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47
147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장 어떻게 시더에게 말을 할지부터 문제였다. 늦은 아침까지 침실을 지키며 고민하다가 슬금슬금 밖으로 나온 에스페란사를 발견한 애니가 반색했다.
“오늘은 웬일로 아침부터 나가시질 않네요.”
“매일 나갈 수는 없잖아. 갈 데도 없고.”
“흐음.”
애니가 눈을 찡긋거렸다. 마치 네 속을 다 안다는 듯이. 에스페란사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럼 오늘은 뭘 하실 예정이세요? 할 일이 없으시면 저랑 같이…….”
복도 반대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말을 하다 말고 멈춘 애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에스페란사의 시선이 문 앞에 선 남자의 등에 꽂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층이었지.’
여기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어떡하지?
“애니, 내려가 있을래?”
“네. 좀 있다 불러 주세요.”
눈치 빠른 애니는 가져온 청소 도구를 그대로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손에 든 책자를 넘기느라 앞을 보지 않고 걷던 시더가 발소리를 듣고 멈춰서 고개를 들었다.
에스페란사를 발견한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었다. 그는 어설픈 미소를 띤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제 피하는 건 끝났나 보죠?”
역시 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던 에스페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있어요.”
“해요.”
시더는 의외로 선뜻 그렇게 말했다. 기분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웃음기를 머금은 눈이 예전 같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마벨우드에서 머물 때와는 엇비슷하게 느껴졌다.
화가 좀 풀렸나?
“어제 사이러스를 만나고 왔어요.”
입가에 감돌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표정 변화가 큰 것도 아닌데 그 작은 차이로 공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그와 백날 상의해 봐야 소용없을 텐데. 당신이 해결해야 할 역경은 분명하지 않나요?”
마치 못 알아들을까 신경이라도 써 주듯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킨 시더가 빙그레 웃었다. 이번의 웃음에서는 도저히 착각할 수 없는 불쾌감이 느껴졌다.
에스페란사는 당혹스러웠지만, 애써 침착을 가장했다.
“일단 당신은 역경이 아니에요.”
시더의 웃음이 조금 일그러졌다.
“사이러스한텐 물어볼 게 있어서 다녀왔어요. 다리아가 당신을 어떻게…… 죽였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걸 알려 주는 대가로.”
비뚜름한 웃음을 지은 시더를 올려다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을 그 기계가 있는 창고로 데리고 오래요. 거절해도 어쩔 수 없지만요.”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하고 있군요?”
구둣발이 딱딱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좁혔다. 위협적이지는 않았으나, 상대가 느끼는 불쾌감이 열기처럼 밀려들었다. 시더는 이제 일그러진 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당신은 이 문제에서 주도권이 없어요. 그 잘난 사이러스도 마찬가지고. 둘이 멋대로 거래를 하든 합의를 하든, 내가 따라 줄 이유도 없고, 애초에 당신이 그래서도 안 됐단 말이에요. 알겠어요?”
“불쾌했다면 미안하지만, 난 그냥 맘이 급했어요. 그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잖아요. 물론 최대한 막으려고 노력하겠지만, 뭐든지 알고 있는 게 나으니까요.”
“고맙지만 필요 없어요. 과도한 참견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뒤늦게 분노가 치솟았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비난을 받는 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상의 없이 앞서 나간 잘못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정도로 비꼴 필요가 있나? 다른 것도 아니고, 자기를 살리겠다고 하는 일인데! 그래서 지금 죽고 싶다는 거야, 뭐야?
더 참지 못한 에스페란사가 발을 굴렀다.
“과도한 참견이요? 그럼 차라리 화내요! 빈정거리지 말고! 누가 화내지 말랬어요? 죽지 말라고요!”
화가 난 것은 시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딱딱하게 쏘아붙였다.
“그게 문제군요. 당신이 내가 죽는다는 걸 알아 버려서 거슬리는 거죠. 몰랐다면 편하게 돌아갔을 텐데 안타깝게 됐어요.”
이건 또 무슨 밑도 끝도 없는 비난이란 말인가. 에스페란사는 이제 서러워질 지경이었다. 왜, 왜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게 에스페란사만의 잘못도 아닌데.
미리 말하지 못해 시더를 괴롭게 만든 잘못은 분명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을 텐데. 비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대체 뭐가 문제예요? 내가 별걸 바랐어요? 내가 돌아간 후에도 당신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대단히 특별하게 살라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하던 연구도 하고, 존경도 받고, 친구도 사귀고, 결혼도 하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멎었다. 입술이 떨렸다. 괜한 말을 했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아니었다. 왜 머리에 열이 차면 헛소리만 나오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시더의 얼굴은 더 굳을 수 없을 만큼 냉랭해졌다.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게 당신이 세워 준 내 미래 계획인가요? 적당한 숙녀를 찾아서 결혼도 하고, 애도 한 셋쯤 낳고?”
“셋이나 낳을 필요는 없잖아요!”
미쳤어. 이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소리지? 창피해 죽을 것 같다.
