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난 문답식 강의는 질색이에요.”
시더가 정색하고 말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에스페란사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당신 늘 이런 식으로 말해요.”
“그래서 싫은가 봐요.”
주 심문자인 나쁜 경찰은 그쯤에서 말 끊기를 관두고, 사이러스에게 오만한 턱짓을 보냈다. 요컨대, 우리 할 얘긴 다 끝났으니 네 할 말을 하라는 것이다.
어딘가 익숙한 태도였다.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그러나 사이러스는 전혀 웃지 못했다.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그는 더듬듯이 말했다.
“상처를, 상처를 내야 합니다.”
말을 이어서 하는 것이 조금 힘겨운지, 반 이상 마신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신 사이러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던전의 몬스터들은 다른 세상의 생명체들입니다. 저희는 던전을 만들어서 그 세상의 일부를 옮겨 옵니다.”
에스페란사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치마를 쥐어뜯었다. 몬스터는 어쩔 수 없잖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다른 세상이라.”
시더가 낯선 말을 들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에스페란사는 곁눈질로 시더의 표정을 살폈지만, 다른 말은 없었다.
“저희는 황금 발톱을 아주 많이 사용했고, 그건 곧 이 세상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저희가 통제할 수 없는 구멍이 말입니다. 마도 물리학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가 치유된다고 말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전까지는 예상할 수 없는 때에 던전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이 된다.
“한두 번은 괜찮습니다. 헌터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운이 좋으면 던전을 금방 닫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언제나 운이 좋지는 않을 겁니다.”
몇 번의 불운만으로도 국가가 멸망하기에는 충분했다. 사이러스는 여기서 다리아와 자신의 의견 대립이 생겼다고 했다. 사이러스는 지금이라도 폭주하는 황금 발톱을 부수고 던전을 닫아서 이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했고, 다리아는 반대했다.
일견 다리아의 아집으로 보이기 쉬운 상황이다.
‘하지만 게임이 걸려 있으니까. 돈, 신뢰, 세금이나 법적 책임. 뭐 그런 것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금 더 이상적인 사이러스와 조금 더 현실적인 다리아. 둘의 성격도 어렴풋이 손에 잡혔다.
어쨌든 남매의 의견 대립은 해결되지 않았고, 곧 게임에서도 그 징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고 없이 나타나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던전들.
사이러스는 이 대립이 해결되기를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고, 결국 독단으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떤 오류로 인해 에스페란사가 사이러스 대신 시간 이동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무슨 오류?”
“그러니까, 제가…… 그 퀘스트는 원래 제가 만든 것인데.”
그건 이미 말했다.
“애초에 퀘스트 같은 건 왜 만든 건데?”
사이러스의 귀가 벌겋게 물들었다.
“……제가 그런 걸 좋아합니다. 반쯤은 위장용이고 반쯤은 만들다 보니 좀 신이 나 버렸던 것 같습니다.”
아. 할 말이 없어진 에스페란사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그래서, 퀘스트가 원래 네가 만든 건데.”
“그걸 에스페란사 님의…… 네, 에스페란사 님의 시스템에 숨겨 두었습니다. 제 것은 다리아가 감시하고 있어서.”
말을 대충 얼버무리는 것을 보니 게임 시스템에 숨겨 뒀다는 얘기인 것 같다. 이건 좀 위험한데.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눈을 잠시 가늘게 떴을 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퀘스트’처럼 헌터들의 특수 용어로 이해한 걸까? 에스페란사는 내심 안심하며 빠르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왜 하필 나였어?”
사이러스는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좋아해서…… 자주 살피니까요.”
에스페란사는 자기도 모르게 시더를 돌아보았다. 아까와 달리 팔걸이를 쥔 손에서는 불쾌감이 드러났다. 에스페란사는 손끝으로 그 손등을 달래듯 두 번 두드렸다.
“화 안 났어요.”
“화났냐고 안 했어요.”
시더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다시 사이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사이러스는 황급히 변명했다.
“그,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아무도 관심 없으니 그냥 할 이야기나 하는 게 어떨까요?”
말과 달리 잔뜩 불쾌해하는 어투였다. 사이러스는 에스페란사와 시더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괜한 말을 했다.
“그래서 그런 사고가 일어났던 겁니다. 에스페란사 님이 이 시간대로 이동하신 것을 확인하고 저도 따라서 이동했습니다.”
“이 시간대 말이죠. 구체적으로 1837년.”
“맞습니다, 에이번데일. 바로 황금 발톱의 제작자인 당신이 살아 있었던 때입니다.”
황금 발톱의 제작자.
시더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듣는 순간 자연스레 납득이 가는 일이기도 했다. 이 시대에 어떤 마도 공학자가 있어 세기를 뛰어넘은 발명을 한다면,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말없이 시더의 반응을 기다렸다. 창백한 뺨에 드리운 속눈썹의 그림자가 유독 짙은 부채꼴을 그렸다.
이윽고 침묵하던 시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굳은 얼굴로 사이러스를 쏘아보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알고 있었어요?”
시더는 눈을 내리뜨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처음엔 몰랐어요.”
그러나 그 물건을 보고 난 이후에는 짐작했다.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다만 실패한 연구였으니까. 당신한테도 말한 적이 있죠, 타임머신은 못 만든다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오만하기 그지없는 천재가 ‘못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단 한 가지였기에 놀랐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연구는 성공했습니다.”
