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5
15화
어차피 퀘스트는 황금 발톱을 찾는 것이다.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고 꼼수를 써서 원래 시간대로 돌아간들 ‘로그아웃’까지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다. 괜히 잘못했다가 시더 클라이번도 없는 13년 후에서 혼자 방황하는 것보다야 여기서 그의 도움을 받으며 퀘스트를 깨는 것이 낫다.
“이건 이대로 됐고, 그래서 왜 왔어요? 피곤해 보이더니.”
“누구 때문에 피곤한 건데……. 럭스 부인이 샌드위치를 가져다주라고 해서요. 다 안 먹으면 안 내보내 준대요.”
혹시나 해서 문고리를 만져 봤는데 잠겨 있었다. 이래도 돼?
“로드 에이번데일, 집주인 맞아요?”
“스페어 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내가 아직 집주인이긴 한 것 같네요.”
그는 서랍에서 열쇠 뭉치를 꺼내 흔들며 말했다. 럭스 부인이 설마하니 그걸 몰랐을 리는 없고.
“하지만 일단 우리 가정부의 의견을 존중하도록 하죠. 샌드위치는 다 식었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주방장의 솜씨가 훌륭했다. 샌드위치 하나를 만들어도 겉은 바삭하고 안은 폭신한 빵에 얇은 햄과 야채와 고기와 소스를 적당한 비율로 넣어서 만들었다. 심지어 작게 자른 샌드위치 하나하나의 내용물도 다 조금씩 달랐다.
‘말은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한 가상세계라지만, 음식까지 영국 음식을 가져올 순 없었겠지.’
가상 현실 게임에선 이런 것도 꽤 중요한 요소였다. 맛없는 걸 먹고 싶으면 직접 해 먹으면 되지, 굳이 게임까지 들어와서 먹을 필요가 없으니까. 게다가 게임 내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 돈을 내면 그만큼 다른 곳에 쓸 돈이 없어지고, 플레이어들은 현질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다행인 일이다. 게임으로 즐길 때야 음식이 맛없어도 나와서 맛있는 걸 먹으면 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으니까.
“다 먹고, 들어가서 쉬어요.”
“…….”
다 먹고 나서는 트롤 가죽 얘기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러나 시더는 손을 닦아 내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 말할 정신이 아니에요.”
“제가요?”
“네.”
멀쩡한데. 그러나 시더는 세뇌 수준으로 말했다. ‘너는 지금 멀쩡한 정신이 아니고, 돌아가서 쉬어야 한다’고.
왜 저러는 건가 했는데, 그냥 자기 연구를 마저 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여간 제멋대로지.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특별한 일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에스페란사는 시더를 좀 비꼬아 준 후에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자니 퀘스트 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느낌표가 떠 있었다. 이런 건 잘 보이게 좀 해 놓지. 느낌표를 누르자 차르륵 소리를 내며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황금 발톱을 찾아라!]진행률: (1/???)
완료 보상
―칭호: 시간의 지배자
―아이템: 황금 발톱, 귀환증(집)
뭘 했다고 1이 올랐지? 트롤 가죽 때문인가?
노올랍다. 고작 그걸로 1이 오를 정도면 ‘???’ 안에 들어 있는 숫자는 생각보다도 더 클 것 같다. 저게 설마하니 세 자리 숫자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정말 백 단위를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
잔뜩 피를 묻혔던 손을 뻗어 보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여기가 진짜 게임 속이기는 한가? 눈앞의 퀘스트 창을 보면 그런 것 같다가도, 의심이 속을 치고 들어온다.
13년 전의 도시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놨다고? 그것도 섭종을 위해서? 그게 말이나 돼?
게다가, 벌써 2주가 지났다.
‘현실의 내 몸은 어떻게 됐을까?’
* * *
다음 날, 시더는 웬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했다. 그의 생활 패턴에 맞춰 느지막이 일어났던 에스페란사는 백작이 이미 출타했다는 소리를 듣고 집사에게 물었다.
“로드 에이번데일이 열두 시 이전에 일어날 수도 있어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같은 기능은 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을 알아챈 집사가 멋쩍게 웃었다.
“백작님이 썩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신 건 아니지만, 의회의 부름에는 나가실 수밖에 없지요. 돌아오시면 아마 낮잠이라도 주무실 겁니다.”
“아하.”
그제야 납득이 됐다. 고작 몇 주 본 것만으로도 손님에게 이런 편견을 심어 준 백작은 각성해야 한다.
하워드 집사는 당분간 좀 바빠질 거라고 덧붙였다. 오히려 개회하면 덜 바빠지는데, 개회 직전에 가장 바쁘다고. 앞으로 한 달 남짓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럼 연구도 힘들겠네요?”
연구를 못 하는 시더 클라이번은 상상이 안 가는데?
“그게, 다른 분이라면 그렇겠지만, 저희 백작님은 그냥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연구하시지요…….”
아하.
“영지 일은 내팽개쳐 두시고요. 의회 개회와 영지가 바빠지는 시기가 다른 게 정말 다행이지요.”
그건 영주로 이루어진 상원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영지가 덜 바쁘고 의회 때문에 귀족들이 모인다는 것은, 사교계 시즌의 시작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가씨께서도 옷을 맞추시고 사교계 행사에 얼굴을 비추셔야지요. 백작님을 닮으시면 큰일 납니다.”
