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46
146화
매일같이 증기를 뿜어내던 연구소 굴뚝이 깨끗했다. 바닥이 울리도록 돌아가던 기계들도 전부 멈춘 상태였다.
연구소의 주인은 서재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중이었다. 일부러 틀어 놓은 축음기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연구실 정리를 위해 불려 온 밀런이 혀를 찼다. 젊은 백작의 시선은 빈 소파와 가지런히 쌓아 둔 쿠션에 꽂혀 있었다.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밀런.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알고 있어.”
아니. 이 마도 공학자는 스스로에 대한 파악이 매우 빠른 편이었다. 그것이 긍정적인 쪽이든 부정적인 쪽이든. 밀런은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책장에 책을 꽂아 넣었다.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훌륭한 시종이란 모름지기 입이 무거워야 하는 법. 밀런은 그 원칙에 있어선 부끄러움이 없었다.
“물론 그렇겠지. 말로 했으면 쫓겨났을 테니까.”
“나날이 악덕 주인으로 변해 가시는군요.”
“그럼 악덕 주인답게 노닥거리는 하인을 쫓아내야겠군.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밀런은 미적거리는 척하면서도 재빨리 책을 내려놓고 방을 나갔다. 주인의 심사가 불편한 것을 눈치챈 것이다. 문이 닫히자, 시더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건 정말 화풀이에 불과했다. 차분하게 분노하던 하룻밤이 지나간 이후, 켜켜이 쌓인 감정은 다소 유치한 형태로 발현되고 있었다. 꼴사나운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날 이후, 에스페란사는 작정이라도 한 듯 시더의 생활 반경을 피해 다녔다. 아예 밤이 되기 전까진 저택에 돌아오지도 않았다. ‘나가 보라’고 한 건 시더였지만…… 식사도 챙기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시더가 물어본 것은 아니고, 덴버 부인이 멋대로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이 며칠간은 마치 시간이 굳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지난 아홉 달보다 긴 사흘이었다. 그리고 이 사흘이 흐르듯이 그의 남은 생도 흐르게 될 것이다. 그가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연구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막 시작했던 연구를 중단했으니까. 그 연구실을 아예 엎어 버리지 않는 것은 시답잖은 미련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면 자기 파악이 빠른 성격은 오히려 독이다. 시더는 고민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에서 나온 그는 바로 사흘 전까지 마정석 연구가 진행 중이던 연구실 문 앞에 가만히 멈춰 섰다. 그러다 돌연 헛웃음을 터뜨렸다.
발밑에 떨어진 긴 머리카락 한 가닥. 이 연구소에 드나드는 사람 중 이렇게 긴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은 하나뿐이다. 몰래 왔다 간 모양이지.
그는 허리를 굽혀 머리칼을 손에 쥐었다.
어차피 그 연구는 실패였다. 에스페란사가 아예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안 순간 폐기되어야 마땅했다.
당초의 시공간 기계로도 이곳의 사람이 다른 시공간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른 시공간의 것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그 반쪽짜리 성공조차 엄청난 천재성과 엄청난 행운이 극적으로 교차한 희귀한 우연이었다. 두 번 다시 그런 행운이 찾아올 리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머뭇거리는 것부터가 꼴사나운 미련이다. 결국 에스페란사는 떠날 테고, 그는 여기에 남는다.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마정석 연구는 그렇다 치고, 시공간 기계의 복구는…….
문고리를 놓은 시더는 다시 서재로 향하며 꼬인 속으로 결론을 냈다.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묻지도 않은 걸 벌써부터 고민해 줄 필요는 없지.’
* * *
금방이라도 엉킬 듯 휘날리던 머리칼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아기자기한 장난감 도시 같던 시가지가 끝나고, 칙칙한 길로 이어졌다. 에스페란사는 존재감을 감춰 주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좁은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갔다.
까만 맵이 상앗빛으로 밝아지는 걸 확인한 에스페란사는 낡은 주점으로 들어갔다.
마부, 광산 노동자, 굴뚝 청소부, 농장 노동자, 공사장의 일용직을 찾는 인부들이 섞여 탁한 공기를 내뿜었다.