“그런 것 같군요.”
시더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가 이 느닷없는 상황을 반가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어린 시절 만들었던 기계로 인해 일어났던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미래라고 해도 자기 발명품이 재앙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제정신으로 들을 수 있을까?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발견하고, 사이러스가 보지 못하게 자기 손으로 덮었다. 시더는 말없이 에스페란사의 손을 붙들었다. 그의 뺨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더 이상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내 시공간 기계는 창고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는 규모의 기계 장치였는데, 당신이 가진 건 주요 부품뿐이군요.”
창고 하나 규모라고? 에스페란사는 시더의 연구소 규모를 대충 알고 있었다. 그 커다란 연구소에도 그 정도 규모의 기계는 없었다. ……아, 거기다. 숲속의 폐가. 사냥용 오두막 옆의 무너진 건물.
“부품만으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돌아가기 위해서는 원래의 기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에이번데일 백작의 저택’이었던 것이다. 그는 황금 발톱의 제작자이자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틀어 그 기계를 없앨 능력이 있는 유일한 인물일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기계가 있어야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럼 우리가 이 시간으로 온 건 어떻게 한 거지?”
“13년 후의 세계에선 기계를 복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에스페란사 님. 하지만 이 시간대에서는 원제작자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에스페란사는 떨리는 눈으로 시더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리뜬 눈으로 눈빛을 숨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이 묘한 호선을 그렸다. 웃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싫다면?”
뭐라고?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작 한마디, 잘못 들을 리가 없었다. 시더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내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알다시피, 난 도와줄 동기가 없어요.”
그는 에스페란사와 눈을 맞추며 달래듯 덧붙였다.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스스로 돌아가는 것을 돕는 것과 내 손으로 돌려보내는 건 다른 문제고. 내가 만든 기계를 믿을 수는 있겠어요?”
“난 믿어요.”
에스페란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거기엔 의문도 망설임도 없었다. 시더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사이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 동료는 어떨까요.”
사이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에스페란사가 믿는다면, 그 역시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이번데일 백작은 언제라도 마음을 바꿀 수 있다. 그게 지금 당장이 될 수도 있다.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사이러스는 궁지에 몰렸음을 직감했다. 시더가 웃는 얼굴로 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렇겠죠. 당신이 날 죽이고 내 연구 노트를 가져갔을 테니까.”
쿵. 의자가 넘어졌다.
거칠게 몸을 일으킨 에스페란사의 리볼버가 사이러스의 미간을 정확히 겨누었다. 사이러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에스페란사와 눈을 마주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긴장이 방 안을 짓눌렀다.
분노에 차갑게 굳은 한 쌍의 자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사이러스는, 에스페란사가 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식은땀이 등 뒤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살의에 반응한 근육이 꽉 조여들었다. 사냥감이 된 것만 같다.
“……에스페란사 님.”
“네가 염치가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일은, 저도 원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해치웠겠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냥 해냈을 것이다. 그러고선 지금, 시더 클라이번의 도움을 얻기 위해 시간을 돌아온 것이다.
살인마. 학살자. 입 안에 경멸의 말이 맴돌았다. 리볼버를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걸 변명이라고 해?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럴 순 없는 거지. 네가 무슨 낯으로 여기 나타나? 어떻게 도와달라고 해?”
살의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울컥 뱉어 버릴 것 같다. 떨리는 손이 리볼버를 고쳐 쥐었다.
죽여 버릴까?
어차피 필요한 정보는 거의 다 얻었다. 사이러스를 죽이고 다리아에게서 황금 발톱을 빼앗은 다음 시더가 기계를 만들어 주면 돌아갈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맨정신으로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의 가치가 효용에 있다면 넌 효용을 다 했어. 무슨 말인지 알아?”
“쏘실 겁니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정말로.
“에스페란사.”
그 모습을 지켜만 보던 시더가 가만히 에스페란사를 불렀다. 사이러스의 미간에 완전히 리볼버를 짓누른 채로 고개를 돌리자, 시더는 한쪽 팔걸이에 턱을 괸 채 웃음을 지었다.
“난 괜찮으니 앉아요. 이번 일에 저 남자가 있으면 편한 건 사실이니까.”
에스페란사의 냉랭한 눈동자가 사이러스를 노려보았다. 게임 친구든,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든, 더는 아군 자리의 구석에조차 놓아 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사이러스는 침음을 삼켰다. 대체 에이번데일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거지? 어째서 그렇게 확신한 거지?
아니.
‘확신한 게 아니라…… 그냥 던져 본 거야.’
맞으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었겠지. 완전히 말려들었다.
에스페란사가 사이러스를 노려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달래듯 에스페란사의 손을 쥐고 쓸어내리던 시더가 사이러스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난 어떤 얼굴로 죽던가요?”
“……그딴 걸 왜 궁금해해요?”
“궁금하지 않나요? 보통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걸 알 기회인데.”
“난 안 궁금해요. 사이러스, 대답하면 죽여 버릴 거야.”
물론 사이러스는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입을 굳게 다물자, 시더는 김이 샜다는 듯 픽 웃어 버렸다.
사이러스가 과거에 그를 죽였다고 해도, 시더는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다르겠지.
이걸로 에스페란사의 사이러스에 대한 호감은 완전히 잘라 냈다고 봐도 좋다.
7년의 세월, 동료애. 참으로 무색하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