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45
145화
“이게 그날 당신이 하려던 이야기였군요.”
시더가 나직이 말했다.
그날 밤의 이야기다.
어깨와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꺼지길 반복했다. 아주 천천히. 숨을 고르는 동안 표정은 석고를 굳힌 것처럼 변함이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시더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그것만은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깨진 신뢰가 발바닥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발끝을 말고 버티다 견디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말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시더는 분명히 말했다. ‘당신이 떠나도 상관없다’고.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시더는 에스페란사의 생각을 읽은 듯이 말했다.
“난 그날 당신의 질문이 이런 뜻이었다는 걸 몰랐고. 당신은 내가 모르는 걸 알면서도 답을 들었어요. ……그건 기만이에요.”
시종일관 낮고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가시처럼 벼려진 비난을 느낄 수 있었다.
시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페란사의 손을 쥐었던 그의 두 손은 비어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거부당한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식어 내리는 것만 같다.
선 밖으로 밀려 났다.
“기회가 없었다고 하진 않겠죠. 처음부터 날 믿길 바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분명 말할 수 있었던 때, 말을 해야 했던 때가 있었어요.”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에이번데일 저택. 마벨우드의 숲. 연구소. 황금빛 들판.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 그 중 어느 때였어도 좋았을 것이다.
“그 많은 기회를 전부 보내고 당신이 선택한 게 바로 이 순간인가요?”
“난…….”
각오했다면 거짓말이다.
마음 한편에는, 시더는 에스페란사가 떠나더라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에게 직접 묻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인데도.
말아 쥔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차마 그 모습을 더 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시더는 사이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려, 쏘듯이 명령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돌아가도록 해요.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기회가 있다면 말이지만.”
사이러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두 사람뿐인 서재에선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발소리가 차츰 멀어지다 완전히 사라졌다. 시더는 핏발 선 눈으로 참고, 또 참았던 말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비참하군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부 망쳐 버렸어.
* * *
수면에 손톱만 한 달이 비쳤다. 약간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
찬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었다. 숄 하나만 걸친 채 벤치 끄트머리에 앉은 에스페란사는 의미 없이 발을 까닥였다. 등불은 세찬 바람에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흔들렸다.
불빛이라고는 이 작은 등불과…… 발코니가 딸린 침실 하나.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은 시더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착잡한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결국 에스페란사를 외면했던 얼굴을 떠올려 보자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뭐라도 해 봐야지. 시더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잘못한 입장에서 입만 다물고 있을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뜩 긴장한 몸이 뻣뻣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벽을 밟고 올라 침실 발코니 난간 위에 서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커튼이 휘날리다, 발코니 난간에 맞고 떨어졌다.
시더는 창문 위로 메마른 시선을 던졌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버릇처럼 열어 둔 것뿐이다. 드나들 손님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지만, 그 하나를 위해서.
……그러나 그는 좀처럼 무언가를 잊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이 계절, 벽난로를 때어도 방에는 한기가 돌았다. 과연 정말로 잊었던 것인지, 혹은 기대하는 바가 있었는지. 그는 거기까지 파헤치지 않기로 했다.
에스페란사는 열린 창문 너머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리는 것이, 평소와는 달리 잔뜩 주눅 든 얼굴이었다.
‘그래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리 달갑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시더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창문틀을 경계 삼아 마주 선 두 사람은 한참 침묵했다. 다시 한 번 거센 바람이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휘감을 때까지.
“춥겠군요. 들어와요.”
그 말과 동시에 시더는 몸을 돌렸다. 에스페란사가 천천히 창문틀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 조금씩 훈기가 돌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래요?”
“듣고 싶지 않으면…… 말고요.”
시더는 말없이 탁자에 빈 브랜디 잔 두 개를 올려놓았다. 붉은빛이 도는 술이 잔의 반절 정도를 채웠다. 그는 두 잔을 채우고,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빈손으로 안락의자에 몸을 묻어 버렸다.
감은 눈꺼풀에서 선명한 거부감을 읽을 수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말없이 카펫 위에 털썩 주저앉아 시더의 안락의자 옆면에 몸을 기댔다. 시더가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바닥에 앉지 말라고 안 했던가요?”
다른 때라면 손을 붙잡아서 무릎에 앉히거나 끌어안고 큰 의자로 자리를 옮겼겠지. 이 계절의 바닥은 카펫을 깔아 놓았다고 해도 차가우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적어도 오늘 밤까지 에스페란사를 걱정하는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세운 손톱이 속내를 긁어내리는 듯했다. 쓰라리고, 오래 거슬리는 상처가 남는다.
“됐어요.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채로, 에스페란사는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에요.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진 못했고. 그다음엔 당신이 내 친구가 됐죠. 나한텐 당신밖에 없었잖아요. 난 당신한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어요.”
결국은 거짓말쟁이가 됐지만.
“전부 게임이라는 건, 그러니까 현실과 상관없는 유희라는 거예요. 사람을 죽여도, 가혹하게 괴롭혀도, 그냥 거친 놀이의 하나인 거죠. 우리는 우리 놀이터가 현실이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알았다면 분명 다른 결과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난 누가 죽든 살든 관심도 없었어요. 어차피 가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이 세계를 방문한 내 목적은 전투…… 그러니까 전투 놀이였으니까요. 숭고한 희생도 아니고 대단한 사명감도 아니고.”
