어쨌든 에스페란사가 직접 용을 죽이는 것도 아니니까. 사이러스가 배려해 준 거란 건 알았다. 하지만 고맙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만들어 준 날개를 펼쳐 용의 꼬리가 닿지 않는 위치로 날아올랐다.
‘레벨 업은 레벨 업이네.’
익숙해지니, 전투력이 올라간 것이 확실히 체감됐다. 허공에서 한번 커다랗게 돌아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00:09:44]얼마 남지 않았다.
전투 모드가 켜져 있었다. 스스로를 경멸하는 중에도 헌터의 몸은 정직하게 흥분했고, 다가올 살육에 충분히 대비하기 위해 기감을 날카롭게 세운 채였다. 빨라지는 심장 소리. 마른 입술을 깨문 채 노란 홍채가 강철 눈꺼풀 아래에서 드러나는 순간을 대비했다.
[00:00:03] [00:00:02] [00:00:01] [00:00:00] [던전 보스, ‘니드호그’가 잠에서 깨어납니다!]완전히 0이 된 타이머가 새빨갛게 깜박거렸다. 금빛 총신 끝에 새파란 마력이 맺혔다.
[던전 보스, ‘니드호그’가 나타났습니다!] [보스의 위치가 맵에 표시됩니다.] [하위 몬스터들이 보스의 영향을 받습니다. 공격력 +90%, 방어력 +5%, 체력 +5%, 민첩 +80%] [보스가 하위 몬스터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공격력 +30%, 민첩 +10%, 치명타 피해 +30%]웅크리고 있던 용이 거대한 피막 날개를 펼쳤다. 파충류의 눈 같은 금안이 번뜩였다.
그 앞에 선 사이러스는 인간 중에서는 독보적인 체격으로도 작고 하찮아 보였다. 그러나 포식자는 헌터의 존재감만으로 위협을 느낀 듯, 몸을 잔뜩 긴장했다. 허공에 떠 있는 또 다른 헌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에스페란사는 망설임 없이 양쪽 날개를 번갈아 저격했다. 탕. 탕. 연쇄적인 총성이 피막을 꿰뚫었다.
그르르륵! 흑룡의 입 안에서 고통을 참는 소리가 났다. 사이러스는 땅이 내려앉도록 발을 구르는 용의 사정거리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용의 입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 여기 숲인데.”
진짜, 잘못하다가는 산불 나게 생겼다. 빨리 끝내야지. 머리를 쓸어 올린 에스페란사가 너덜너덜해진 피막 날개를 향해 이번에는 더 넓은 범위로 마력을 방사했다. 새파란 마력이 뒤를 덮치려는 순간, 용이 날개를 휘둘러 마력을 쳐냈다.
과연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용이 마력을 쳐내기 위해 몸을 뒤트는 순간, 사이러스의 대검이 비늘 사이를 꿰뚫었다. 검이 직각으로 비틀어지자, 용이 비명을 지르며 발을 마구 굴렀다. 입에서 튀어나온 불꽃은 미처 강력한 공격이 되지는 못했지만 마른 풀밭과 나뭇잎에 튀었다.
아, 진짜.
다른 숲이라면 신경 안 썼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시더의 숲이다. 불이 나면 안 되지.
“사이러스, 비켜!”
사이러스가 점프한 순간,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서 소화기를 꺼내 풀밭과 나무에 고루 뿌렸다.
“……에스페란사 님?”
“앞에나 봐!”
그리고 다음 불덩이를 피해 날아오른 에스페란사는 용이 고통을 딛고 날개를 펼치기 전에 다시 총을 쏘았다.
용은 온몸을 비틀며 바닥을 굴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사이러스가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사이러스는 거대한 방패를 꺼내 용이 쏟아 내는 불꽃을 막아 냈다. 불꽃과 방패의 싸움이 이어졌다. 사이러스는 용의 기세에도 밀리지 않은 채 버티다가, 마력이 서린 검으로 불꽃을 가르고 용의 입 안을 찔렀다.
크아아악! 용은 검은 피를 뚝뚝 흘리며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뻣뻣하게 펼쳐진 날개는 에스페란사의 공격에 너덜너덜해졌고, 입에 고인 피는 버릇대로 상처를 헤집어놓은 사이러스의 검 때문에 멎지도 않고 줄줄 흘렀다.