에이번데일은 작은 도시였으나 근처에 마정석 광산이 있어서 꾸준한 인력의 유입이 필요했다. 광산이란 사람이 곧잘 죽어 나가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일이라도 원했다. 맞은편의 직업소개소는 어린아이들부터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은 환자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그나마 가장 깨끗한 구석에 앉은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헌터 일을 하다 보면 가진 돈이 많아도 이런 곳에 올 일이 종종 있었다. 사이러스는 주점에 사람이 많으나 적으나 구석 자리를 찾았다.
낡은 나무 탁자에 술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누가 왔다 갔나 보지?”
“정보상입니다. 기존에 쓰던 루트를 쓸 수 없으니까요.”
에스페란사가 그랬듯 사이러스도 새로이 정보를 얻을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특히 다리아의 시야에 닿지 않는 새로운 곳이. 납득은 간다. 후드 소매로 덮은 손등으로 술잔을 밀어낸 에스페란사가 사이러스를 쏘아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래? 그래서 왜 불렀는데?”
묻고는 있었지만, 답은 뻔했다.
“에이번데일 백작은 협조를 약속했습니까?”
추궁하려고 불렀겠지.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아니. 지금 같아서는 그 사람이 우릴 도와줄 이유도 없지. ……뭐 하나만 묻자. 너와 다리아 말이야, 여기선 아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 여왕도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처음에는 생각지 못했다.
“여기서 금이든 보석이든 얻어서 원래 세계로 가지고 나가면 되는 것 아니야?”
굳이 이 세계에서 권력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들이 이 세계 사람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시공간 기계로는 이 세계의 것을 다른 세계로 보낼 수 없다는 시더의 말이 사실이고, 그 문제가 13년 후에도 해결되지 않았다면, 사이러스와 다리아가 구태여 복잡한 방법을 사용한 이유도 납득이 갔다.
“이 세계의 것을 가지고 나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반대는 가능합니다만, 저희로서는 그럴 이유도 없고 별로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세계에서 권총 같은 것을 굳이 구해서 가지고 들어오는 것보다 마력을 쓰는 게 훨씬 편했을 테니까.
차원 이동에 관해선 13년 후에도 별다른 해결법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에스페란사가 돌아가면 정말로 시더와는 영영 다시 만날 수 없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사실인데, 왜 처음 알게 된 것처럼 충격적인지 모르겠다. 잠시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인가? 그런 거라면 진실을 알았을 때 시더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에스페란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흘 전, 시더의 침실 문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망부석처럼 서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침실 안쪽은 고요하고, 복도는 어둡고 서늘했다. 추를 단 것 같은 발을 끌어 움직이면서, 에스페란사는 처음 시더에게 입을 맞췄던 날 밤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었다.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죽는 것과 뭐가 다르죠?’
말에도 뒷면이 있는 것 같다. 다시 떠올린 그 말은 처음과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지켜 주겠다고 말했을 때, 시더는 놀라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그때 그는 예정된 때에 죽는 대신 에스페란사와 함께 13년 후의 세상에서 살아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는 흔쾌히 그런 불확실성으로 뛰어들 결정을 했다.
하지만 그 작은 가능성조차 부서진 지금, 시더는 어쩌면 다시 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구태여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않더라도 그런 위기를 피해 보려는 생각도 없던 때로.
불길한 생각이 에스페란사를 사로잡았다. 그날 밤은 유독 서늘해서, 에스페란사는 헌터의 몸을 가지고도 조금 앓는 듯한 기분으로 밤을 보냈다.
죽지 말았으면 좋겠다. 에스페란사가 돌아간 이후에도. 조금 덜 행복하더라도 살아 줬으면 좋겠다. ……이기적인가? 이기적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사이러스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그는 에스페란사가 원하는 걸 갖고 있었다. 그의 요구 사항도 짐작 가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스스로가 대단한 협상가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상대가 비교적 만만하니까. 공짜로 얻으면 제일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도 그들은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원하는 건 그거야? 시더가 시공간 기계를 다시 만들어 주는 것?”
“그리고 황금 발톱을 파괴해 주는 것까지입니다.”