곁눈질로 시더의 얼굴을 흘끔 올려다보았지만, 그림자가 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는 ‘헌터’인 나는, 그리 좋은 사람도, 대단한 사람도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13년 후의 세계에서 만났다면, 날 아주 경멸했을지도 모르죠.”
속내를 박박 긁어 털어놓았다. 벌거벗은 기분이다.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 그것을 평가의 시선 아래 두는 것. 숨이 막히도록 두려웠다. 시더는 어떻게 연구소를 에스페란사에게 보여 줄 생각을 했을까?
시더의 손끝이 무심코 에스페란사의 머리칼을 건드렸다가 데인 듯 급히 거두어졌다. 생각에 잠겨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에스페란사는 무릎 위에 턱을 괸 채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더 좋은 때에 말할 걸 싶었어요. 하지만 좋은 때는 깨뜨리기 아쉬워서 미루고 미루다가…… 이렇게 돼 버렸네요. 하필 그런 때에, 그런 곳에서 알게 해서 미안해요.”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와 규칙적인 초침 소리는 평화롭기만 했다. 침묵 끝에 시더가 물었다.
“끝인가요?”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에스페란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망설이는 사이, 시더는 탁자에서 브랜디 잔을 들어 에스페란사에게 내밀었다. 시야 높이로 내려온 잔을 무심코 받아 든 에스페란사가 눈을 깜박였다. 이건 무슨 뜻일까.
두터운 가죽으로 감싸인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느리게 지나갔다. 술을 조금 삼키자 몸에 열기가 돌았다.
“어, 음. 실제랑은 얼굴이랑 이름도 다르긴 해요. 많이 바꾼 건 아닌데, 이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 개인 정보 문제 때문에. 그리고 또 뭐 있지……?”
“그런 건 됐어요.”
정말 상관없는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더를 올려다보았으나, 시더는 몸을 의자에 묻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뺨에 드리운 벽난로의 불그스름한 기운으로도 냉랭한 외면의 온도를 지울 수 없었다. 에스페란사는 조금 더 서글퍼졌다.
현실에는 가족이 있고, 친구들도 있고, 하루하루 귀찮지만 나가야 하는 직장도 있었다.
이곳에는 시더밖에 없었다. 시더에게 외면당하면, 이 세상에 외면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무릎을 조금 더 가깝게 당겨 모았다.
“내가 보기 싫다거나, 음, 정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거면, 그냥 말해도 괜찮아요.”
이런 얘기를 자기 입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우울해져서 발끝만 바라보았다.
“그건 협박인가요?”
“내가 무슨 협박을 한다고……!”
억울함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시더는 한 자 한 자 억눌러 말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은 여기, 내 집에 머무르는 거예요.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시더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등받이에 짓누르듯 파묻어 버렸다. 다시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는 가식적인 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감정이 더 무거운 쪽이 지는 건 당연하다. 그 정도는 감안하고 있다. 하지만 이쪽은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 보려 했는데 상대는 저토록 쉽게 끝을 입에 담는다면,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시더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애정으로 한 일을 상처 주기 위해 꺼내고 있었다. 스스로를 모욕하는 기분이다. 끔찍하게도.
“내 연구를 궁금해했었죠?”
푹 숙였던 고개를 든 에스페란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당황한 한편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시더는 자학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이어 말했다.
“시공간 기계 연구였어요. 내가 유일하게 실패한 연구라 완전히 폐기했지만, 다시 해 보려고 했죠. 당신이 떠나겠다면, 나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에스페란사가 벌떡 일어났다. 우울이 감돌던 낯이 일순간 환해졌다.
“그럴 수 있어요?”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니 시더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그가 이 이야기를 비밀로 해 두고 있었던 데는 연구의 성패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보다도 에스페란사의 반응을 짐작할 수 없었던 탓이 컸다.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다면, 불확실하더라도 진작 말했을 것이다.
그들 두 사람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을 때에.
“불가능해요.”
“왜요? 시공간 기계는 분명 성공했다고 했잖아요. 이제 부품도 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난 기다리면 되니까 돌아가는 게 좀 늦어지더라도……!”
“아뇨, 시공간 기계로 이 세계의 것을 바깥으로 보내는 건 불가능해요.”
그 말이 천천히 에스페란사의 들떴던 감정을 내리눌렀다. 상기되었던 뺨이 천천히 창백해졌다. 에스페란사는 눈앞이 흐려진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내가 사실대로 말했더라도 똑같잖아요!”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시더는 열이 오른 머리가 울리도록 되뇌었다. 만약 처음부터 알았다면.
“……그랬다면 시도도 안 했겠죠. 처음부터, 날 살리겠다느니 하는 말을 안 했으면!”
말을 멈춘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찌를 듯이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이해한 게 분명했다.
실언했다. 약해 빠진 속내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멋대로 무거워진 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 이렇게는 아니었다. 그는 괴로움과 수치심이 뒤범벅된 얼굴을 손바닥에 묻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 봐요. 나한테 자존심을 지킬 시간을 줘요.”
둔중한 나무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두 사람은 문을 사이에 두고 가쁜 호흡을 정리했다.
최악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