용이 노란 눈을 번뜩였다. 상처 난 입 안이 동굴처럼 벌어졌다. 그 안에 불꽃이 모였다. 사이러스가 비늘에 검을 찔러 넣어도 입 안의 불꽃은 커지기만 했다.
피막 날개를 접은 용을 허공에서 노려만 보던 에스페란사가 침음을 삼켰다.
“큰일 났다…….”
“에스페란사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게 터지는 순간, 숲은 난장판이 된다. 게다가 하필 바람은 서풍. 어쩌면 불길이 연구소까지 닿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어차피 저건 용이야. 사람이 아니라고. 말도 안 통하고, 가만히 있어도 우릴 공격할 테니까……. 죽여도 어쩔 수 없어.’
만약 현실 세계에 용이 나타났다면, 그리고 그 용을 해치울 힘이 있다면, 당연히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살인’과는 다르다.
마음먹은 이상 행동에 옮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할게. 발 쪽은 네가 맡아.”
에스페란사는 총을 쥐고 단숨에 용의 머리 위에 착륙했다. 용이 거칠게 투레질했다. 에스페란사는 버티고 섰다. 용과의 힘겨루기는 아슬아슬하게 에스페란사의 승리로 끝났다.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낸 에스페란사가 용의 머리 위에 찔러 넣었다.
“사이러스!”
“갑니다!”
사이러스는 용의 발등을 검으로 내리찍었다. 에스페란사는 나무 꼭대기 높이에서 용과 눈을 마주 보았다. 아찔한 스릴감이 느껴졌다.
‘그래, 난 어쩔 수 없이 이런 인간이지.’
그러니 이 게임에 빠지게 된 건 필연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비난하면서도, 합법적인 폭력과 전투의 위험에서 얻는 쾌감에 기분이 몽롱해진다.
최대한도의 마력을 담아 장총을 겨누었다. 세로로 찢어진 용의 금안을 향해.
용의 입은 아직 다 만들지 못한 불꽃에 막혀 있고, 발은 사이러스의 검에 고정됐다. 날개는 너덜너덜하고 꼬리는 멀다. 에스페란사는 씩 웃으며 용의 양쪽 눈을 빠르게 저격했다.
용이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나무가 뽑히고 쓰러졌다. 소리가 공간을 꽉 채워 울렸다. 새까만 새 떼가 숲에서 날아오른다. 사이러스는 재빨리 검을 뽑고 몸을 물렸다.
거대한 입은 참지 못하고 덜 여문 불꽃을 뱉어 냈다. 검은 용의 뜨거운 숨결을 사이러스가 한 장의 방패로 막아냈다.
“확실히 막아!”
“걱정 마십시오.”
그 역시 평소라면 숲 따위 타게 내버려 뒀을 것이나…… 에이번데일 백작은 중요 인물이다. 죽거나 다쳐선 안 된다.
타임 슬립 첫 지점이 ‘에이번데일 백작의 저택’이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피부가 갈라질 것 같은 열기가 몸을 덮쳤다. 그 열기만으로도 손이 따끔거렸다. 사이러스는 에스페란사를 향해 방패를 던지고 뛰어올랐다. 상공의 에스페란사와 눈이 마주쳤다.
눈의 색이 섞일 것처럼 짧지만 강하게.
그들은 오랜 동료였다. 전투에 있어서는, 서로의 손발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선 에스페란사는 눈먼 용을 향해 마력탄을 발사해 용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사이러스가 그 단단한 비늘 사이로 검을 박아 넣었다. 에스페란사보다 더 커다란 검, 강한 악력을 지닌 그는 길고 깊은 상처를 만들 수 있었다. 그사이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가 던진 방패를 받아 남은 불꽃을 처리했다.
가죽 장갑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에스페란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용의 발톱이 방금 전까지 에스페란사가 올라 서 있던 나무를 세게 할퀴었다. 나무가 쿵, 넘어졌다. 용의 공격 반경에 있던 마지막 나무였다. 이제 전장은 널찍한 공터나 다름없었다.
그 후로도 접전은 한 시간을 더 이어 갔다.