그래. 그것도 있었지. 잊고 있었다. 퀘스트 명도 ‘황금 발톱을 찾아라!’ 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머리가 복잡했다. 처음의 추측이 실패한 것이 에스페란사의 잘못만도 아니었다. 애초에 단서가 엉터리였는데! 불만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차피 시공간 기계를 만들 생각이었으면 귀환증은 대체 왜 넣어 놓은 건데? 그거 쓸 수 있긴 해?”
“귀환용은 아니고, 좌표 추적용입니다. 기계가 있다고 해도 어떤 세계의 어떤 시점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면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그걸 굳이 왜 퀘스트 보상으로 넣어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퀘스트 자체도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으니 이것도 이유는 비슷하겠지. 처음부터 사이러스가 퀘스트를 받아서 이 시간대로 왔으면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는 에스페란사 님도 돌아가길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황금 발톱이야 네 일이니까 알 바 아니지만 나도 돌아가는 건 원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정인데, 시더에게 그것까지 도와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잖아.”
지금으로서는 강요는커녕 권유도 어려울 것 같다. 시더를 피해 다닌 지 꼬박 사흘. 에스페란사는 배낭 하나 들고 가출한 꼬마마냥 서러운 상태였다.
“다투셨습니까?”
“……그래. 너도 뻔히 봤잖아.”
노골적인 불만에도 끄떡도 하지 않은 사이러스는 럼을 투박한 잔에 가득 채우며 말했다.
“저희의 목표를 위해서라도 빨리 화해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지금 이게 남의 일인가? 시더가 분노한 데는 사이러스의 지분도 분명 있었다. 에스페란사의 탓이 대부분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에스페란사 님. 내키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사이러스는 시더의 감정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시더를 딱 마도 공학자로만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그럴 수 없었다.
드높던 자존심이 꺾였다. 상처 입은 모습을 들켰고, 그 순간 느낀 굴욕감까지 드러내고 말았다. 그에게 에스페란사를 돌려보낼 시공간 기계를 만들라고 하면 매분 매초 스스로를 상처 입혀야 할 텐데, 그런 걸 강요할 수는 없었다.
사이러스는 갈등에 빠진 에스페란사를 내려다보며 잔을 비웠다. 이로 짓이긴 입술이 너덜거리는 걸 보니, 갈등이 쉬이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원하는 걸 주는 수밖에. 단, 조건부로.
“시간이 없습니다. 백작은 곧 죽을 겁니다.”
“내가 죽지 않게 할 수 있어.”
“어떻게 말입니까? 백작이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르시잖습니까? 당장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처럼 백작을 피해 바깥으로 나왔다가 그의 시체와 재회하게 되실 수도 있겠지요.”
물론 오늘은 아니다. 백작이 죽는 건 내년의 일이니까. 에스페란사의 존재가 변수가 되어 이 시대의 다리아와 사이러스가 계획을 앞당길 수는 있겠지. 그러나 다리아의 방식을 알고 있는 사이러스는 지금이 아직 때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천재 마도 공학자 에이번데일 백작에 대한 포섭 시도, 협박, 살해 시도, 그리고 살해. 그 일련의 과정들은 사이러스의 머리에 있었다.
이 세계에서, 오직 그만 알고 있다.
“에이번데일 백작과 관련된 다리아의 계획 전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공짜는 아니겠지. 다음에 올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에이번데일을 기계가 있는 창고로 데려와 주십시오.”
“당장 기계를 다시 만들라고 강요하는 건 안 돼.”
차라리 미친 척 하루 종일 붙어 있고 말지. 만약 사이러스가 시더를 협박하려고 든다면…….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사이러스의 심장을 노려보았다. 죽이지 않고 사이러스를 제압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의미가 명료한 시선을 마주한 사이러스는 재빨리 에스페란사의 양손을 살폈다. 길고 넓은 폭의 소매가 손등을 가리고 있었다. 안에 든 것을 충분히 숨길 수 있을 만큼. 한 번도 에스페란사를 경계해 본 적이 없었기에 깨달음은 한발 늦게 찾아왔다.
“……기계가 무사한지 확인만 하겠습니다.”
손등을 덮은 소매 안쪽에서 장전된 리볼버를 딸깍거린 에스페란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는 해 보겠지만, 거절하면 그걸로 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