에스페란사는 기름 덜 먹인 오토마톤처럼 삐걱거리다 아예 복도에 주저앉았다. 한바탕 전투라도 치른 것처럼 숨이 가빴다. 딱딱하고 차가운 벽이 뒷머리에 닿자 날아갔던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이렇게 비난받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결혼이고 뭐고, 그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냥 화나서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시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이제 그가 듣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었다.
“내가 당신을 상처 입혔다는 건 알아요. 지금까지 당신을 속인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내 말을 못 믿겠다든지, 나한테 정이 떨어졌다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했으나, 역시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진짜로 정이 다 떨어졌나. 에스페란사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냥 난 당신한테 미안했고, 그거랑 별개로 당신이 죽는 건 막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정보는 사이러스가 가지고 있으니까 만나러 간 것뿐이에요.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사람도 당신이 죽지 않게 지켜야 하는 건 마찬가지네요. 괜한 짓을 했어.”
지금까지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멀쩡한 상태였으면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을 리가 없다. 어쨌든 다리아의 계획을 알고 있으면 유리한 것은 사실이니까, 아예 손해를 본 건 아니지만…… 그것도 거래가 이루어졌을 때의 일이다.
보아하니 설득이 먹힐 것 같지도 않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늘어놓고, 아무런 이득 없는 말싸움이나 하고.
이젠 스스로가 뭘 어쩌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돌아가야 한다는 목적도 있고, 그 목적으로 가는 작은 목표들도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왜 길을 잃은 기분일까.
정말로 길을 잃은 걸까, 아니면 기댈 곳을 잃은 걸까.
처음부터 이 세계에 정을 붙이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갈 때 미련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을 주더라도 스물일곱 해 살아온 진짜 세계만은 못할 테니까. 얼마 남지 않은 가족과, 친구들과, 그 세계에서 쌓아온 노력과 시간들보다 무거운 것이 고작 몇 달 만에 생길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에스페란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구겨져서 생각을 해 봐야 또 엉뚱한 헛소리나 해대겠지.
“할 말 끝났어요.”
시더는 여전히 벽에 기댄 채 에스페란사가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에스페란사 위로 드리운 그림자는 무게도 없이 온몸을 짙게 물들였다.
부드럽게 헝클어진 머리칼을 바라보는 눈에 언뜻 온기가 차올랐다. 단 하나의 거짓말로 무너뜨리기엔 쌓아 온 것이 많은 두 사람이다. 에스페란사의 걱정을 이해한다. 진심이란 것도 알았다.
속이 뒤틀리고 혀가 날카로워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시무룩해진 얼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가슴 한구석이 조여들었다. 신뢰가 부서지고 애정에 미움이 섞여도 그렇다. 또 져 주는 수밖에 없지.
하지만 조건 없이 져 주는 건 이제 끝났다.
“그럼 이제 내 대답을 들을 차례네요.”
돌아서려던 에스페란사가 멈춰 섰다. 별 기대는 없는 눈이었다. 시더는 지하에 처박혔던 기분이 조금 즐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죠? 내가 당신 부탁 들어주지 않은 적 있었나요?”
에스페란사의 눈이 시더의 의중을 살피듯 가늘어졌다. 바로 며칠 전까지 그는 경계할 필요 없는 절대적인 아군이었지만, 더 이상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건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부탁인 것 같아요. 당신을 곤란하게 하려고 한 게 아니니까…….”
사이러스를 다시 만나는 것은 시더에게 껄끄러운 일일 것이다. 사이러스가 그를 죽인 것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바로 며칠 전에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잊지 않고 있을 테니까. 아직 기계를 만들어 주겠다고 확답을 준 것도 아니었다. 거래 조건을 채우지 못한다면 에스페란사의 체면이 조금 구겨지겠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당신이 곤란해지겠죠. 나한테 부탁해요. 들어줄게요. 단, 조건부로.”
조건부로. 에스페란사는 입 안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그건 깨진 신뢰의 증거였는지도 모른다. 무한해 보이던 애정의 바닥이었는지도.
“무슨 조건인데요?”
시더는 다시 웃었다. 눈을 살짝 접어 웃는 그 웃음에서 에스페란사는 애정의 편린을 확인했다. 아직 거기 있다.
“당신이 돌아간다면, 돌려보내는 건 나여야 해요. 설령 실패하더라도. 만약 사이러스가 다른 마도 공학자에게 맡기자고 하거든 거절해요.”
“사이러스는 당신밖에 못하는 일이라고 했어요.”
“난 그를 안 믿어요.”
에스페란사는 문득 스스로가 사이러스의 말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7년 동안 게임 친구로서 쌓아 온 밤톨만 한 신뢰도 있었고, 믿기 어렵지만 그럴듯한 이야기를 했으니까. 하지만…… 시더의 말이 맞다. 휘둘릴 필요는 없었다.
“설령 다른 마도 공학자가 당신을 돌려보내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 대답을 기다려요.”
피하고 도망치던 시선이 다시 얽혔다. 다소 집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할게요.”
“……당신을 용서한 건 아니에요.”
시더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에스페란사는 가만히 서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시더의 서재와 침실은 모두 복도 반대편에 모여 있었다. 처음부터 서재로 가려던 생각이었다면, 그는 이 복도를 지날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