용은 약해졌지만 두 배는 흉폭해진 채로 너덜거리는 몸을 뒤틀었다. 날개를 접은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가 낸 상처 위에 발을 올렸다. 왼손에는 그사이 두 번이나 용의 불꽃을 막느라 달구어진 방패를 든 채로.
사이러스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러스의 커다란 장검이 용의 배를 찔렀다. 에스페란사는 그 방패를 가로로 세워 상처 위에 박아 넣었다.
용이 몸을 사납게 흔들었다. 에스페란사는 간발의 차로 떨어지는 대신 날개로 몸을 지탱하고 날아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피막 날개에 얻어맞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도무지 한 번에 처리할 수가 없다. 만만찮은 적은 호승심을 들끓게 했다.
한 번만 더 해 보면 될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얼얼한 팔을 주무르며 다시 때를 노렸다. 두터운 꼬리가 몇 번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주 멀리 피할 수도 있었지만, 타이밍을 잡기 위해서 일부러 가까운 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사이러스가 다시 한 번 공격 기회를 잡았다.
에스페란사는 총을 벌어진 상처 위로 겨누었다. 사이러스가 맞지 않게 출력을 낮추었다.
셋.
둘.
하나.
거대한 검을 쥔 검사가 뛰어오르며 용의 목을 아래에서 위로 길게 베었다. 꼬리 근처에서 목으로 활강한 저격수가 벌어진 상처 위를 노려 꿰뚫었다.
동시였다. 마력이 적의 목을 꿰뚫는 순간의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어깨가 거칠게 오르내렸다.
거대한 머리가 초라하게 바닥을 굴렀다. 수풀이 용의 피로 검게 물들었다.
[던전 보스, ‘니드호그’를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이 적립됩니다.]끝났다.
“나중에 봐.”
인사 아닌 인사를 남겨 둔 에스페란사는 연구소를 향해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버릇처럼 흑룡의 사체를 거두어 인벤토리에 넣던 사이러스가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스페란사 님?”
꼬리까지 야무지게 인벤토리 안에 굴려 넣은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필요 없으신가…….”
* * *
복도 안쪽의 연구실에 있던 시더는 창밖이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계를 끄고 막 시작한 연구를 간단히 정리한 그가 서재로 돌아왔을 때, 놀랍게도 에스페란사가 들뜬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감싼 가죽 바지와 땀에 젖은 목덜미를 빼면 평소 연구소에서 함께 노닥거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방 왔네요. 날 찾지 그랬어요.”
대답이 없었다. 왤까.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추었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달라붙은 뺨과 목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가까이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심장이 어찌나 바쁘게 뛰는지, 귀가 시끄러울 지경이다.
남은 흥분을 가누지 못해 숨만 헐떡거리고 있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괜찮은 건가요?”
대답은 힘겨운 숨소리 중간중간의 얕은 끄덕거림으로 돌아왔다. 아픈 건 아니란 말이지.
이걸 어쩐다? 시더는 생각에 잠긴 채 손수건으로 젖은 뺨을 닦아 주었다.
에스페란사는 흐려진 눈동자로 시더를 바라보았다. 소파에 기댄 채 고개만 치켜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흐린 시선이 이리 오라고 잡아끄는 듯했다.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커다란 손이 뺨을 감싸 쥐었다. 흐린 눈동자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용의 사체와 주변에 있던 몬스터의 사체까지 전부 인벤토리에 넣은 사이러스는 연구소 앞에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더라도 몬스터 부산물은 마도 공학자에게 전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함께 해치운 것이니 용의 사체에 에스페란사의 지분도 있었고.
그는 열린 문을 통과해 연구소 내부로 들어왔다. 현관도 응접실도 비어 있었지만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복도 한가운데. 사이러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때라면 누구보다 먼저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에스페란사에게서는 간헐적으로 가쁜 숨소리만 들렸다.
소파 뒤로 넘어간 긴 머리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너울졌다. 문틈을 마주보고 있던 시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놀란 듯하다가, 이윽고 눈꼬리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사이러스는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을 때의 수치심. 굴욕감. 그리고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켰을 때의…….
흰 팔이 시더의 목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소파 위로 무너졌다. 낮은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섞이고, 이따금 금빛 머리칼과 흰 셔츠에 감싸인 등이 소파 등받이 너머로 비쳤다가, 목을 감싼 팔에 끌려 사라졌다. 사이러스는 돌처럼 굳어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