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전투가 끝난 뒤면 에스페란사는 유독 흥분하고 피로해한다. 마벨우드에서부터 그랬다. 평소라면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 말을 하는 것부터 해서. 흐려진 눈동자가 그를 보며 초점을 찾던 순간은 아직도 시더의 기억 한 귀퉁이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었다.
몸을 일으킨 시더는 걸어 놓은 재킷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닦고, 잠든 에스페란사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몸을 일으키자, 등에 달라붙은 흰 셔츠 아래에 핏기가 도는 자국이 비쳤다.
뻑뻑한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나다가 끊기고,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내 나타난 그는 오토마톤을 불러 젖은 머리칼을 대충 말리게 하고는 복도로 나갔다.
오토마톤 드라이기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연구실 문이 열리는 소리, 희미하게 들리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 에스페란사가 깨어난 것은 기계 소리가 두 번 바뀌고 난 후였다.
허공을 휘저어 꺼낸 끈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묶었다. 목이 잔뜩 잠겼다. 언제 놓고 갔는지 탁자에 올려둔 물컵에 입술을 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장판이네.’
전투가 끝나면 지나치게 들뜨는 게 문제였다. 마치 취한 것처럼 제정신이 아니게 되니……. 빈 욕실에 들어갔다 나온 에스페란사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밖으로 나왔다.
많은 연구실 중 시더가 어느 연구실에 있는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복도가 조용한 가운데 한 군데에서만 하얀 증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이건 무슨 연구실이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흰 증기가 자욱한 공간이 나타났다. 삐걱거리며 회로에 뭔가를 넣었다 빼고 있는 황동빛 기계 팔. 규칙적으로 한 칸씩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새까만 물질.
그리고 늘 기계 부품에 둘러싸여 있던 시더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이해할 수 없는 숫자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인 채 다가간 에스페란사는 등 뒤에서 시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계절이 바뀌며 시더의 셔츠는 조금 더 두껍고 빳빳한 원단으로 변했지만 에스페란사는 셔츠 아래의 근육이 순간 긴장으로 조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등에 뺨을 기대자, 시더는 장갑을 벗고 에스페란사의 손을 붙잡았다.
“일찍 일어났군요?”
“아, 내가 당신한테 그런 소릴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됐어요?”
“그게 싫거든 나보다 먼저 일어났어야죠.”
그러게나 말이다. 어쩌다가 시더 클라이번보다 늦게 일어나서 이런 소리를 듣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하는지.
“덜 마른 머리로 내 셔츠를 적시기나 하고.”
그러나 나무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에스페란사는 화들짝 뺨을 뗐다가 다시 기댔다.
이래서야 어리광쟁이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긴 하지.
한참 조용히 어리광을 피우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들었다.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있잖아요.”
“네.”
“내가 사람을 죽였다면……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당신을? 아니면 그 행위를?”
“당신이 나를.”
시더는 도무지 가만히 있질 못하는 에스페란사의 손등을 한 손으로 덮었다.
“여기서 그랬어요?”
“아뇨. 이때로 넘어오기 전의 일이에요.”
“그걸 새삼 의식한다는 건 사이러스가 당신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뜻일 테고. 음, 그 전에는 몰랐나 보죠?”
아주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거기 있다는 걸 알고, 그대로 두면 죽는다는 것도 알았다. 외면하면서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도 아니다. 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렸다. 그들이 전부 진짜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면 다시 떠올리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주 몰랐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제 와서 새삼 마음 쓸 이유가 있고. 그걸 말하긴 힘들고?”
에스페란사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나도 당신 앞에서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걸 알아야 돼요.”
시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규칙적인 기계 소리를 따라 겹쳐진 심장 소리도 조금씩 제 박자를 찾았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도덕성에 별로 신경 안 쓴다는 걸 알아야 하고요.”
에스페란사는 코웃음으로 답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당신은 그런 걸 꽤 따지는 편이에요.”
자잘한 법은 어겨도 도덕적으로 크게 질타받을 만한 문제는 일으키지 않는다든지. 10년도 전에, 어릴 때 일어난 사건 하나를 아직까지 심중에 담아 두고 있다든지.
아닌 척해도 시더는 섬세한 성격이고, 에스페란사가 사람의 목숨을 쉽게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호의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요?”
“그래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이유가 있었겠죠.”
“……실망할지도 몰라요.”
“당신이 날 아는 것만큼 나도 당신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 에스페란사가 시더를 아는 것보다 시더가 에스페란사를 더 잘 알 것이다. 셔츠 한 겹을 사이에 둔 채 등에 기댄 뺨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당신은 괜찮은 거네요.”
죄책감은 남아 있지만. 일단은 그렇다. 시더가 괜찮다고 하면 어쩐지 괜찮아진 것 같았다.
시더는 그대로 허리를 감은 팔을 풀어내고 몸을 돌려 에스페란사의 양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저건 마정석 아니에요? 시중 거랑 모양이 다른데, 무슨 연구 중이에요?”
평소 하던 연구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보던 숫자를 그와 똑같은 자세로 유심히 바라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뭔가를 알아내게 되진 않았다.
“별것 아니에요. 그보다, 이제 어제 얻은 정보를 취합하는 시간이 필요하겠네요.”
“아. 그렇죠. 사이러스가…… 그러고 보니 언제 갔지? 오긴 했나?”
아무런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분명히, 분명히, 잠깐만.