“로드 에이번데일은 사교계에 잘 안 나가시나 보죠?”
집사가 세모꼴로 눈을 떴다. 어디 나갈 성미냐는 뜻이다. 그렇긴 하지. 원래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사교 행위는 거리가 멀다.
“올해는 아가씨가 있으니 좀 낫겠습니다만.”
이쪽도 사교계에는 별 관심 없다는 점에서 집사가 믿고 있는 것은 공수표나 다름없었지만.
“의회라…….”
그러고 보니 의회에는 높은 귀족들이 모이게 되어 있지. 그럼 정보가 좀 있으려나?
* * *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웃음을 지은 남자가 모자챙을 잡아 내렸다. 이만 가 보겠다는 뜻이었다. 노신사가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말게. 백작, 자네 나이도 벌써 스물 중반 아닌가?”
내려 묶은 금발이 흔들렸다. 시더는 단호히 잡힌 어깨를 빼냈다. 노신사는 당황해 덧붙였다.
“자네도 이젠 결혼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네. 연구, 좋지. 자네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아. 하나 가정을 이루고 나면 연구도 더 빛을 보지 않겠는가. 늙은이 기우라고 넘기지만은 말아.”
대략 개소리였다. 가정과 연구는 아무 상관도 없다. 오히려 집에 신경 써야 할 사람이 새로 들어오면 연구 시간이 줄어들고 귀찮아질 따름이었다.
뇌리에 집에 새로 들어온, 신경 써야 할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입가에 웃음기가 돌았다.
“옳은 말씀입니다.”
노신사가 반색했다. 헛소리 취급할 줄 알았는데, 이 똑똑하고 건방진 젊은 백작이 웬일로 그의 말을 들어주는 기색을 보이니 신이 났다.
“그래. 좋은 생각일세. 마침 사교계 시즌도 되었으니, 신붓감을 찾아보게나. 차기 에이번데일 백작 부인은 누가 될지 나도 정말 궁금하군.”
시더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리페일리 백작께 따님이 있지 않으셨는지? 올해 사교계에 데뷔했다고 하셨던가요?”
허허롭게 웃던 노신사, 리페일리 백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에이번데일 백작은 남에게 소개해 주기에 면이 팔리지 않는, 객관적으로 훌륭한 신랑감이었다. 외모도 훌륭하고 매너도 나쁘지 않으니 귀부인이나 어린 아가씨들도 좋아했다.
하지만 사윗감으로는, 미치지 않고서야?
백작 부인 타이틀에 눈이 멀어 결혼시켰다간 딸이 연구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남편 얼굴이라도 보려고 애쓰다 늙어 버릴 것이다. 장인에게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 줄 리도 없었다. 리페일리 백작의 열여덟 먹은 딸은 상관없으니 말이라도 넣어 보라고 채근했지만, 어디 그렇게 둘쏘냐. 노신사는 최선을 다해 얼버무렸다.
“내, 내 딸은 좀 어리지. 조, 조카는 어떤가! 조카딸은 이제 스물이 되었으니 자네와 나이 차이도 적고.”
탁. 시더의 지팡이가 의회의 대리석 바닥에 부딪혔다. 곱게 생긴 얼굴이 노신사를 향해 웃었다. 웃음치고는 묘하게 단호했다.
“조카따님의 부친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실 것 같아서 싫다고 하면 이해하시겠지요?”
할 말을 잃은 노신사를 뒤로하고, 에이번데일 백작은 마차로 향했다. 마도 공학자인 그의 마차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공작의 마차보다 기능적이었다. 일단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노신사가 입맛을 다셨다.
“사윗감만 아니면…… 참 괜찮은데.”
“딴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제지요.”
보좌관의 말이 맞았다. 리페일리 백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거나 그는 스물다섯 먹은 남보다야 늦둥이 딸의 혼사가 더 중요했다.
남의 기분을 잡쳐 놓은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사자, 시더 루스 클라이번은 증기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내내 기분이 저조했다. 오지랖 넓은 늙은이에게 붙잡혀 30분이나 허비한 데다가 쓸데없는 참견까지 들었다.
30분이면 톱니바퀴 수십 개를 바꿔 끼우고, 회로 대여섯 개를 고쳐 볼 수 있는 시간인데. 리페일리 백작은 잔소리 들어 준 데에 보상이라도 지급해야 하는 게 아닌지?
“백작님…… 그, 괜찮으십니까?”
마부 테일러가 눈치 없이 말을 붙였다. 시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들어가 봐.”
그래도 집에 들어오니 좀 살 것 같았다. 여긴 그를 괴롭히는 쓸데없는 것이 없었다. 고용인들은 언제나 예의와 선을 지켰고, 가끔 선을 넘더라도 적당한 재치를 부렸다. 어제의 럭스 부인처럼.
신사 숙녀라는 자들이, 기껏 좋은 옷을 차려입고 의회에 근엄하게 앉아 있어도 하는 짓은 노동 계급인 고용인들만 못하다니, 창피한 줄 알아야지.
집사에게 모자와 지팡이를, 밀런에게 겉옷을 맡긴 시더는 바로 서재로 향했다.
“아, 서재에는…….”
밀런이 뭐라고 하려 했으나, 이미 시더가 서재 문을 열어 버린 후였다. 그가 쓰는 의자가 아니라 작은 의자와 간이 책상을 꺼내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에스페란사. 당신이 왜 여기 있죠?”