던전 공략이 끝나고 곧바로 연구소로 왔었고, 돌아온 이후에는…….
에스페란사의 얼굴이 묘해지자, 시더가 재빨리 말했다.
“안 왔어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도 속내를 다 까발려진 상태에서 이야기를 나눌 담력은 없는 모양이니 뒤늦게라도 에스페란사가 전말을 알게 되리라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시더는 여유롭게 생각하며 에스페란사의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래요? 언제 한번 다시 보긴 해야 하는데.”
에스페란사의 머리 위로 드라이어 오토마톤을 띄워 준 시더는 연구실 문을 열고 에스페란사를 살살 떠밀었다.
“그 전에 우리도 이야기를 해야겠죠. 당신이 직접 끓인 차를 마시면서.”
“……왜 내가 해요? 나 할 줄 몰라요.”
다도에 전혀 소양이 없는 에스페란사와 지금까지 늘 차 끓이기를 전담해 온 시더가 있는데 왜 갑자기 에스페란사가 끓인, 맛없을 게 분명한 차를 마시자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시더는 정말로 찻잔 두 개와 다구를 꺼내 놓은 뒤 에스페란사가 울상을 짓는 모습을 구경만 했다.
“못 끓인다고 뭐라고 안 할게요.”
“그건 당연히 하면 안 되죠!”
이렇게 된 거, 그냥 해 볼까?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하던 걸 구경하던 기억을 되살려 대충 찻잎을 넣었다. 중간에 한번 훈수를 둘 법한데도 시더는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서 구경만 했다. 끓은 물을 부은 에스페란사가 문득 물었다.
“근데 진짜로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는 게 귀여워요.”
“아. 네에.”
기다리다 보니 대충 때가 된 것 같아 차를 따랐다. 색은 시커멓고 맛은 떫었다. 시더는 정말로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대신 에스페란사의 찻잔에 우유를 부어 주었다.
“이걸 굳이 먹겠다는 취향도 참.”
“그 정도로 나쁘진 않아요. 하지만…….”
“다음부턴 시키지 말아요.”
“그래야겠단 말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래도 시더는 구태여 그 쓰고 떫은 차를 다 마셨다. 에스페란사는 우유와 설탕을 잔뜩 넣어서 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음료로 만든 다음 찔끔찔끔 마셨다.
“그럼 이제 사이러스가 한 이야기를 복기해 봐야겠네요.”
“다 기억해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친 시더가 대꾸했다.
“요즘 계속 날 과소평가하는 정황이 보이는데, 거꾸로도 읊어 줄 수 있어요.”
“아, 네. 필요 없어요.”
“그거 다행이군요.”
구태여 거꾸로 말하는 묘기를 구경할 필요는 없었지만, 어제 사이러스가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는 건 의미가 있었다. 말에 특별히 숨겨진 뜻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이러스는 본래 말을 돌려 할 줄 모르는 성격이었으니.
에스페란사는 사이러스가 숲에서 해 준 이야기를 시더에게 전했다. 다만 게임 이야기는 빼고. 시더는 가만히 손끝으로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뭐 알아낸 거 있어요?”
찻잔을 말아쥔 에스페란사가 불안한 낯으로 물었다. 시더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은 채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남자, 내게 이상한 호의를 가진 것 같지 않던가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에스페란사는 도무지 사이러스가 시더에게 호의를 보이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둘이 대화는 했던가?
“나한테 몬스터 이빨을 줬잖아요.”
그랬나?
시더가 혀를 찼다.
“당신, 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군요.”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발을 꾹꾹 밟으면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그거야, 당신이 마도 공학자니까요. 나도 줬었잖아요.”
“당신이 날 좋아하니까 준 거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그렇긴 하다. 그때는 물론 이런 감정은 아니었지만 아무 마도 공학자에게나 대뜸 그런 걸 넘겨주진 않는다. 의뢰할 생각이 있어야 주는 거지. 의뢰를 할 생각이 있다는 건 호의와 신뢰가 있다는 것이고. 그러니 그때 에스페란사가 시더에게 몬스터 사체를 준 건 시더에게 호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럼 사이러스는 왜……?”
그들의 유일한 접점은, 에스페란사가 아는 한에서는 단 두 가지뿐이다. 13년 전의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시더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의 공통 지인인 에스페란사. 어느 쪽도 사이러스의 태도를 설명해 주진 못한다.
“에스페란사. 왜 하필이면 1837년이어야 했을까요? 다른 시기를 내버려 두고.”
그러게. 그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이유가 있다면.
“사이러스의 목적과 관련이 있겠죠. 이건 원래 사이러스의 퀘스트였으니까.”
“나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당신은 내 서재에 나타났잖아요.”
에스페란사가 에이번데일 백작 저택으로 간 것은 히든 에피소드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것까지 퀘스트와 연계되어 있었다고 본다면, 사이러스의 목적은…….
“이런 류의 마법은 말이죠. 이동 거리가 늘어날수록 필요한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요.”
손가락이 마치 복잡한 수식을 쓰듯이 빠르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이런 쪽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모르는 건 아니에요. 내 주력 분야가 아니라는 거지.”
변명하듯 빠르게 대꾸한 시더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1838년에 죽는 나와 1837년으로의 시간 여행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무리한 추측은 아니겠죠.”
“그러니까 사이러스는 일부러 당신이 살아 있던 때로 온 거란 말이네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